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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젝_부정적인것과함께머물기_5장2017-07-28 18: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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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숨 : 향유의 원환고리
  1.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지젝은 오페라가 시작되었던 1600년경에서 소멸되었던 1900년 이후의 시기가 주체성의 역사와 발 맞춰 온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확인 해 보고자 한다. 오페라의 소멸은 고전적 주체성의 소멸, 그리고 히스테리적 주체의 출현과 맞물린다는 것이다. 아리아에 담길 수 없는 새로운 주체의 양태가 등장함으로써 오페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지젝은 오페라의 역사에서 주체성의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실재의 응답

  오페라의 기원에 놓인 것은 상호주체적 배치이다.(316) 그 첫 형식에서 주체는 주인에게 주인의 법을 멈춰달라고 간청한다. 이 때, 진정으로 힘 있는 주인만이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이로써 주체와 주인의 상징적 교환이 성립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젝은 은총을 베풀 수 밖에 없는 주인의 행위 또한 자신의 노예인 주체에게 얽매여 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성립과 오페라의 기원은 시간적으로 근접하다.(318, 왜져?;;)
  데카르트에서 칸트로의 이동을 보여주는 오페라도 있다.(318) 글룩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서, 주체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그 순간 신의 응답으로서의 은총을 받는다. 이는 주체의 간청에 대한 단순한 응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주체가 스스로의 자율성(희생)에 대해 단언한 후에야 주어지는 자비의 제스처인 것이다. 모차르트의 모든 오페라 또한 글록의 것과 같은 주체화의 제스처로 이루어져 있다. "자율 그 자체가 바로 그 자기단언 속에서 "자비"에, 타자의 손짓에, "실재의 응답"에 의존한다는 근본적인 역설"(321) 이는 즉, 주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자율은 사실상 타자의 혹은 외부의 일이 돕는 순간 완성되는 자율이라는 것이다. 결국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적 주체성이라는 것은 "자율과 은총의 역설적 접속"(324)인 셈이다.

주체성과 은총

  주체가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헤겔적으로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희생할 때 잃는 것은 결국 이성으로서의 신이다. 이러한 신의 죽음은 주체가 대타자 없이 홀로인 자기자신을 발견한다는 의미라는 점을 주목하자. 
  또한 "은총의 개입은 선행하는 상실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상실, 바로 이 동일한 자기포기의 행위가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어진 것"(326)이라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신-주인이라는 실체를 잃지만 공동체라는 실체를 얻었지 않는가. 그리하여 주체성은 일종의 원환고리, 혹은 역설을 내포한다.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326)
  이러한 주체와 주체성의 적대를 칸트의 세 비판 모두에서 만날 수 있다. 인식하는,도덕적인, 판단하는 주체화의 방식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빠져들기"의 논리로, 주체화의 매커니즘이 폭로되더라도 계속 유지되는 환영의 논리에 기반 한다. 이러한 환영의 논리 속에서 주체는 자신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젝은 라캉의 네 번째 비판("순수욕망비판")을 토대로 칸트의 세 비판을 보충할 수 있다고 본다. "욕망은 "정념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파악되기를 멈추는 순간 "순수"해진다."(331) 여기서 "순수욕망"은 주체가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예지적 영역으로 들어설 때, 그 욕망을 순수한 것으로 구성한 바로 그 숭고한 대상이 상실된다는 역설에 갇혀 있다.(???)

모차르트에서 바그너로

  모차르트 오페라의 변이는 바그너 오페라에서 반복된다. 이 둘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는 베토벤의 <피델리오>에서 찾을 수 있다. 여자의 자발적인 자기희생을 통한 남자의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남자와 여자 모두를 "정념성"으로 얼룩지게 하면 된다. 구원받을 남자는 행위에 실패한 죄인이며, 구원자인 여자는 히스테리적 특징을 획득한다. 이것이 바그너식의 기본 매트릭스인 것이다. 
  바그너의 <파르지팔> 또한 이러한 기본 매트릭스를 유지한다. (줄거리 생략) 일견 대 혼란(?) 스토리인 이 오페라에 라캉적 담화 매트릭스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질서화 할 수 있다. 

S1 : 주인으로서의 상처를 입은 왕 암포르타스
S2 : 가상으로서의 마법사 클링조르(지식)
$ : 분열된 히스테리 여자로서의 쿤드리
대상 a : 쿤드리의 욕망의 대상-원인이지만 여성적 매력에 전적으로 무감각한 "순진한 바보" 파르지팔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구애를 거절함으로써 암포르타스의 고통과 동일화한다(반복의 행위). 또한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함으로써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다(수행으로서의 행위). 이 행위들의 집합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라멜르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암포르타스의 상처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이 상처는 "그것의 대립물에 대한, 향유의 어떤 잉여에 대한 또 다른 이름"(340)이다. 리처드 부스비의 <죽음과 욕망>에서 주목하는 라캉적 차원은 '상상적 대 실재적'의 쌍이다. 거울단계의 인간은 신체의 다형적이고 혼돈된 발아로부터 분리시키는 상상적 이미지로의 고착을 통해 틈새를 만든다. 상징화는 바로 이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의 공백을 상징적 대리물로 비추려는 실패한 시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스비는 죽음충동을 상상화 과정에서 추방된 것(이드)의 재출현으로 해석한다. 죽음충동은 삶 그 자체의 복귀 열망이며, 자아는 이 복귀를 죽음의 위협으로 지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아의 도착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결국 죽음의 진정한 대리물은 "삶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석화된 이마고로서의 자아 그 자체"(343)이다. 따라서 두 개의 죽음, 자아의 죽음과 선-상징적인 삶의 흐름 그 자체의 중단이 생겨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징적 질서가 신체의 실재를 죽이며 성립되기에 "순수한 삶"의 실재 또한 산출한다는 점이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의 죽음의 독약의 역할 또한 "두 죽음 사이의" 영역에 두 주인공을 위치시킨다. 이들은 죽음을 결심하고 미약을 마심으로써 스스로 주체적 위치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주인공이 갈망한 "순수한 삶"은 바로 상징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라캉이 말한 라멜르가 바로 이 상징화됨으로서 생성되는 "순수한 삶 본능으로서의 리비도"(346)인 것이다. 그리고 대상a의 모든 형태들은 이것의 대리물 혹은 등가물이 된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호주체성 이전의 타자성이다. 주체가 이 라멜르와 맺고 있는 "불가능한" 관계는 라캉이 $◇a 공식에서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암포르타스의 상처가 바로 이 라멜르이며, 정신분석의 대상인 것이다.

바그너적 수행문

바그너적 세계관의 종착역에 놓인 <파르지팔>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평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오페라 모두 무의미한 사태 급변에 불과해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행복으로 반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 모두에서 그 대가는 행동의 "실체변환"이다. <파르지팔>에서 원래 전설에는 있었던 질문 시험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또한 성배 의식을 성배의 전시로 축소시키며, 젊은 청년이 피 흐르는 창을 들고 저녁 만찬이 진행되는 홀을 뛰어다니는 장면도 삭제한다. 이 장면은 강박신경증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피 흐르는 창의 강박적 과시는 왕의 능력에 대한 증거(왕의 마비를 이끄는 무기이자 첫날밤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남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바그너식의 <파르지팔>은 그의 다른 작품 <로엔그린>에 대한 보완적 대립물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353, ???) <로엔그린>은 금지된 질문이라는 주제에, 자기 파괴적인 여성적 호기심의 역설에 집중되어 있다. 여성은 공적인 영웅임을 감추고 있는 자신의 파트너에게 정체를 묻지 않는 한에서 그의 파트너로서 남을 수 있다. 즉, "영웅이 자신의 상징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상징적 위임을 공공연하게 떠맡는 그 수행적 제스처는 바로 그 여자의 존재와 양립 불가능"(355)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그너적 수행문에 대한 일반 이론이다.
  그렇지만 파르지팔의 역설은 <로엔그린>의 질문시험을 역전시킨 것과 관련이 있따.

남근을 넘어

우리가 질문시험에서 조우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로서의 큰타자와의 관계에서 증상의 논리의 순수한 사례"(355)이다. 신체적 증상이 말로 옮겨져 치유되듯, 상징적 질서는 실재에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 "무슨 일이야, 덕?"처럼 물어보는 것은 대타자를 응축한 순수한 누군가로부터 나와야 한다. 증상은 "질문 없는 답, 즉 고유의 상징적 맥락을 빼앗긴 답일 것"(356)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러한 노선을 이용하지 않는다.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은 제 2막에서 암포르타스의 고통의 의미를 감지한다. 이러한 2막은 모차르트적 전통에서 벗어난 막이며, 큰타자의 지위 변화를 암시한다. 파르지팔은 "순진한 바보"이며, 왕을 자처하기는 해도 더 이상 큰타자의 대역이 아니다. 바그너가 대면할 수 없었던 것은 파르지팔이 쿤드라와의 키스를 거부함으로써 생겨나는 암포르타스에 대한 동일화가 "여성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암포르타스에 대한 동일화는 그의 고통의 실재에 대한 동일화이다. 이러한 고통의 반복은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는 가면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파르지팔 역으로 남자와 여자 두 배우가 번갈아 나오게 한 지버베르크의 결정은 매우 탁월한 것이며, "상호주체적 그물망으로부터 돌출하는 대상적 잉여"인 "성스러운-금욕적인 향유의 체현물"(364)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신의 향유를 "간수하기"

<파르지팔>에서 주체화는 엄밀히 도착적이며, 자기-대상화와 같은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큰타자의 향유의 도구로서 간주"(365)하는 것이다. "타자의 향유". 파르지팔은 통찰과 공감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써 죽을 필요가 없는 사는 그리스도가 된다. 암포르타스의 가부장적이며 전통적인 권위를 신의 향유의 간수자가 대체하는 것이다. <파르지팔>에서 성배의 기사들이 지닌 잔인한 압력, 반-오이디푸스적인 사태를 보여주는 암포르타스와 티투렐의 관계가 전통의 역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의 주장을 지지하는 배경이 된다. 결국 파르지팔은 새로운 개념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된다. 주체가 큰타자에게 속했던 자비의 제스처를 스스로 떠맡을 때, "현실적"권력은 상실된다. 이로써 "주체에게 남는 것은 텅빈 형식적 동의 행위이며, 그가 스스로를 "무언의 지배의 대변인"으로 임명하게 되는 동어반복적 수행문이다."(372,???)

도착적 원환고리

리비도적 경제의 층위에서 전체주의는 주체의 도착적 자기대상화(자기도구화)로 정의된다.(372) 이러한 도착증과 자기적법화 행위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자기적법화 행위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처럼, 전쟁의 장소를 그들의 기억을 위해 바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들의 과업의 계승자로 적법화 하는 행위다. 이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도착적 희생의 원환고리는, 에우리디케를 의도적으로 잃음으로써 숭고의 대상으로 다시 얻게 된 오르페우스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칸트 또한 "상처"가 사물의 접근 불가능성이라고 하면, 그것의 접근 불가능성이 우리의 자유와 도덕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즉 "상처"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상 "치유"의 긍정적 조건이라는 것이다.(376)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선의 실현을 통해 스스로 도구의 역할로 나서는 주체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그너의 작품에서 파르지팔은 바로 이러한 주체를 등장시킨다. ""상처의 거래"를 기꺼이 떠맡고 선을 위한 길을 닦는 도착적 주체의 출현."(377)
  이러한 도착증의 원리는 라캉의 모호한 이론 중 하나인 시각충동에서 대상a의 역할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시각충동은 우리가 우리의 응시를 끌어당긴 그림안의 얼룩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지게 함으로써 성립되는 도착증적 폐쇄의 원환고리를 닫는다. 부메랑의 비유를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부메랑의 목표는 과녁(동물)이지만,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 우리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목표와 목적이 분열되는 순간, 진정한 목적이 목표를 반복해서 놓치는 그 순환 운동의 유지 그 자체가 본능이 충동으로 변형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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