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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페미니즘세미나:주디스버틀러읽기_숀호머라캉읽기발제문2018-05-11 18: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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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세미나:주디스버틀러_라캉읽기 발제문_20180511_임당

숀 호머, <라캉읽기>

4. 무의식의 주체

라캉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구조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1) 라캉은 주체를 상징계와 관련해 구성하지만, 주체를 단순히 상징계의 결과로만 환원하지 않았다. 2) 구조주의는 완전한 구조를 가정하지만, 라캉의 구조인 ‘상징계’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상징계는 항상 과잉을 포함하며, 이러한 과잉은 상징계를 넘어서는 주체와 대상을 가정하고 있다.

무의식의 형성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유아기 초기의 경험과 외상에 대한 기억의 흔적으로, 표상representation을 의미했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무의식적 주체에 관한 과학으로 정의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의심하는 주체에 대해 선존재론적이고 미지의 것인데, 이는 데카르트가 이야기했던 주체의 명확성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간극 또는 균열로서의 무의식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적 방어기제가 약해지는 순간(꿈, 말실수, 농담, 증상들)에 드러나는 것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장애, 실패, 분열과 관련해 정의한다. 라캉에게 무의식은 언어가 실패하고 혼란스러워 지는 순간, 그 균열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시간성과 모순이 없는 영역으로 묘사했다. 무의식은 표상과 관련되어 이미지와 짝을 지을 수 있고, 의식은 언어적인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라캉은 이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라캉에 의하면 감각된 이미지들을 구조로 번역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기표의 규칙을 따른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이 상징계가 주체에 미치는 효과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세 가지 논제를 도출할 수 있다. 
1) 무의식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작용을 하는 어떤 것이다. 
2) 무의식은 개인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상징계가 주체에 미치는 효과effect- 충격impact-이다. 
3)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라캉에게 언어는 차별관계에 근거한 모든 의미화 체계를 가리킨다. 무의식은 기표와 기표 아래에서 미끄러지는 기의와의 간극을 통해 상징계에 생성되는 것으로, 언어 내에서 의미가 실패하고 무효화되는 지점이다. 상징계 내에서 의미작용을 하지만, 기존의 언어체계에서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는, 곧 해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무의식은 언어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타자(Other)의 담론’이라고 말한다. 소타자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대타자는 우리가 우리의 주체성 안으로 동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이다. 대타자는 곧 상징계이다. 우리는 상징계 안에서 태어나는 한, 그 안에서의 문법과 언어를 습득해야지만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말은 타자의 말이며,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가진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우리는 타자를 통해 그 언어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이러한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가 타자의 언어와 욕망을 통해 말하는 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인 것이다. 

소외와 분리

주체는 우선 기표와 동일시하고 이후 기표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전과정을 소외라고 명명할 수 있다. 주체는 이중으로 소외되는데, 먼저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자신을 오인함으로써 그리고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함으로써 두번째로 소외된다는 것이다. 라캉에게 이러한 소외는 필연적이고 극복 불가능하다. “소외는 운명이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분리(separation)도입하는데, 분리는 욕망과 관계되며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타자와 구별하는 과정과 관계된다. 이러한 분리는 주체가 결여된 존재로서/의미화 연쇄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욕망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구는 충족될 수 있으나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결국 욕망과 무의식은 모두 근본적 결여의 인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욕망 또한 주체와 타자(상징계)에 결여된 어떤 것의 발현인 것이다. 
타자는 완전한가? 타자 또한 욕망하는 주체이므로 결여되어 있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좇다가, 타자또한 결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분리는 자신을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구별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분리의 과정은 주체와 타자의 두 결여들 간의 상호작용이 주체의 구성을 결정하게 된다. 

라캉의 주체

라캉의 주체는 두 단계, 1) 언어를 통한 소외의 과정에, 2) 욕망의 분리에 상응하는 단계로서 일어난다. 그러나 라캉은 주체가 나타나는 지점을 명확히 표시하지는 않는다. 주체는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을 통해 단지 섬광같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분리를 통해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변별해 낸다. 이러한 주체의 선택은 무의식과 욕망의 불확정성에 근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충동

주체의 위와같은 특성은 주체가 충동과 결코 별개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게 충동drive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거 삿이의 경계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에너지의 양과 정신적인 표상으로 구성된다. 충동은 원동력으로서의 긴장을 가진다. 충동은 만족을 통해 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만족을 위해 충동은 대상을 선택해 부착되는데, 이러한 유대를 고착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충동의 근원은 기관 또는 몸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신체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비롯되는 자극이 정신생활에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개념에서 본능과 충동은 구별될 필요가 있는데, 본능은 충족될 수 있는 욕구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만족될 수 없는 항구적인 충동과 구별된다. 
라캉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구분을 유지한다. 충동은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항상 대상 주의를 맴돌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는 만족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충동의 목적은 단순히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리듬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충동에 관해 프로이트와 라캉 간의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충동이 부분충동의 발달과정을 거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후에 성기충동으로 통합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라캉은 모든 충동은 부분적인 것으로 결코 하나로 통합되거나 조화로운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라캉에게 모든 충동은 근본적으로 성적이며 동시에 죽음충동이다. 죽음충동은 실재계, 주이상스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이는 다음절에서...


5. 실재계

실재계the Real는 ‘사물’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기에 파악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라캉에게 현실은 상징들과 의미작용의 과정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상징계와 연관된다. 실재계는 이러한 사회 현실의 기반이 되지만, 동시에 그 현실을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라캉은 이러한 실재계라는 개념의 전개를 3시기에 걸쳐 다르게 다루고 있다.

실재계는 항상 제자리에 있다

먼저 실재계의 제 1시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까지의 논의. 라캉은 실재계를 상상계와 상징계 모두에 대립되는 것으로 ‘제자리에 머무는 것’을 다루면서 세 개의 범주 중 하나로 실재계를 자리매김한다. 실재계는 맹목적인 전상징계적 현실이다. 실재계는 욕구가 발생하는 장소이지만, 그것을 상징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실재계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데, (아기의 울음과도 같은 것으로)기호계 내로 들어오긴 하지만 상징화의 과정 너머에 있는 것이다. 실재계는 미분화된 덩어리로서, 실재계를 상징화 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구분할 수 있고, 사회 현실이라는 것도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상징화의 한계로서의 실재계

1964년 이후, 이론은 수정된다. 이 시기의 실재계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욱 부각된다. 실재계는 무엇보다 외상trauma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정신분석에서의 외상은 정신적 사건을 의미한다. 주체가 외부자극에 대해 이해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정신적 외상인 것이다. 당면한 자극을 의미화시키지 못한 주체는, 그 자극에 점착되어 외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체에게있어 상징화의 흐름은 멈추게 되고, 주체는 초기 발달단계에 고착된다. 이 외상은 현실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초과분이고 그것이 바로 실재계인 것이다. 

Das Ding (사물)

(아직 두번째 시기) 프로이트에게 있어 억압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여러개의 정신분석학파가 갈라져나왔다. 라캉에게 억압된 것은 이미지나 단어, 감정보다 한층 근본적인 불가입성 중핵이다. 라캉은 이러한 억압된 요소를 대표표상 또는 Das Ding(사물)이라고 설명한다. 사물은 객관적으로는 무이나, 욕망의 원인/대상이 됨으로써 사후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욕망과의 관계속에서만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사물의 개념은 후에 대상a로 대체된다.

무의식적 환상

정신분석은 사회현실보다는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과 소원에 관심을 가진다. 무의식적 욕망이 표현되는 방식이 곧 환상이다. 환상은 주체를 주인공으로 한 소원 성취를 대표하는 상상된 장면으로 방어기제를 통해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환상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두 극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정신적 현실은 물질적 현실만큼이나 실제적인 것이다. 환상은 근원적/원초적 환상과 이차적 환상 들로 구분된다. 원초적 환상은 주체가 성인이 된 후 정신생활의 유형을 결정하고, 고정된 내용을 구축하는 것으로서의 환상이다. 
대부분의 근원적 환상은 욕망이 치솟거나 해결되는 초기 경험과 연관된다. 여기서 환상은 욕망이 펼쳐지는 무대이면서, 욕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우리는 욕망하는 법을 배우고, 욕망하는 주체들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에서 도출되는 쾌락은 무엇보다 욕망의 무대화로부터 획득되는 쾌락이다. 

환상과 대상a

환상과 실재계를 중개하는 것이 대상a다. 대상a 또한 지속적으로 재구성된 개념이다. 대타자의 대문자 A에 대비되는 소타자가 대상a다. 대상a는 타자의 결여를 대표하며, 결여 그 자체를 뜻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파열을 통해 욕망이 움직이면, 대상a가 도래한다. 환상을 통해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착각을 지속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외면할 수 있게 된다. 대상a는 공백이자 간극인 동시에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서 그 간극을 순간적으로 메우게 되는 모든 대상으로, 결여를 덮어 가리는 기능을 일컫는다. 여기서 대상a 역시 객관적으로는 무다. 그것은 자신을 불러내는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어떤 것으로서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면 실재계의 잔여인 것이다. 환상은 대상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정의한다. 

실재계의 불가능성과 주이상스

1970년대, 마지막단계. 불가능한 조우로서의 실재계에 초점이 맞춰진다. 실재계와 현실의 명백한 구분은 더욱 강조된다. 라캉에 의하면 환상이란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실재계가 우리 일상생활의 경험 안으로 침입할 때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주체가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 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말로 주체가 외상적 사건을 받아들임으로서 주이상스에 책임지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주이상스는 고통속의 쾌락이며, 성적 쾌락과 연결된 것, 혹은 종교적 또는 신비주의적 황홀경의 경험으로서 나타나는 쾌락이다. 라캉은 주이상스를 죽음충동과 연관시킨다. 설리번에 의하면 주이상스는 우리의 인생에 그 가치를 부여하는 본질 또는 속성이다. 기표에서 기표로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욕망과 달리 주이상스는 절대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이상스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충분함 속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서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게 될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바로 주이상스다. 우리는 주체와 달리 타자가 이 향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설정을 하지만, 실제로 무한한 주이상스란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은 우리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한 불만 및 실재계의 불가능성과 화해하게 하는 방법이다. 사회현실은 환상을 통해 직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종차별이나 반유대주의의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자가 우리의 주이상스를 훔쳐갔다고 가정한다. 그들이 유태인이건 동성애자이건 집시들이건.

6. 성차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라캉의 사고는 두가지 주요 단계들에 의해 구분된다. 1) 성차를 팔루스에 근거해 구분한다. 라캉에게 거세는 음경이 아닌 주이상스의 절단과 결여의 인식을 수반하는 상징적 과정이다. 2) 라캉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 열려있는 것이며, 생물학적인 것과 관련없는 구조들로 발전시킨다. 이때 소위 남성적/여성적 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에게 허락된 주이상스의 유형이다. 

프로이트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수수께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남아의 그것에 비해, 여아의 콤플렉스를 잘 다루지 못한 불완전한 이론이다. 

팔루스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팔루스가 될 것인가?

정신분석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다음의 두 요소에 관한 것이다. 1)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한 형태를 강조한다. 2) 정신분석은 항상 여성들을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라캉은 고정된 정체성에 관련된 개념은 모두 허구이며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 이 비판을 뚫고 나간다.
라캉에게 무의식은 모든 고정적인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등장한다. 초기 라캉에게 성차는 의미작용의 문제로, 주체가 기표로서의 팔루스와 가지는 관계를 통해 정의되는 주체의 위치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팔루스는 결여의 기표이다. 팔루스는 상상적 대상으로 기능하다가, 욕망은 만족될 수 없으며 대상으로서의 팔루스는 영원히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통하여 팔루스는 상징적으로 기능하게된다. 상상적 결합은 파기되고, 욕망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의미화 과정이 개시된다. 그러므로 팔루스는 주체의 근본적인 분열을 재현하는 파열 또는 분열의 순간을 대표하며, 모든 인간에게 결여를 대표한다. 욕망하는 주체는 주이상스가 전적으로 충족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남녀의 거세 콤플렉스의 차이는 이 원초적 결여/상실을 재현하는 방식에 기인하며, 이때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비대칭성이 명확해진다. 남아들은 팔루스를 가진 척 하는 반면, 여아들은 팔루스가 될 수밖에 없다. 

가장으로서의 여성성

여성들이 팔루스가 되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 부분을 포기하는 과정은 가장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킬 수 있다. 조안 리비에르가 개념화한 가장은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도입한다. 이성애적 여성과 다른 갈래로 등장하는 동성애적 발달과정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자기자신의 남성성이 인식되길 바란다. 이 새로운 여성의 유형은 남성들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남성성을 원하는 여자들은 남성들이 느끼는 불안을 경감시키고 남성들에 의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여자다움의 가면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서 어린 소녀는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가학적인 분노를 느낀다. 이런 위험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여아는 어머니를 회유하고 아버지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녀는 우선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하다가 후에 어머니와의 동일시의 과정을 겪는다. 여기서 여성성의 가면은 활용된다. 여성성은 가장이다. 라캉은 여성의 리비도를 조직해내는 것이 바로 이 가면이며, 가장이라는 개념은 여성성이라는 정체성이 구축된 것임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이 많이 발생하는 명제이다. 라캉은 여자가 비전체라고 할 때, 여자가 남자에 비해 결여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완전히 구속당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남성이 느끼는 것 이상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여성적 주이상스에 대한 가능성이 열린다.

남성성

주체는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결코 만족될 수 없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만과 불충분을 느끼며 무엇인가 아쉬워하게 된다. 이러한 (불)만족감이 바로 라캉이 팔루스적 주이상스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 남성적 구조가 정의된다. 남성적 구조의 특징은 타자를 대상a로 바꾸고 대상이 우리의 욕망을 전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고 오판하는 것이다.

여성성

여성적 구조는 타자와 주이상스에 대하여 주체가 가지는 다른 종류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며 라캉은 이것을 타자적(Other) 주이상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야기되는데, 말이라는 것이 상징계와 연관되는 팔루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적 주이상스는 우리가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이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타자적 주이상스는 상징계와 주체 너머에 있으므로 무의식의 바깥이다. 타자적 주이상스는 남/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은 팔루스적 주이상스와 타자적 주이상스를 모두 즐길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는 둘중 하나만을 선택한다. 

성관계와 같은 것은 없다

라캉은 두 사람 사이의 완전한 성적 결합의 불가능성을 위해 위와 같은 명제를 도입한다. 이는 보편적 문화의 환상과 대비되는 것이다. 라캉에게 있어 정신분석의 역할은 어떻게 모든 조화로운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타자에 대한 서로 다른 관계로서 정의되는 두 개의 비보완적 구조들을 대표하므로 성관계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사람의 욕망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진다. 팔루스와 대상a와의 관계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바로 이런 비대칭성이 성관계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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