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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강독3] "<지식의 고고학> 읽기" 강사 인터뷰 두 번째2018-08-18 10: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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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강독 강좌 인터뷰 후반부

 

인터뷰 질문 및 정리: 배경진 & 조지훈


  


Q 강좌 소개를 살펴보면 푸코에게는 담론이 주요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담론과 달리 푸코가 고유하게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담론은 무엇인가요?

 

A 푸코는 담론을 동일한 형성체계에 의해서 조직된 언표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합니다. 말이 많이 어렵죠? 그런데 푸코의 논의를 찬찬히 따라가면 이해 못할 개념도 아닙니다. 우선 담론이 '언표들의 집합'이라니 담론을 이해하려면 일단 언표 개념을 이해해야 겠죠? 언표는 모든 언어적 단위들, 혹은 언어적 존재들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적 단위들, 혹은 언어적 존재들이란 가령 진위 여부의 판별이 중요한 명제, 혹은 문법적 원칙이 중요한 문장 등이죠. 그런데 언표는 이런 언어적 단위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리잡고 있는 어떤 기능이예요. 누가 가령 이런 진술을 했어요. “그 닝겐이 한 말 완전 띵언, 오지고 지리고 레잇고”.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이런 진술을 했어요. “그 사람이 한 말은 정말 명언이다. 그 말 진짜 좋은 말이야.” 이 두 진술의 의미는 같아요. 하지만 언표로서는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두 번째 진술은 전형적인 문장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진술은 엄밀히 말하면 문법적 규칙에 의해 성립되는 문장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닝겐이야 인간을 뜻하는 일본어의 음차라고 하더라도, ‘띵언이나 '오지고 지리고 레잇고는 한국어 문법체계상 성립할 수 없는 표현이죠. 같은 의미를 갖지만 전혀 다른 효과와 기능을 갖는 표현들입니다. 이런 차이는 어떤 차원에서 발생될까요? 푸코는 바로 언표들이 체계화되는 장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온다고 말할 거예요. ‘띵언’, ‘오지고 지리고 레잇고등의 표현과 명언’, ‘진짜 좋은은 의미가 아니라 언표의 체계화 양상이라는 수준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두 표현의 차이는 언표로서의 차이라는 거예요.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죠.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라는 표현은 어떤가요? 문장의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표현의 의미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협영화 주인공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하는 표현으로서 이 문장의 의미-효과와 연인 사이의 대화에서 발화된 표현으로서 이 문장의 의미-효과는 전혀 다르죠. 그러니까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이 진술은, 사실 수많은 맥락들 속에서만 의미값과 그 효과를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 표현만 존재하고 이 표현이 자리 잡는 어떤 체계화된 장, 혹은 맥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이 표현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의 순수한 언표, 특정한 방식으로 체계화되기 이전의 언표입니다. 푸코에게 결국 언어적 단위들, 표현들은 이 순수 언표를 최소의 조건으로 하여, 그리고 그 언표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체계화되는 장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문장이나 명제, 혹은 시적 표현이나 수학적 정리 등은 언표가 특정한 양상으로 분화되는 형태인거죠.

담론은 바로 특정한 방식으로 체계화된 언표적 장을 조건으로 하여 어떤 성격을 부여받은 언표들이 구성한 집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하나의 담론은 다른 담론과 언표가 조직되는 규칙,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구별될 수 있는 거죠.

 


Q. 언표 개념은 알 듯 말듯한데, 담론 개념은 여전히 어렵네요.

 

A. 언표 개념도 그렇고 담론 개념도 그렇고 이 인터뷰에서 전부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강좌는 할 필요가 없겠죠? 하하하. 이 자리에서는 그 개념들의 윤곽 정도만 그려볼 수 있을 듯 해요. 자세한 것은 당연히 지식의 고고학을 함께 읽어가며 파악해야 겠죠. 그럼 일단 담론 개념의 윤곽 파악을 위해서 조금 우회해 볼까요?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인간 주체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다루는 분야를 인식론이라고 하죠? 인식론은 가령 여기 내 눈앞에 컵이 있으면 컵이라는 인식대상이 나라는 인식주체에게 어떻게 하여 정확하게 파악되는가를 다룹니다. 이때 대상은 여기 이미 있는 것이죠. 이 컵은 자연의 존재예요. 그런데 푸코는 자연적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조건에 따라 무엇이 인식의 대상이 되고, 어떤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해요. 즉 대상이 실존하고, 인식 주체가 그와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는 시작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인식되려면 먼저 그 무엇인가가 인식의 대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상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규칙이 설정되어야 그 규칙 속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 결과, 즉 앎이 형성된다는 거죠.


히에로니무스, <바보들의 배> 


 가령 광기라는 것이 중세 시대의 종교적 맥락에서 파악될 때와 근대의 정신의학적 맥락에서 파악될 때 동일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에 일관성이 없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갑자기 공격적이되고 등등의 특징들이 자연적으로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성질의 발생 원인, 그것의 사회적 의미,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중세의 종교적 맥락과 근대의 정신의학적 맥락에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양자의 대상은 동일한 것이 아니죠. 종교적 맥락에서 광기라는 대상이 구성되고 이해되고 취급되는 방식과 정신의학적 맥락에서 광기라는 대상이 구성되고 이해되고 취급되는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인식의 대상은 언어적 장 속에서 구성됩니다. '광기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는 언어적 규정 속에서 비로소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광기를 규정하는 언어 양식에는 문장의 층위나 명제의 층위도 있을 수 있고, 혹은 법적 진술의 층위, 윤리적 진술의 층위, 문학적 진술의 층위 등도 있을 수 있죠. 푸코는 근대 정신의학에서 광기를 대상으로 구성하고 이해하고 취급하는 방식은 바로 이러한 언어적 진술들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거예요.

 이때 각각의 진술들의 층위에 어떤 공통된 규칙들의 체계가 형성되면서 광기에 대한 담론이 됩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형성 체계에 의해 조직화된 언표들의 집합이 되는 거죠. 그래서 특정한 형성 체계에 의해 구축된 각각의 담론들은 그 대상에 대한 앎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가령 종교적 맥락에서 광기에 대한 담론이 제공하는 앎과 19세기 정신의학적 맥락에서 광기에 대한 담론이 제공하는 앎은 전혀 다른 앎입니다. 서로 다른 담론에 의해 구축된 앎은 광기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생산하죠. 이러한 푸코의 아이디어는 임상의학에 대해서도, 혹은 언어-생명-부에 대한 이해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이후 범죄, 규율, 성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는 관점입니다.

 


Q 푸코는 구조주의에 일정 부분 속하면서도 구조주의와 단절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식의 고고학>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어떤 것인지요?

 

A 푸코의 작업은 구조를 역사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가 다루고 있는 대상은 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과 구별되는 인간의 문화예요. 구조주의 언어학은 의미 세계인 언어의 체계를 다루고, 구조인류학은 인간 문화의 가능 조건, 즉 자연과 문화의 분기점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죠. 구조주의에서 다루는 구조는 인간 문화의 불변하는 상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상수 체계를 포착한 다음에 무엇이 변수로 작동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죠. 따라서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건 변수들이 아니라 상수의 구조들입니다. 그래서 구조에는 역사가 없어요. 불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푸코의 주요한 주장은 이 구조가 변한다는 거예요. 구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는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구조는 어떤 원리나 목적에 입각해서 연속적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 변화는 단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즉 구조의 불연속적 변환을 푸코는 주목해요. 하나의 구조와 그 이후의 구조가 불연속적이라면 각각의 구조는 서로에 대해서 종별적 특성을 갖고 있겠죠? 그렇다면 서로 구별가능한 구조의 독특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조도 역사를 가지게 되죠. 구조의 역사화, 혹은 역사화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적 구조의 차원에서 이런 변환과 불연속적인 각각의 인식구조의 내적 특징을 파악하는 작업이 <말과 사물>이라면, 절대왕정기와 근대에서 주체의 특정한 행위양식을 구조화하는 권력의 기술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특히 근대적 주체화 구조의 변별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작업이 <감시와 처벌>이라 할 수 있죠.

 <지식의 고고학> 단계에서는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을 관통하는 문제의식, 즉 담론을 통해 작동하는 앎의 구조가 변해 온 역사들을 추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변화를 다루고 있지만 왜 변했느냐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역사화 된 구조들의 차이들을 보여주는 것이지 구조가 변화하는 이유를 다루지는 않아요. <지식의 고고학> 역시 변화를 다루기보다는 각이한 구조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구조의 형성 규칙을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는 <지식의 고고학> 이후 그가 담론을 다루는 변화된 방식까지 함께 보려고 해요.

어쨌건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가 질문하는 것은 하나의 구조의 지속을 다른 구조의 지속과 구별해 줄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푸코가 구체적으로 광기’, ‘앎의 방식’, ‘임상의학에 대해서 분석했다면, 이를 이론적으로 정리 한 책이 <지식의 고고학>이죠. 제가 보기에 이런 이론적 태도는 후기에 가서도 바뀌지 않았다고 봅니다.

 

 

Q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고고학적 방법론의 푸코와 계보학적 방법론의 푸코가 단절되었다기보다 하나의 일관성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A 푸코는 광기를 연구할 때 어떤 방식으로 연구할 하나요? 광기에 대한 문헌들을 보죠. 그건 그 문헌들을 언표들의 조직으로, 즉 문헌들을 통해서 광기에 대한 언표들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지 보려고 하는 겁니다. <감시와 처벌>에서도 감옥을 연구할 때, 감옥과 관련된 통계를 통해서 접근한다거나 수형자 인터뷰를 한다거나, 참여관찰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심지어 신자유주의에 대해 분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의 경제정책들을 살펴보거나, 법률을 직접 연구하지 않아요. 오히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쓴 책을 통해서 통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담론을 분석하죠. 푸코는 철저하게 자신의 연구대상을 담론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그러니까 푸코가 보기에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작동을 위한 근본 조건이 담론이라고 보는 겁니다. 인간은 담론을 살아가는 존재인거죠. 그 속에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거죠. 그 담론의 구체적 분절 형태가 담론구성체(formation)입니다. 우리의 앎의 방식, 우리의 주체성 형성방식, 우리 시대의 통치 방식 등과 같은 문제들은 각각의 담론구성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파악 가능하다는 거지요. 이는 흔히 후기 푸코의 방법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계보학으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보학 역시 기본적으로 담론을 연구하는 방법입니다. 다만 계보학은 고고학과 달리 담론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담론의 형성 규칙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그 효과에 주목하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계보학은 담론이 어떻게 권력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예요. 그런데 주의해야할 부분은 고고학을 다루던 푸코에게도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넘어가면서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달라진 것이죠. 예컨대 <광기의 역사>에서 충분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담론의 형성 규칙은 단지 형식주의적 인식의 배치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권력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담론과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고요.

그래서 규율권력, 통치성, 생명정치, 성장치,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같은 푸코의 '핫한' 개념들이 담긴 그의 다른 책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푸코가 그런 연구에서 전제하는 이론적 입장, 연구의 방법인 담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저는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푸코 작업의 연속성에는 담론에 대한 그의 입장이 일관되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푸코가 어떤 정치적인 각성을 통해서 고고학에서 계보학적 방법론으로 넘어가고, 권력과 통치성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방식으로 정리를 하는 것은 푸코를 소재주의적으로 이해하는데 머문 설명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푸코의 텍스트는 언뜻 역사책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푸코의 역사 기술은 왜 철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인가요?

 

A 저는 푸코가 칸트를 역사화했다고 생각해요.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칸트를 니체적으로 변용했다고 할까요? 칸트는 이성이 자기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 이율배반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경계했죠. 그는 이성의 한계를 설정하고 그 한계 내에서 이성의 적법한 사용을 추구하면서 이를 비판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비판철학을 수행하기 위해서 칸트가 쓰고 있는 개념 중에 하나가 아프리오리’(apriori)예요. 우리의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 경험 이전의 존재하며 경험을 규제하는 조건이 무엇이냐. 칸트는 이 질문을 초역사적으로 다룹니다. 아프리오리한 감성의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든지, 오성의 형식으로서의 범주와 같은, 경험 너머에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다루죠.

 이 문제를 푸코도 똑같이 다뤄요. 그런데 이를 초역사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칸트에게 아프리오리한 것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역사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아프리오리가 역사적으로 형성되며 변화된다고 봅니다. 사실 그가 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역사적 아프리오리입니다. 그러니까 푸코에게서 담론의 위상은 칸트에게서 아프리오리의 위상과 같은 거죠. 경험의 가능 조건을 탐구하는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위한 아프리오리한 조건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문제의식의 맥락에 놓여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아프리오리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변환된다는 것이 푸코에게서 독특한 발상이고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을 담론의 형성과 변환이라는 차원에서 고찰했다는 점이 아마도 푸코를 역사가라기보다 철학자로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틀로서의) 푸코의 권력론에는 관심이 있지만 굳이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난해한 텍스트까지 읽어야 하나 주저하는 수강생들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A 푸코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해요. “사람들은 나를 권력의 사상가로 알고 있는데, 내가 관심 있었던 문제는 주체의 문제였다.” 흔히 푸코가 주체에 대한 사상가였다고 하면, 일차적으로는<성의 역사2,3>이나 <주체의 해석학>을 비롯한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강의록들, 좀 더 넓게는 <감시와 처벌>을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푸코는 이미 고고학을 말하는 단계에서부터 주체의 위치와 기능을 주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푸코에게 말하는 주체는 언표적 장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기능입니다. 어떤 말하는 주체도 언제나 아무 말이나 할 순 없죠. 가령 어떤 수학적 명제를 증명하는 논문을 쓰면서 그 삼각형은 원형의 불꽃으로 차갑게 타올랐다같은 시적(?) 문장을 쓸 수는 없는 거죠. 또는 제가 검찰에 의해 기소를 당해서 법정에 섰을 때, 저보다는 변호사가 말하는 것이 훨씬 저에게 유리하겠죠?

 이렇게 언표적 장이 조직화되는 체계는 이미 말할 수 있는 주체의 자격이나 해야 말의 내용과 형식을 한계지우는 거예요. 그 규칙에 따를 때만 저는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죠. 언표는 자율적인 주체가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의 규칙에서 발화되는 것이니, 푸코에게 주체의 문제는 담론과 때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는 권력에 대해서 탐구 때에도 담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작업하는 거죠. 힘을 갖고 있는 A가 그렇지 못한 B에게 행사하는 것이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행사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담론적 공간을 살펴보는 것이 푸코의 문제의식인거예요.

 푸코에 대한 관심은 정상성과 비정상성, 타자와 동일자의 권력관계, 규율권력, 통치성 등등 권력분석이나 대안적 정치라는 차원에서 아직도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푸코의 권력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푸코의 정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푸코의 권력 개념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새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지식의 고고학>은 그냥 지나칠 부가적인 이론적 텍스트가 아니라 반드시 읽어야하는 핵심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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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소개


정정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인권과 인권들>(제8회 일곡유인호 학술상 수상작)과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을 썼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출강 중이며,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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