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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아방가르드 세미나] 1월 15일 세미나 공지2023-01-13 1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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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세미나에서는 「항의의 접합」, 「미술의 정치」, 「미술이라는 직업」, 「모든 것에서의 자유」를 읽었습니다. 아래에 내용과 세미나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다음 세미나에서는 『스크린의 추방자들』을 끝까지 읽습니다.

「실종자들」 진영 님, 「지구의 스팸」 - 「컷! 재생산과 재조합」은 유경 님이 발제를 맡아주셨습니다.

세미나는 매주 일요일 오후 9:00에 약 2시간 동안 비대면 줌zoom으로 진행됩니다.

그럼 1월 15일 9시에 뵙겠습니다!





 

슈타이얼에 따르면 항의의 접합은 상징과 정치적 힘, 두 단계에서 발생합니다. 상징은 언어적 형식을 조직하기, 정치적 힘은 형식을 통해 조직되는 정치적 효과입니다. 이 장에서 슈타이얼은 형식을 통해 발생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며, 항의를 목적으로 한다면 형식 또한 대항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서 미술관은 공장인가?에서 읽었던 “영화적 정치가 공간과 시간 안에서 군중을 접합한다(articulate).”[p.102]는 말과도 이어지는데요. 한 세미나원분은 그렇다면 오늘날 활동가들이 시위가 추구하는 방향 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새로운 시위의 형식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흥미로운 의견을 주셨습니다. 항의의 접합은 각 예술의 장르에서 통용되는 관습에 대한 형식적 반항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에 대해 한 세미나원 분은 작년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오민 작가의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관련해 글, 이미지, 소리 매체가 정말 선형적/비선형적인 매체인가?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미술의 정치는 슈타이얼의 비평적 입장이 유독 잘 드러나는 글입니다. 그가 말하는 미술의 정치란, 미술 작품이 담은 의미나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는 것”[p.125]입니다. 따라서 미술의 정치는 곧 그것의 기능과 연결됩니다. 저는 이 장에서 “결백은 허상이거나 영업 이점이 될 뿐이다.”[p.134]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슈타이얼에게 정치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동시대 미술의 형식과 예술가를 각각 정부와 독재자에 유비시켜 남성 유대 구조로 작동하는 미술의 정치를 폭로합니다. 그는 미술의 생산자인 작가, 큐레이터, 인턴 등을 파업(strike) 노동자라고 명명하는데요. 이는 소련 시기 초생산적, 열정적 노동자를 계승하는 정동적 충격(strike)을 생산하는 이들입니다. [이 대목은 슈타이얼이 언어로 생각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파업 노동자는 어떠한 계급에도 포함되지 않으려 저항하는 룸펜 프릴내거, 발룬티어, 자발적 노예입니다. [약간 뼈가 아픕니다.] 그렇다면 어느 계급에도 소속되지 않고 경쟁 중인 자발적 노예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요?


미술이라는 직업은 그의 글 중에서도 특히 구조적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입니다. 그는 occupation의 두가지 뜻인 직업/점령이 미술이결과 중심인 작업(work)에서 과정 중심인 직업(occupation)으로 이행함에 따라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살핍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시되는, 일견 긍정적 변화로 보이는 전환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occupation”이라고 말할 때 이 단어는 동음 속에서 비감각적 유사성, 다시 말해 추상화된 미메시스를 서로에게 작동시킵니다. 따라서 직업에 점령의 의미가, 점령에 직업의 의미가 스미게 됩니다. 직업/점령으로서의 미술은 제작 과정을 상품으로 전환함으로써 자본주의 이념에 봉사하고, 인턴에게 무급으로 노동을 착취하며 이익을 취하는 장입니다. 슈타이얼은 예술을 삶에 부여하여 혁명을 실현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정신을 소환합니다. 그러나 슈타이얼은 오늘날 삶이 미학화되는 현상이 예술이 삶을 점령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결국 예술은 자본화하에 복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요? 슈타이얼은 “직업적 시공간의 통치형식에 개입하는 공간”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상을 현실에 영향을 직접 미치는 것으로 여기며 다시 물질화하는 슈타이얼의 모습을 다시 확인합니다. [마치 빈곤한 이미지의 물질성을 강화한 것 처럼요.] 슈타이얼은 가상 공간이 기존에 어떤 기능을 함으로써 권력에 복무하는지 살피고, 그 기능을 재접합하여 다른 의도, 기능을 갖게 만들고자 역설합니다.


모든 것에서의 자유는 이전에 혁명의 넝마주이에서 읽었던 모두를 위한 불멸을 연상하게 되는 글입니다.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시기 모두를 위한 불멸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인간이 서로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기획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에서의 자유 또한 혁명적 연대의 가능성과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슈타이얼은 자유를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요. 소극적 자유는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자유, 모든 것에서의 자유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소극적 자유는 오늘날 개인이 추구하는 자유가 상대적인 가치가 되면서 공통 기반을 상실한 상태, 자유낙하 상황에 기반합니다.[p.164] 따라서 개인은 자유를 말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의 반대편에 있는 문화적 타자를 구성하게 됩니다. 

슈타이얼은 경제 규제가 약화되고 비상 입법과 디지털 감시가 강화된 오늘날의 ‘세계도시’(사스키아 사센)에서 더이상 문화적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 새로운 소극적 자유가 출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소극적 자유의 한계를 전유하여 오늘날 국가를 초월한 개인들(프리랜서)이 연대할 가능성을 제안하는데요. 그 방법은 프리랜서(용병)를 과잉 결정된 사물이나 상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예로 그는 어나니머스의 가면을 예로 듭니다. 종이 공작용 가면은 전개도 안내선을 포함하는 행위를 통해 워너 브라더스가 가진 저작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가면 이미지를 점령하는 것이죠. 규제를 완화시키고 무법한 영역으로 가는 것을, 슈타이얼은 새로운 소극적 자유로 봅니다. 새로운 소극적 자유는 저작권 없음을 통해 미술에 종사하는 파업(충격) 노동자들이 연대할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모든 것에서의 자유는 결국 이미지를 무법의 영역으로 이끌어 점령하는 행위를 통해 쟁취됩니다. 이 장의 끝에서 그는 행위에 따른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에는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

새로운 자유: 당신은 얻은 만큼 돌려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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