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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 허물기 4장 후기 및 0420 공지2018-04-16 13: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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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허물기 4장 후기>


버틀러는 이 글에서 과거에 있었던 GID 진단 논쟁의 두 입장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그 진단의 실질적 지원을 근거로 그것의 도구적 활용의 유용성을 주장하며 계속 진단을 유지,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또 하나는 그 진단이 병든 자 혹은 비정상이라는 부정적 낙인의 효과를 가져 오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버틀러는 우선 그 진단이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갖는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계란 이런 것들이죠. GID 진단이 젠더 감각이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규범(일종의 오류 근거)에서 출발한다는 점, 그것이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라는 편협하고 전통적인 젠더 정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그것은 동성애 진단의 연장선상에 놓이기도 했다는 점,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있어 진단은 그들의 크로스젠더 소망을 병적인 것(내적 자기몰두의 문제로 해석)으로 확정하여 또래 집단으로부터의 놀림이나 사회적 폭력을 야기하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점.


버틀러는 그 진단에 대한 현실적 필요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어떤 기준, 어떤 척도에 의해서만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사회적 지원이 이루어질 때, 기꺼이 혹은 어쩔 수 없이 그 기준 앞에 가서 줄서야만 하는 누군가의 절박함 또한 무시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버틀러는 그 진단을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이율배반적 효과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것이 비록 중차대한 어떤 목적을 위한 평면적인 한 수단으로써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의도한 바나 용납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것의 결과는 진단의 위상과 권위 강화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 애초 체현된 주체로 살아가려 했던 누군가는 진단으로부터 촉수처럼 뻗어나온 어떤 오명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하게 되기도 하죠. 이것은 또한 젠더 규제를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권력인 법적 기관과 재정적 기관의 구조를 은연중에 더욱 공고히 하는 한 축이 되기도 하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인의 권리란 사회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만 보호되고 행사될 수 있고, 기존의 병리화 담론에 복종해야만 그 권리가 얻어진다는 사실이 현재의 사회적 조건이 갖는 자율성의 패러독스라고 버틀러는 역설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로 구성하기 위해 허물어져야 하고, 바로 그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사회적 존재 구조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 또한 자율성의 패러독스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필연적 상관 고리를 강조하기도 하죠.


지난 세미나 시간에 우리는 이런 자율성의 패러독스 속에서 “어떤 젠더가 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간됨과 복지의 의미에, 몸의 존재로 살기에 얼마나 핵심적인지 경제적, 법적 기관이 인정”하게 되는 중대한 변화를 갖도록 하는 실천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논의했습니다. 4장 안에는 그 구체적 실천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었거든요. 누군가는 트랜스젠더, 혹은 제3의 성을 가진 자가 자신을 현현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이 비록 테두리 쳐진 일정한 제도 안에서의 움직임이라 할지라도, 이 구조를 ‘다른’ 형상과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규범과 규범의 실패 사이에 위치하며, 인식불가능한 익명성 속에 자리 잡은 데이비드 같은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 어쩌면 자신을 “행위로 구성하기 위해 허물어지는”, 그리하여 지금의 딱딱하고 완고한 구조의 지반을 흔들기도 하는, 하나의 예시가 아닐까 한다는.


<<젠더 허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까지 이 ‘실천’이라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만큼은 꼭 붙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헤헤. 

 


<세미나 공지>

일시: 4월 20일 (금) 오후 7시

장소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강당

읽어올 범위 : 5장 <친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 

발제 : 김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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