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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르크스를 위하여] 9월 29일 금요일 세미나 공지2017-09-26 18: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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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해를 못하겠구나. 분명히 맑스이긴 한데, 그렇다고 공산주의도 아니잖니?"

어머니는 책을 들고 내게 물었다. 1844년의 맑스는 두 개의 다른 공산주의를 상상했다. 

하나는 자산이 바라던 것으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의 진정한 해결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려했던 것으로, "여전히 사적 소유에 멁매어 있고 감연되어 있는" 공산주의였다.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둘째 모델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낸 반면, 첫 번째 경우는 반대로 빈곤하다.


......중략.....


나는 전에 <뉴욕타임스>에 실린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샤르트르, 시몬느 드 보봐르, 앙리 르페브르, 앙드레 고르, 그리고 동료들-

에 관한 이야기에서 본 적이 있는 글에서 도움의 손길을 찾았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맑스주의를 융합해, 냉전 시대의 

이원론을 넘어서려는 급진적 시각을 창조하려 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맑스주의 휴머니즘이라고 부르죠"이라고 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아, 맑스주의 휴머니즘, 그것 멋지구나!" 헉! 그 순간 내 맑스주의 모험의 실체가 형성되어 버렸다.

                                                                                                            

                                                                                                                                                             (마샬 버먼, <맑스주의의 향연> 중)


1959년 대학생이 당시 영어로 번역된 <경제학 철학 수고>(1844년 초고)를 읽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물한 이후 

어머니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쓴 미국의 비평가 마샬 버먼의 문장입니다. 그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버먼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으로 대표되는 공산당 독재의 폐해를 넘어서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맑스의 1844년 초고,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발견합니다. 그것은 소외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맑스주의 휴머니즘'이었죠.


지난 세미나 시간에는 스탈린 사후 벌어진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 이와 같은 휴머니즘(인간주의)적 맑스 독해의 지배적 경향에 

대한 알튀세르의 투쟁 선포를 불어판 서문, 외국어판 서문, 그리고 "포이어바흐의 철학적 선언"들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경제주의 혹은 결정론적 유물론에 대한 날선 비판도 존재했지만 알튀세르가 <마르크를 위하여>에 수록된 일련의 글들을

통하여 개입한 이론적/철학적 전선은 무엇보다 경제주의에 대한 반편향으로서 인간주의가 맑스주의 이론진영에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그어졌던 것입니다. 지난 세미나는 바로 그 문제의식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는 금요일 (29일) 세미나에서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2장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이론의 문제들)”, 5장 “칼 마르크스의 『1844년 수고』(정치경제학과 철학”) 

 읽습니다. 


이 글들에서는 <1844년 초고>를 독해하는 적합한 시각(5장)을 다루고, 소위 청년 맑스라는 당대의 지적 유행이

만들어내는 문제설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이론적으로 논의(2장)합니다.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맑스주의 휴머니즘과의 

본격적인 이론적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이 번주 금요일에 본격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인간주의적 해석, 즉 

청년 맑스의 특권화가 과연 어떤 맑스주의적인지, 온당한 것인지 검토해보도로 하겠습니다.  


버먼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청년 맑스'는 여러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통제위원들, 또 미국 우익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시드니 훅이나 알튀세르 추종자들이 빼앗아갈 수 없는 감성적 열정과 

정신적 깊이를 얻었거나, 혹은 되찾았다. 젊은 맑스의 정신은 버클리에서 프라하에 이르기까지

1960년대 급진적이고 창의적인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맑스주의의 향연> 중)


과연 청년 맑스에 대한 특권적 독해는 이런 의미를 가질까요? 정말 알튀세르르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통제위원일까요?

같이 토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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