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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발리바르 역사유물론연구 3장 적대의 두번째 위상 자본과 부르주아2017-07-24 0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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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발리바르 70년대 역사유물론 연구 요약발제 이상하.hwp (48KB)

발리바르 70년대 역사유물론 연구 요약발제 7/24 물의 날 이상하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송경동 시인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시 중에서...

 

- 3.적대의 두 번째 위상 자본과 부르주아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적 생산의 총과정 속에서 대칭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에, 부르주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회하여 특정 사회구성체에 있어 자본의 분배와 집적의 형태들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 노동과 달리 자본가는 자본의 대리인이다. 158

자본가는 생산과 유통의 조직자(경영자)로서, 자본제 생산양식 형성의 개시부터, 국가는 자본의 재생산과정 속에서의 총체와 함께 필연적 기능을 수행한다. 야경국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159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를 대신해서 프롤레타리아가 그 기능의 변혁과 폐기를 위한 투쟁을 함과 동시에 부르주아가 수행하던 사회적 기능을 인수해야만 했었다. 올바른 혁명적 정치는 이러한 착취의 조건들을 완전히 폐기하고 정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160

노동의 착취조건을 수정하는 전화에 대해서, 여기서 총 세 가지를 검토한다. 1. 자본제적 소유의 역사적 전화, 2. 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 지배적 자본분파의 성질, 3. 국가의 역할을 내포하는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의 내적 모순들의 성질과 그 경향적 통일의 형태들. 161

 

(1) 자본제적 소유의 역사적 전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은 자본의 집적을 통해 잉여가치, 이윤율을 상승시키고, 이를 통해 자본의 소유 형태들에 근본적인 전화를 낳는다. 이것을 요약하면 자본제 생산양식은 자본이 임노동자에 대항하여 소유의 법적 형태로 집적됨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161-162

도식적으로 부르조아지의 존재의 토대를 구성하는 자본소유의 형태들을 4가지로 분류할수 있는데,

1,개인적 사적 ()자본. 2.익명의 회사자본 3.공업 상업 은행등 거대기업의 독점자본. 4.국유기업과 공공부문 전체에 의해 구성되는 국가자본이다. 물론 여려 형태사이에 수많은 이행, 혼합이 존재한다. 163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자본제적 소유의 법적 전화의 실천적 중요성을 동시에 인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 법적 형태들의 작용 그것이 바로 자본의 집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부르조아적 법이데올로기의 표상인 국가에 대한 지배적 표상을 변혁할 필요가 있다. 공적 자본이 사적 영유(즉 독점화)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법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165

(2)제국주의와 독점 자본의 지배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떤 자본형태가 지배적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독점자본인가? 아니면 융합된 하나의 형태, 끔찍한 혼종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경제와 정치 학파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은 경제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관념에 엄밀하고 솔직한 정식을 부여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잉여가치 분석을 이윤분석으로 대체하고,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역사를 그것을 결정하는 계급투쟁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이윤의 논리의 결과로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166-167

그렇기에 독점자본의 지배의 일반화라는 사실만이 현재(제국주의시대)의 모든 자본적 사회구성체의 분화들(지배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 동일한 기본적 계급적대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역사에서는 크게 다른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67-168

자본주의 역사의 제국주의 단계는 20세기초에 최초의 세계분할의 완료와 함께 시작한다. 그에 대해 그 이전의 소위 확장과 식민화 시기는 단지 제국주의로의 이행의 시기다. ... 사실상 국가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한 특징이고 그 토대를 이루는 독점자본주의의 지양은 아니다. ... 독점자본은 그 자체로 덜 순수히 민족적자본이며 점점 깊이 자본의 국제화 속으로 얽혀들어간다. 168-169

 

(3)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의 통일과 모순

 

프랑스 사회구성체를 예로 들어본다면, 고려해야만 하는 사실이 몇가지 있는데 첫째, 프랑스 부르조아지는 사회집단으로서는 항상 상대적으로 수가 많았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둘째, 부르조아지는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항상 몇 개의 분파로 분할된 계급이며 이들 분파의 경향적 통일이 바로 유물론적 분석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이 분파들은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한다. 셋째, 자본 형태들의 발전 자체는 부르조아지 속에 분파들의 경쟁뿐만 아니라 법적 경제적 위치의 분화도 도입한다.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는 자본가들(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본가)에 의해 항상 지배되긴 하지만, 단지 소유자들의 연합은 아니며 또 자본가들의 단순한 연합도 아니다.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의 구성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170-171

 

무엇보다도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통일성과 그 내적 모순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은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양자는 함께 발전한다. 사태가 이렇다면 정치경제학의 전통에 반해서 사회적 모순들의 두가지 형태, 즉 이해대립과 엄밀한 의미의 적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172

금융자본의 발전은 은행의 기능을 변화시킴으로써 다음과 같은 삼중의 효과를 낳는다. 생산과 유통의 자본제적 사회화그 다음 착취받는 노동자를 포함하는 사회 전체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마지막으로 금융자본의 지배에 의한 자본가계급의 조직화. 174

지배계급의 조직화에 있어서 부르조아 국가의 역할은 단지 국가가 경제적 대리인이 아니라, 부르조아 국가가 항상 그 역사적 토대로서 자본 및 자본제 생산과 유통을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경제적 조직체와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대부르조아지의 부르조아 계급 전체에 대한 경제적 지배가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은 국가장치(억압적 및 이데올로기적인)의 존재 작용 및 전화를 항상 전제로 한다. 175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가의 발전은 모두 그것이 불균등하게 달성하는 이중의 결과를 목표를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 착취의 전체적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그 정상적인연속성을 보증하는 것. 그리고 있을 수 있는 타협을 대가로 하여 부르조아지 내부에서의 지도적 한 분파의 지배, 주어진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착취 및 축적 형태를 대표하는 한 분파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것. 두 번째 목표는 항상 첫 번째 목표 밑에서 추구되며, 따라서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통일은 그 자신의 내적 투쟁을 통해 착취의 유지와 발전에 의존한다. 국가는 분업 전체를 가리기에 계급을 초월한 힘으로 나타난다. 178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이 끝없이 강조했던 것처럼 지배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는 본질적으로 노예제적 또는 봉건적인 카스트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국가는 부르조아가 이전의 지배계급으로부터 그것을 그대로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인수하는 부동의 역사형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국가의 구조를 전화시키고 부르조아 계급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는 모두 역사적으로는 국가 부르조아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국가공공자본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와 활동이 내재적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러한 특징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타당하며, 모든 부르조아지는 동일한 이유에서 민족 부르조아지이며, 국가의 필연적 형태는 민족적 형태이다. 그 억압된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 또는 독재(마르크스)와 헤게모니(그람시)가 접합될 수 있는 유일한 형태.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자본은 더 이상 완전하게는 민족적자본이 아니며 점점 그렇지 않게 된다. 반대로 자본은 금융자본으로서 그 재생산이 수출과 재수출을 통과하는 다국적 자본이 된다. 부르주아지에 있어서 국제주의란 있을 수 없다. 자본의 국제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국제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다. (자연적 자동적 과정은 아니다.) 180

 

 

 

-4. ... 결론적으로 일체의 잡다한 운동과 문제해결이 귀착되는 계급투쟁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계급투쟁 이외의 다른 대상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 속에서 계급투쟁의 결정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급투쟁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에 의해서, 미리 존재하는 자연적 또는 이념적 필연성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오직 계급투쟁의 다양한 형태들과 그 상호작용의 구체적 변증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181

계급투쟁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열쇠, 스피노자식으로 무지의 대피소로서 남용되기도 했다. 허나 계급투쟁은 해답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 문제로서 제기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어진 정세 속에서 계급투쟁의 상이한 형태와 그 접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계급투쟁들의 형태 중 하나에 의한 결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182-183 (물질적 생산 속에서의 계급투쟁의 결정)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자본의(부르조아지의) 계급투쟁이 집단적 필요의 충족과 노동조건 및 생활조건의 개선 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반격이 아니라, 완전히 그 정반대임을 납득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이론적 승인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관점을 지극히 생산구조 그 자체에 적용시킨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사실은 경험에도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모두 부합하는 것이다. 184

생산관계의 존재란 노동과정에서의 그 물질적 효과와 실질적인 실현의 형태들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라면 잘못된 주관주의, 관념론에 다시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레닌이 밝혔던 자가당착에 의해 그들은 변증론자에 되기에 충분할 만큼 유물론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187

인간자연을 물질적으로 전화시킴으로서 그 자신이 하나의 자연력으로 되고 자기 자신도 전화된다. ... 생산관계의 어떠한 사회형태도 기존의 생산력에 의한 결정의 바깥쪽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바로 말하는 것처럼 이 최초의 명제는 추상적이며, 여기에 제 2명제를 부가해야 한다. 인간이란 특정의 한 사회이며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회형태이다. 앞의 규정들이 실현되는 생산과정의 사회적 구조의 문제도 제기할 필요가 있다. ... 이제야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정을 그 자체로서 분석하여 그 사회형태를 정의하고 그 국면들과 실현의 필연적인 연관을 지배하는 생산관계들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과정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88-189

 

생산력 속에서(노동과정 속에서) 노동력에 대한 생산수단의 우위는 각각의 역사적 생산양식의 고유한 형태 하에서 생산력 그 자체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를 반영한다. 이것은 인간적 요소의 우위 특히나 생산수단(및 사회적 분배)에 대한 노동력의 우위라는 터무니없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190

대응하는 소비의 확대가 없는 생산의 이러한 확대는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할과 그 독자적인 사회구조에 대응하고 있다. 즉 전자는 사회의 생산력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고, 후자는 인민대중에 의한 기술적 정복의 이용을 배제한다.” 레닌의 이 말을 두가지 측면의 모순 자체가 그 불가분한 통일임을 승인할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할이 어떻게 그 독자적인 사회구조의 외부에서 고찰될 수 있을질르 누가 우리에게 유물론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후 레닌은 이전 말의 애매성을 없애서 제국주의 시대에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은 제국주의가 부여한 새로운 형태 하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의 결과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전은 점점 모순적으로 되고 점점 불균등해진다. 191

우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사회관계들의 운동의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계급투쟁의 구조와 특징을 추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지의 관계는 처음부터 비대칭적이다. 또한 둘은 동일한 의미에서 계급이 아니다. 계급일반은 존재하지 않으며 착취의 일반적 문제설정, 따라서 매개의 경우마다 개별적인 계급으로서의 사회분할이라는 일반적 문제설정만이 있다. 193

계급으로서의 부르조아지의 이론은 그 자신의 관점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 잉여가치를 올바르게 정의하고 사회계급을 그 역사와 바로 결부된 자본제 생산양식 속에서 고찰한다는 주춧돌 위에서만, 역사유물론은 발전할 수 있고 현재의 사회구성체를 분석하는 수단을 우리에게 마련해 줄 수 있다. 194-195

프롤레타리아를 통일시키는 것은 부르조아지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투쟁의 높은 형태로 정치투쟁을 통해 국가권력을 목표로 하며 그것을 신성화시키는 것이 아닌 폐기하기 위해서이다.

 

잉여로운 페이지니까 잉여로운 시로 잉크낭비 탕진잼!

 

프로레슬링은 쑈다! / 유 하

 

박통시절, 박통터지게 인기있었던 프로레슬링

김일의 미사일 박치기에 온국민이 들이받쳐서

박통 터지게 티브이 앞에 몰려들던 프로레슬링

흡혈귀 브라쉬

인간산맥 압둘라 부처

전화번호부 찢기가 전매특허인 에이껭 하루까

필살의 십육문 킥 자이안트 바바

빽드롭의 명수 안토니오 이노끼

그 세계적인 레슬러들을 로프반동 튕겨져 나오는 걸 박치기! 당수!

또는 코브라 트위스트, 혼줄을 내주던 김일 천규덕의 극동 태그매치 조

 

저녁 여덟시면 나를 어김없이 만화가게에 붙잡아 놓던

그 흥미진진한 프로레슬링이

어느 순간 시들해진 건 무슨 이유일까

왜 모두들 외면했던 것일까 프로레슬링 유혈 낭자극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통이 죽어서?

김일 같은 스타 레슬러가 안나와서?

항간에 떠도는 루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국내파 레슬러 장영철이 프로레슬링은 쑈다 라고 외친 다음부터라는데....

사건의 전모인즉슨, 자신과 비기기로 각본을 짰던 김일이

약속을 어기고 넉사자 굳히기를 해버렸다지 아마

이에 열이 받은 장영철이 마이크를 잡고 장충체육관이 떠나가도록

프로레슬링은 쑈다! 폭로했다는 얘기

믿거나 말거나지

그러나, 어디 쑈가 한 두가지인가

여기저기서 그건 쑈였다 밝혀지는 게 한 두가진가

남 박통 터지는 거 되게 좋아했던 박통의 근엄한 얼굴도

그의 정치도 친애하는 국민여러분도, 실은

쑈쑈쑈였다!

그 밑에서 같이 태그매치하던 놈들까지

프로레슬링 심판처럼 으례히 반칙을 방관하던 놈들까지

회고록이다 뭐다 지금 떠들어대지 않는가

 

레슬링 쑈는 한 두사람 박통 터지면 그만이지만

정치 쑈는 온국민을 박통 터지게 하지

지금도 링 뒤에서, 첫판은 네가 알밤까기 엉덩방아찧기 풍차돌리기

둘째판은 내가 헤드록 날개꺾기 보디슬림

박통 맞대고 통박 굴리는 놈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프로레슬링은 끝나지 않았네

프로레슬링은 쑈다라는 말도 유효해

매일 매일 애꿏게 로프반동 당하는 우리 국민들

역으로 놈들을 드롭킥으로 넘어뜨린 후

새우꺾기해 버리는 날까지

원 투 쓰리, 땡땡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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