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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봉쥬-들뢰즈 시즌 2] 7월 28일 공지 - 《칸트의 비판철학》읽기 시작!2018-07-21 02: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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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지난 시간에 <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을 마침으로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부족하지만 다 읽어냈습니다. (짝짝짝)

아마도 그 장에서의 주된 개념은 긍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정리하니 참으로 길어졌습니다. 우선 지난 세미나 후기 입니다.

 

 

니체의 역사철학. 들뢰즈-니체에게 있어 허무주의는 인간 역사의 동력입니다.

니체는 허무주의가 역사 속의 어떤 사건이 아니고, 보편사로서의 인간사의 동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정적이고 반응적이며 수동적인 허무주의,

니체에게서 그것은 유태교, 기독교, 개혁, 자유 사상,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등이 점철된 유일하고 동일한 역사이다.

최후의 인간에까지 이르는.” (267)

 허무주의적 관점에 따라서 들뢰즈가 정리한 니체의 역사철학이자 종교철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a. 부정적 허무주의 // b. 반응적 허무주의 // c. 수동적 허무주의

 

a. 유태교에서 시작해서 기독교적인 의식의 측면. 이때의 신의 관념은 무의 의지, 삶의 비하를 표현합니다.

 이는 4장에서 살펴본 허상과 관련한 사제들의 역할을 상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태교(원한)에서 기독교(자책)로 이행의 측면이 바로 부정적 허무주의의 상세한 서술이었습니다.

 

b. 유럽적 의식의 측면. 신은 죽습니다. 연민에 질식해 신은 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의 살해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반응적 인간 즉 최후의 인간”(265)입니다.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흉악한 자는 반응적 허무주의를 대표한다.”(287)


c. 불교적 의식의 측면. 이 때 갖는 신의 관념은 부처입니다.

예수는 성 바울이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반대이며, 진정한 예수는 일종의 부처, <거의 알려지지 않는 영토 위에서의 부처>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서, 그의 영역에서 너무 앞서 있었다.” (273)

 단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불교는 허무주의의 완성을 의미함으로 불교가 긍정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독교보다 그러니까 성 바울이 고안해놓은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나아갔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끝을 위한 종교이며 문화의 무기력이다.

기독교는 그 문화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만약 필요하다면, 그것을 창조해 낸다.” (274)


이러한 도식은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관계로 드러났으며, 그리고 이것들은 신의 관념에 대한 표현의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신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신이 된다. 그러나 누가 인간이가? 그는 항상 반응적 존재, 표상하는 것, 약하고 비하된 삶의 주체이다.

신은 무엇인가? 항상 삶을 비하하는 수단으로서의 우월한 존재, 무의 의지의 <대상>, 허무주의의 <술어>이다”(278)

이러한 신과 인간의 관념들의 관계는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로서 설명됩니다.

 

변증법. 이러한 허무주의적 관점을 보여주는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변증법입니다.

 “헤겔의 부정적 허무주의, 포이어바흐의 반응적 허무주의, 슈티르너의 극단적 허무주의”(284) 이러한 도식의 구분이자,

허무주의와 변증법의 관계 설명은 뒤로 미루도록 합니다.

다만 들뢰즈가 변증법과 니체를 대결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니체적 의미에서의 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다른 하나는 변증법이 신을 대신한 인간 즉 진화한 인간으로서의 변증법적 인간”(285)을 상정했다는 점을 반대하고

 초인’(위버멘쉬)를 논하려는 목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니체의 저작을 변증법과의 대척점에 두고 읽어냅니다.

니체 저작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변증법을 반대한다. 즉 변증법은 구체적으로 현상들을 소유하는 힘들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의미를 알지 못한다.

또 그것[변증법]은 힘들, 그것들[힘들]의 성질들, 그것들[힘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 요소에 무지하기 때문에 본질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변증법]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항들 사이에서의 교대를 행하는데 만족하기 때문에 변화와 변형을 알지 못한다.”(277)

개인적으로 들뢰즈가 헤겔을 왜 그토록 반대하는 지점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들뢰즈의 말은 알겠는데, 무엇인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긍정,아 이놈의 긍정. 들뢰즈는 우월한 인간과 초인(위버멘쉬)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초인에 대해 풀고 있습니다.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적 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본성상 인간과 다르고, 자아와도 다르다.

초인은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인간과는 다른 주체이고 인간적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다.

그것[초인]은 새로운 사유 방식, 신성과는 다른 술어들이다.”(285~286)

그렇다면 우리는 초인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 것일까요.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의 인간성은 원한과 가책으로 구성됩니다.

때문에 본질적으로 반응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말입니다. 이러한 반응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본질 자체에 니체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반작용을 작용으로, 이와 같은 가치들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허무주의도 권력의지의 인식 이유로서의 부정의 성질을 표현”(301)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 동일한 의지의 존재 이유로서의 긍정 속에서 전환”(301)이 가능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등과 같은 반응적 힘들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지를 강제로 인식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허무주의로서 허무주의가 극복된다.

이것이 극복된 허무주의”(303)이며, 이때의 허무주의는 적극적 파괴”(303)입니다.

이 파괴는 부정을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킨다고 하는데,

이는 반응적 힘들 속에서 표현되는 부정하는 힘인 원한은 파괴로 하여금 긍정하는 힘의 적극적 존재 방식인 공격성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러니까 원한에서 공격성으로. 첫 번째 긍정은 극복된 허무주의 즉 파괴이자 극복이다.

수락으로, 존재하는 것의 긍정으로, 진리의 진실성이나 현실의 긍정성으로 인식된 긍정은 거짓 긍정입니다.

 “긍정의 공무원”(316)은 자기 합리화나 정신승리 밖에 할 줄 모르지요.

가령 짜라투스트라에서의 현실을 그대로 인내할 줄밖에 모르는 나귀가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떠안는 것은 긍정의 유령”(311)이자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긍정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더 긍정이 필요합니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319) 이것이 두 번째의 긍정이라 하겠습니다.

긍정에 대한 설명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들뢰즈는 긍정하는 두 힘의 현존과, 구별되는 두 긍정의 현존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긍정을 총체적으로 고찰할 때,

표현의 편이에 의해서를 제외하고 긍정하는 두 힘의 현존과 구별되는 두 긍정의 현존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326)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긍정이 후자고, 전자는 제가 앞서 말하는 두 긍정의 힘이겠습니다.

이번 계기를 빌어서 저는 긍정이 철학적 개념임을 알았고, 그래서 긍정을 제 것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을 착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되지만, 긍정은 부정과 다르다. 우리는 긍정이 자신을 위해서 부정과 대립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긍정은] 부정을 자신 속에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325)

디오니소스나 아리아드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 관해서 정리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하지요.

 

 

이제야 비로소 [봉쥬-들뢰즈 시즌 2] 열 한 번째 공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3주전부터 말씀드렸다시피 721일에 세미나는 쉬도록 합니다.

 

한 주 푹 쉬고 728일부터 저희는 새로운 책을 읽습니다.

그 책은 칸트의 비판철학입니다.

들뢰즈-니체를 거처 이제 들뢰즈-칸트를 저희는 읽습니다.



앞서 읽은 니체와 철학보다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2주에 걸쳐서 읽을 거 같습니다.

2주에 걸쳐 읽고 1주 시간을 더 내서 칸트에 관한 들뢰즈 논문을 읽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겠습니다.


728칸트의 비판철학<서론>~<1> (15~62) / 발제 병석

84칸트의 비판철학<2>~<결론> (63~135)

811<칸트 미학에서의 발생의 이념>(들만철(177~218)),

<칸트철학을 간추린 네 개의 시구>(141~154)

*아마 811일의 일정은 저만의 생각이었는지, 논의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인거 같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경험주의와 주체성>이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읽자는 논의가 등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모여서 논의해보도록 하지요.

저는 8월에는 방학하고 9월 시작하면 대망의의미의 논리읽자고 말할겁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참고하기가 버거우시다면 다음의 책을 추천합니다.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2004.

이 책을 다 안읽는다 하더라고, <32_들뢰즈와 칸트-능력들 간의 심연을 넘어서는 법>(238~278)이라도 참조한다면

이번 들뢰즈-칸트를 읽어내는데 적잖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국면에 접속하실 분은 행정반장 이형히에게 연락을 주시거나 댓글 달아 주셔요.

다들 이 지옥같은 무더위에 부디 생존 잘 하시고

이 끕끕한 날씨를 뚫고

산뜻하게 그날 만나도록 하께요. .........................*^ ^*

봉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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