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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세미나> 3월 23일 후기 + 3월 30일 공지2017-03-27 20: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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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엄청 길어요.

그러니까 다음시간 공지부터 쓸게요.



다음 시간 3월 30일 목요일 저녁 7시 

우리는 『재생산의 비밀』 

2장 자연의 왕국(37쪽)~6장 은밀한 작업장(138쪽)까지 읽고 만나기로 해요.



저는 20페이지 남짓 읽고도 엄청 긴 넋두리+요약을 할 수 있는데(아래 후기가 좀 길어요)

100페이지를 읽고 책 한권 써갈까봐요......

책이 좀 어렵지만 열심히 읽고 만납시다.



아참,

혹시 식사를 못하신 분들은 각자 간식을 가지고 오셔도 좋고요.

간식 나누고 싶은 분들도 함께 참여하면 좋아요.




그럼 후기 시작할게요. 

엄청 길어요. 

포기하세요.......(☞☜........)




책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이 책이 맑스의 책이 아니라 맑스의 개념을 빌려온 포르뚜나티의 책인데

마치 맑스의 것을 읽듯이 읽어내려고 했다는 사실. 

여차하면 포르뚜나티의 이야기를 겉핥기로 넘겨버릴 지도 몰라서 

경각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이 책을 읽는 데에는 맑스의 경제관련 개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로 모를 땐 과감히 물어보고 허심탄회하게 공부해야겠어요.

껄껄껄


정리를 좀 해보자면요.

(저는 왜때문인지 모든 문장이 다 중요해보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이번 장 전체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인상도 들어요, 난, 뭘까?)



#1. 전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 이행하면서 벌어진 일은 

상품 생산은 가치의 창출로 나타나는 반면에 재생산은 비가치의 창출로 전락(?) 했다는 것입니다. 

상품 생산은 작업장(소위 자본론1에서 맑스가 포착했던 “관계자외 출입금지”가 붙어있는 그 커다란 공장 말이죠)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가치 생산에 해당하고요. 동시에 재생산은 이제 “자연적인” 생산으로 설정되는 것이죠

(집에는 우리한테 편한 것이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안정과 휴식을 취할 수 있겠죠. 

그건 사실 우리가 집에 쏟아놓은 에너지의 결과물인데 말이죠. 긴 시간 축적된 재생산 노동이 모여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루고 있죠). 




#2. 상품 생산은 직접적으로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는 교환관계(그러나 비등가물교환)에 있습니다. 

반면 재생산 안에서의 교환은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비등가물의 교환(노동력과 임금의 교환이라는 생산의 비등가물의 교환과 같은 점입니다)

2.남성 임금에 매개된 자본과 여성의 교환

3.그러나 사실은 노동력과 화폐로 연관된 교환

(이 특징은 2번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죠. 

남성의 혹은 생산 영역의 임금은 재생산의 노동력 없이는 기능할 수 없으므로 노동력과 임금이라는 화폐로 연관된 교환이라는 것......이 맞지요? 

우리 지난 시간에 이 부분에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더랬죠.....

즉 이건 24쪽 마지막 단락에 있는 

“재생산 노동은 사회적 노동의 자연적 힘으로 설정되며, 

재생산 노동은 개인 서비스로 나타나는 반면에 실제로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관여하는 간접적으로 임금을 받는 노동이다” 

특히 밑줄 그은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3. 자본이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는 가설에서 출발함으로써만 자본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요. 

→생산/가치 그리고 재생산/비가치. 

맑스는 상품 생산 과정 속에서 노동이 취하는 이중적 성격을 발견했죠. 

그것은 ‘구체적 유용 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입니다. 


(여기까지는 맑스의 생각이고요. 다음의 재생산의 이중성은 뽀르뚜나티의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런데 더 나아가 재생산 과정에서도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찾을 수 있어요. 

재생산 과정도 ‘상품 생산’과 ‘사회적 노동의 자연적 힘’이라는 성격을 가진 것이죠.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이중화시키는 상품 생산/재생산은 사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메커니즘이니까요. 

상품이 생산되는 곳에는 재생산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으로써 두 명의 노동자가 한 명의 봉급으로 착취 받을 수 있게 되고 전체 재생산 비용이 그 노동력에 부과되게 되었다”고 해요. 



“그리하여, 맑스주의적 분석은 생산 과정의 생산 과정의 반쪽(상품 생산)만을 서술하므로

 그 자체로 재생산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생산의 순환 전체에 대한 분석은 재생산도 분석될 때까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해진다. 

이 재생산 분석은, 맑스주의적 범주들을 도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페미니즘의 비판과 결합시킬 때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재생산 영역을 전면적으로 내놓고 맑스를 변증법적으로(ㅋ 진짜?) 전유한 뽀르뚜나티의 논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전자본주의에서 나타났던 노동력을 목적으로 치부되던 인간(노예)이 이제는 자본주의에서는 개인(노동자)으로 탈각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개인인 노동자의 탄생은 그 존재 자체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따로 떼어서 임금을 지불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면서 

“가치의 총체적 박탈”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노동자”의 좀 묘한 형상입니다. 

이를 통해서 재생산은 개인의 몫이 되는 “자연적 과정”이라고 뽀르뚜나티는 보고 있어요. 



저는 28쪽 

“개인들은 재생산 노동에서의 주체/대상으로서는 가치를 갖지 않지만, 상품 생산 노동의 주체들로서는 분명 특정한 가치를 갖는다.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은 그들이 가치인 한에서만 비가치로서 존재하고 그 역도 성립하므로, 

개인들은 그들이 순수한 사용 가치인 한에서만 상품 생산자로서 존재한다”에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어떤 종류의 박탈감의 근거를 보는 것 같았어요. 


재생산 영역에 있는 사람의 노동이 생산 노동과 분리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임금 노동자가 아닌 경우에 느끼는 

무능력감이나 박탈감과 같은 심리적인 어려움 말이죠. 

세상에서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이런 박탈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그런 점에서 생산 영역에 있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태극기 집회에 나가서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정투쟁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런데 이분들은 어떤 재생산을 하시죠?) 

애매하게 임금노동자이면서 아니기도 한 미생(저를 포함) 그 언저리의 처절한 박탈감을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넘 심한 비약인가요 ㅎㅎㅎ)




#5.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재생산 활동을 해야 하죠. 

“이것이 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력과 자본의 존재 조건이 되며 개인이 비가치로서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재생산 과정 동안의 가치 창출이 비가치의 창출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노동력이 교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이 자본주의 안에서 재생산이 지니는 이중적 성격이다.” 

뽀르뚜나티는 이렇게 재차 재생산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정도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개념을 포착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착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맑스를 페미니스트라고 했다고요?)




29쪽에서 아직은 희미하게 뽀르뚜나티가 제기하려는 문제가 아무래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기대고 있는 “개인”이라는 노동자의 전제조건인  

“사회적 노동의 자연적 힘”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이중성은 또한 노동력에 스며든다. 

그 이중성은 또한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에 스며드는데 왜냐하면 이 능력은 한편으로는 

(1) 자본에 대한 관계에서 사회적 노동의 ”자연적“ 힘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2) 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에 대한 관계에서 상품으로 즉 교환가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아직 직접적으로 남성의 임금 노동과 여성의 재생산(가사노동)의 분리를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대하고 있는 여성의 가사노동의 몫을 가진 사람이 

자본사회에서 생산 노동 즉 임금노동에 복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성별에 따른 역할에 대한 분리를 지목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재생산 노동의 주체적 조건은 생산 노동의 주체적 조건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설정된다. 

전자본주의 생산 양식들에서는 노동자가 사용 가치 생산의 주체적 조건들과 개인들의 재생산의 주체적 조건들 양자와 동일한 관계를 갖는 반면에,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이러한 정체성 및 일치가 붕괴된다.”(30쪽)


하지만 뽀르뚜나티는 이렇게 생산 과정에 마치 1+1처럼 짝으로 다니는 재생산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노동력은 생산 과정 동안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생산 과정 안에서 가치로서 자신을 재생산하기 때문에도 자본에게 가장 소중한 상품이다”(31쪽) 


이제부터 31쪽부터 성적 분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죠.


“남성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노동력의 소유가 재생산 노동으로부터의 문자 그대로의 ‘해방’을 가져오는 반면에, 

여성에게는 재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력의 소유가 생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31쪽)


그리고 이 경제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갖고 있는 성별화에 따른 분업이 비가치의 영역으로서의 여성뿐만이 아니라 

가치영역의 여성까지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소외시키고 있게 됨이 밝혀집니다.


“임금을 받는 여성을 포함하여 여성은 두 가지 이유로 남성 노동자와의 교환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 

첫째 그들의 통상적인 저임금으로 인해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들을 재생산할 수 없다. 

둘째, 여성이 자신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는 이러한 교환의 일반적 조건들에 종속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예를 들어 심지어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율적일지라도 그녀가 남성과 정서적 교환을 가지려면 

남성을 위해 집안일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서적 요인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성을 위해 노동하는 부등가 교환을 하도록 강제한다”(32~33쪽)



(이래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필요하죠. 뿐만 아니라 고정적 성역할에 따른 직업교육도 좀 바뀔 필요도 있겠네요. )



이렇듯 노동력의 “해방” 과정은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죠. 

성sex의 선들을 따라 전개되는 과정, 성별gender 에 따라 노동자의 해방을 향한 다른 경로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남성은 중세 농노에서 임금 노동자가 되었으나 여성은 봉건 농노로부터 간적접으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어요)





어머......쓰다보니 넘 길어졌어요......

이러다 발제문 100장 써갈 기세......

아무래도 이 책은 반복과 변주를 하는 동시에

점점 나선형을 그려가면서 이야기 폭을 넓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책 읽으면서 분노도 많이 하지 않을까 싶고요.

어느 면에선 또 괜찮은 통찰과 마주치길 기대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할 일이 없으시군요.................이렇게 재미없는 걸............☞☜♥♡♥♡♡♥♥


제가 오늘 하루종일 한용운의 시집을 읽었어요. 

내내 불교적 세계관에 끌려다니다보니 

좀 경건하고 스웩이 부족합니다. 흥♬이 필요해요. 

흥흥흥.



목요일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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