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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일탈 읽기 세미나] <여성 거래> 후기2018-03-25 12: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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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거래>에 관하여



게일 루빈은 이 논문을 맑스의 한 테제로 시작한다. “니그로 노예란 무엇인가? 흑인종 인간이다. (···) 니그로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가 될 뿐이다.” 게일은 묻는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가 생물학적인 여자(female)를 억압받는 여성(women)이 되도록 만드는 것일까?”  게일 루빈은 이런 ‘억압’, 즉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켜 그러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도를 ‘섹스/젠더 체계’라 부른다.

그러나 맑스는 여성들이 가사노동을 통해 잉여가치의 총량에 이바지하는 존재, 즉 여성이 자본주의에 유용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으로만 여성에 대한 논의를 끝내고 만다. 왜 하필 남성이 아닌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 셈이다. 그것은 다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에는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들이 개입”한다는 맑스의 말에 기대어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게일 루빈은 주장한다. 섹스, 섹슈얼리티, 성적 억압의 전체 영역이 그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로 설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성적 억압 구조에 있어 필수적인 분석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이를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말하는 최종심급의 두 가지 갈래인 직접적 생존수단의 생산(생존의 생산)과 인간 그 자신의 생산(재생산, 종의 번식)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런 욕구들은 자연적 형태 그 자체로 충족되기 어려우며 거기에는 늘 문화적인 요소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게일은 다시 맑스의 화법을 끌어들여 말한다. “섹스는 섹스다. 하지만 무엇이 섹스로 간주되는가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되는 것이다.” 게일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를 단순히 생산양식의 재생산적 계기로, 생식 관계들의 계기로 환원하는 경제학적 입장에 반대한다.

 

게일 루빈은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친족 관계의 기본구조’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기본 틀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론을 제시하고 그 두 개의 이론이 얼마나, 어떻게 닮아있는지, 또 그 둘의 공통된 맹점은 무엇인지를 설명함으로써 ‘섹스/젠더 체계’ 분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본 것은 친족 체계가 국가 형성 이전 사회에서 유전적 관계나 성적 행위뿐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의례적 행위까지도 조직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집합적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족체계의 핵심을 남성들 사이의 ‘여성 교환’이라고 보았는데, 그 행위에는 ‘선물’과 ‘근친상간 금기’가 접합된다. 선물 증여는 사회를 구성하는 호혜적 원리인데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호혜성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로 결혼을 꼽는다. 다시 말해 선물의 정치적 효과가 극대화되는 장소가 바로 결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선물 증여라는 활동이 낭비됨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즉 그것이 오롯한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부족 내(內)가 아닌 부족과 부족 사이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근친상간 금기의 규칙이 유래되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성 교환은 사회적 관계를 조직함에 있어 중추적 행위가 된다. 그런데 여성은 교환되고 증여되는 대상(선물 자체)으로 머물 뿐 선물의 주체는 되지 못한다. 선물의 주체로서 증여하는 자 혹은 증여받는 자는 늘 남성이기만 했던 것이다. 친족 체계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여성 억압을 생물학이 아닌 사회 체계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지만, 그의 분석에 의거한다면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는 곧 문화의 기원에서부터 발생한 것이자 문화의 선결 조건이라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게일 루빈은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하는 ‘여성 교환’의 회로 분석은 여성이 어떻게 도구화되었는지, 여성의 권리가 어떤 매커니즘에 의해 박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통찰의 차원을 갖는다고 하나, 여성 억압의 전부를 설명하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섹스/젠더의 ‘경제학’은 여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만으로 세워질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성적 체계들 그 자체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고.


레비스트로가 말하는 선물의 주체에 해당하는 것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팔루스를 가진 아버지’일 것이라고 게일 루빈은 말한다. 국가 이전의 친족 체계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또한 결혼을 통해 맺어진 한 가정을 표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두 개의 분석은 나란히 놓여도 무방한 조건을 갖는 것 같다. 양성애적인 유아가 어떻게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로 되는가에 있어 거대한 힘의 팔루스를 가진 아버지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두 유아는 모두 어머니를 욕망한다. 그 욕망이 좌절되는 방식 혹은 복구하려는 시도의 방식이 젠더 분화의 계기가 된다. 즉 거세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아버지의 팔루스를 증여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유아는 남자아이가 되며, 어머니를 만족시켜 줄 팔루스의 없음에 대한 좌절을 거듭하다 결국 자신이 다른 방식,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팔루스를 품으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유아는 여자아이가 된다.

여기서도 선물의 주체는 남성인 아버지이며 그 주체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는 존재 또한 ‘남자’아이이다. 여성은 여전히 주체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들에 의해 소외되고 밀려나 그들에게 유용한 배경으로만 자리할 뿐이다. 이런 구조를 프로이트는 생식기 본래의 위계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페니스-팔루스 중심주의. 라캉 또한 팔루스를 가족 안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하나의 상징적 대상이라고 말한다. 팔루스라는 상징물이 순환하는 방향을, 그리고 그 팔루스가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를 보자. 여성은 그 회로에서 선물의 주체의 주변에 놓이며, 선물이 도는 반대방향으로만 움직인다. 팔루스는 늘 여성이 없는 곳에만 있다.


게일 루빈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의 분석을 무조건적으로 파기하거나 거스르지는 않는다. 그들의 말처럼 팔루스라는 상징물이 막강한 힘을 갖고 선물의 주체를 결정짓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다만 지금, 여기의 가족구조 내에서 그렇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경제적 생산의 대표로서, 가부장제 내의 기둥으로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비대해졌다는 점에, 그것이 지금의 여성 억압을 만들어냈다는 데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역할과 분업이 공평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힘의 비대칭성이 이토록 강화되지 않는다면 부모 모두는 최초의 사랑이 될 수 있다. 이성애가 강압적이지 않은 식으로 작동한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옛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게일 루빈은 다시 힘주어 말한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산물로서의 섹스/젠더 체계는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섹스/젠더 체계를 하나의 산물로 만드는 기반인 바로 그 역사와 사회를 우리가 우리의 정치로 열어내자고. 섹스/젠더 체계를 역사적, 사회적 산물로서 바라보고 분석하기를 요구하는 게일 루빈의 주문은, <자본>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싸움의 무기로 사용하길 바랐던, 그것을 위해 자본주의라는 조명(照明) 자체에 대한 분석을 행하는 방식으로 이어가던 맑스의 말하기와도 일견 유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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