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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아방가르드 세미나] 1월 8일 세미나 공지2023-01-06 19: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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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23 새해 인사 드립니다. 지난 12 18 세미나에서는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자유낙하」,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당신이나 같은 사물」, 「미술관은 공장인가?」를 읽었습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로 인해 세미나를 2주간 쉬었는데요.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영화 All Light, Everywhere〉 포스터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13622074/)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에서 슈타이얼은 전통 원근법에서 기준이었던 수평선이 사라진 오늘날의 현상이 가진 의미와 전망을 짚어봅니다. 수평선은 안과 밖, 볼 수 있음과 없음을 나누는 기준입니다. 슈타이얼은 전통 원근법이 몰락한 현재를 ‘바닥 없이 추락하는 자유낙하 상태’로 진단합니다. 오늘날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의 이미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조감하는 시선은 수평선이 사라짐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수평층이 수직의 영공을 가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수직 원근법 역시 기준이 되는 지표면, 바닥을 상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평적 기준으로 상정되는 지표면이 환영임을, 다시 말해 바닥 없음을 인정한다면 어떨까요? 슈타이얼에 따르면 바닥 없이 추락하는 주체는 자신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분간할 수 없고,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추락으로부터 자유를, 바닥 없음으로부터 다양화된 시점(=다수의 관객)의 가능성을 봅니다.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 슈타이얼은 떠도는 저해상도 이미지의 물질성과 그것이 유포되는 사회적 조건을 분석합니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의 물질성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이미지의 해상도, 파일 용량, 전송 속도와 같은 물질로서 이미지의 특성. 둘째로 이미지에 부여되는 경제적 가치와 계급적 지위.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추상 지향적”, “생성 중인 관념”[본문 42p]으로 표현하며 비물질성을 강조하는데요. 비물질성은 곧 이미지가 이동하는 “속도, 강도, 확산”을 뜻합니다. 이렇게 슈타이얼은 이미지의 가치를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기존에 이미지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원본성이었다면, 이제는 “속도, 강도, 확산”이 새로운 가치 기준이 된다는 것이죠. 이미지가 진짜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유통되면서 어떠한 시간성과 효과를 창출하는지, 순응과 착취의 결과물이 반대로 반항과 전용의 계기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입니다.


Lars laumann, Berlinmuren (출처: https://vimeo.com/52427622


「당신이나 나 같은 사물」에서 슈타이얼은 동일시와 참여를 구분합니다. 이때 동일시는 이미지를 재현의 도구로써,참여는 이미지를 실재하는 사물로서 대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키워드인데요. 슈타이얼은 권력 관계에서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고 모두가 사물(객체)-되기를 추구한다면 어떨까, 질문합니다. 주체(subject)는 이미 권력 관계에 종속된(subjective)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무의식적인 폐제(선험적인 배제)로 인해 구성되는 반면,객체(object)는 목적(objective)을 지향합니다. 이때 목적은 존재하는 모든 주체와 객체를 권력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 힘이 응축된 사물로 보고 그것과 동지로서 관계맺는 일, 다시 말해 동지로서 사물이 겪은 역사를 해독하는 일입니다. 일견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마술적으로 보이는 이 주장은, 비단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사물이 되고, 사물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물에 응축된 역사적 소외, 멍, 대상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런 상처를 내는 데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슈타이얼에게 이미지를 실재하는 현실의 일부로서 대하고 변형하는 일은 곧 현실에 참여하는 일이기에, 더 바람직합니다.


Employees Leaving the Lumiere Factory, La sortie des usines Lumière, 1895 (출처: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51511)


「미술관은 공장인가?」에서 슈타이얼은 미술관을 현실 사회의 일부로 인식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뤼미에르의 기념비적 영화인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현재 영화 박물관이 된 공장 내부에서 다시 상영되면서 공장을 나온 노동자들이 미술관으로 들어온다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미술관 내부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적은 임금으로 과도하게 일하는 오늘날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인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슈타이얼이 말하는 ‘노동자’는 미술관에 정식 고용된 사람들 뿐 아니라 관객도 포함합니다. 그는 영화관과 미술관의 관객을 구분하는데요, 일정 시간동안 감금되어 등질적인 시선으로 관람할 것을 강요당하는 영화관의 관객을 대중(mass), 분산적이고 자유롭게 작품의 지속 시간을 “배신”하며 다시점을 형성하는 미술관의 관객을 다중(multitude)으로 명명합니다.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영상들의 특징인 전체를 개괄할 수 없는 ‘결핍’은 정치적 영화를 영화적 정치로 반전시킵니다. 정치적 영화가 전통적으로 교육을 목표로 하는 재현이었다면, 영화적 정치는 다시점을 요구하며 다중을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접합하여 생산합니다. 슈타이얼이 말하는 영화적 정치는 정치적 영화가 서로 다른 다중을 접합하여 생산하는 정치입니다. 이는 기존 영화의 문법을 답습하지 않고 미술관을 폭로함으로써 미술관에 출구를 내는 정치로서의 영화, 영화로서의 정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화가 미술관에 걸린다면 결국 미술관을 재생산하는 일에 복무하는 것이 아닌가? 나갈 수 없는 출구를 확장하는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 아마 슈타이얼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미술관에서 현실 사회로 나가도 미술관이고, 현실 사회에서 미술관으로 들어가도 그곳이 현실 사회라고요.




다음 세미나에서는 p.107- 177을 읽습니다.

「항의의 접합」~「미술의 정치」는 서진 님, 「미술이라는 직업」~「모든 것에서의 자유」는 은영 님이 발제를 맡아주셨습니다.

세미나는 매주 일요일 오후 9:00에 약 2시간 동안 비대면 줌zoom으로 진행됩니다.

그럼 1 8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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