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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문학이론세미나] 8월 8일 세미나 공지 2022-08-08 12: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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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1 세미나에는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공지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의 6장 '새로운 고독과 그 고독의 서정시: 슈테판 게오르게'와 7장 '동경과 형식: 샤를-루이 필리프'를 읽었습니다. 

게오르게의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에서는 다음 구절이 흥미로웠습니다. 


"새로운 서정시의 본질은 [...] 반주가 독창 성부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옛날의 서정시는 특별한 경우를 위한 경조사 문학이었고, 그래서 그 형식은 바로 그 때문인지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단순한 형식, 가장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말하는 형식, 즉 양식화된 민요의 형식이었다. [...] 새로운 시의 본질은 반주 음악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음조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 새로운 서정시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서정시는 동시에 가사이자 음조, 멜로디이자 반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 이상 보충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체적으로 완결된 것이다."(207-208) 


게오르게의 시집이 번역되어 있었더라면 찾아서 읽어보았겠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매우 낯선 프랑스 작가 필리프에 대한 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목가, 비극, 서정시, 서사시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필리프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요, 이 부분은 세미나원 모두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오늘 이어서 이야기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다음 구절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동경은 언제나 감상적이다. 그러나 감상적인 형식이란 존재하는가? 형식은 감상성의 극복을 의미한다. 형식 속에는 더 이상 동경도 고독도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을 얻는다는 것은 가능한 가장 위대한 성취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의 형식은 시간적이므로, 실현은 이전과 이후를 가져야만 한다. 성취는 존재가 아닌 생성이다. 그리고 생성은 불일치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다시 말해 성취가 달성 가능하고 또 달성되어야만 한다면 불일치 역시 달성되어야 한다. [...] 시는 불일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시의 본질은 운동이고, 그 운동만이 부조화에서 조화로, 또 그 반대로 조화에서 부조화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240-241) 


"전체 세계의 상을 창조하려는 위대한 서사시의 의지가 부족한 문학작품 [...] 그럼에도 노벨레의 개별 사건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서 영혼의 감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다른 힘에 도달한 문학작품이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런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바로 영혼이었고, 행위만이 그 영혼의 동경이었다. 그러나 주인공과 행위는 진정으로 실현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작품을 대체로 서정적인 소설이라 칭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오히려 시가 섞인 산문 이야기라는 중세적 명칭을 선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들은 비가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가장 실제적이고 광범위하며 심오한 목가의 개념에 완전히 부합한다. [...] 이것이 바로 샤를-루이 필리프의 형식이다."(243) 



오늘 저녁 7시 30분에는 8장 '순간과 형식: 리하르트 베어-호프만'과 에필로그처럼 수록된 '마음의 가난에 대하여'를 읽습니다. 

8장 발제는 김무겸 님이, '마음의 가난에 대하여' 발제는 쏠 님이 맡아주셨습니다. 


참여하시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1927년 모스크바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필리프의 단편집 <삶>. 

루카치가 말하는 서사시도 아니고, 노벨레도 아닌 형식을 잘 보여주는 듯한 표지라서 가져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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