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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젝 세미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3장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 요약발제 이상하2017-07-05 21: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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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지젝 세미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3장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doc (346.5KB)지젝 세미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3장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hwp (56.5KB)

지젝 세미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3장 근본악 및 관련 문제들. 요약발제 완성본 이상하

 

이율배반 / 최영미

 

 

언젠가 난 간절히 빌었었다

이 비가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기를

 

언제부터인가 난 또 빌었다

이 비가 제발,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이기를

 

언젠가, 언제부터인가

비 오는 밤이면 난 노래를 주물렀다

형벌의 낮과 밤을 반죽해 은유의 가락을 뽑았다

 

이 비가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기를......

이 비가 제발,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였으면......

 

1.칸트를 벤섬과 더불어

정신분석 이론은 누락된 대상을 대신하면서 현실속의 틈새를 메우는 용어, 누락된 표상의 기표적 대리물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초월적 구성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이와 유사하다. 칸트의 기본 전제는, 우리를 그 일부로서 포함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총체로서의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칸트의 인식할 수 없는 물 자체?)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우리의 이성은 이율배반에 얽혀든다. 핵심은 이 우주라는 환영이 우리가 사실주의적으로폐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우리의 경험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현실의 틈새들을 메우는 종이(초월적 이념)가 없다면, 현실 그 자체는 붕괴된다. 163-164

필연적인 초월적 가상에 관한 칸트의 이론과 라캉의 반복적 참조점 가운데 하나였던 벤섬의 허구 이론사이에는 상동적인 연계가 있다. 칸트=벤섬은 칸트=사드라는 등식과 더불어, 가장 숭고한 것과 가장 저열한 것의 일치를 단언하는 헤겔적 무한판단(정신은 뼈다)의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다. 165

벤섬은 선을 그 자체가 아닌 도구적 정의로, 어떤 것이 좋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유용하다고, 그것이 어떤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확언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하여 칸트적 혁명을 위한 문이 열렸는데, 그것의 출발점은 바로 가능한 경험의 장 내에서 선 그 자체를 정의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따라서 남아있는 가능성 전부는 선을 형식의 층위에서, 우리 의지의 보편적 형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166

그렇지만 문제는 곧 복잡해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바로 어떻게 사물들이 그토록 뒤얽히는가 하는 것이다. 핵심 계기는 벤섬이 두 종류의 허구-허구적 존재자(계약 의무 법인)와 상상적 존재자(황금산 유니콘)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찾아왔다. 168

이런 식으로 그는 상징계와 상상계라는 라캉적 구분을 용어 이전에 만들어냈다. 이러한 곤궁들과 유사한 곤궁들로 인해 결국 벤섬은 허구들이 언어(담화) 그 자체에 내속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69

현실에서 허구를 빼는 순간, 현실 그 자체가 그 담화적-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한다. 이 허구들에 대한 칸트적 명칭은 초월적 이념들인데, 이 자연스러운 불가피한 환영은 구성적이지 않으며 단지 규제적이다.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경고처럼, 이 환영은 이성에 부착되어 그 기만성을 폭로하여도 지속된다. 171

2,환영과 현실

라캉이 현실의 불안정한 지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현실의 환상-틀로서 바로 이 초월적 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현실현실성 검사를 통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틀은 환각적 환상의 잔여물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의 지위는 실로 불안정하다. 172-173

문제는 우리의 가장 평범한 현실 경험이 그 일관성을 위해서 규제적 이념들, 가능한 경험 너머에 이르는 원칙들의 최소치 몫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짜 선택은 소박한 실재론과 망상적 유령 보기 사이의 선택이 아닌데, 왜냐하면 어떤 지점에서 그 둘은 동일한 편에 있기 때문이다. 174 (라캉의 현실-환상)

이념은 예지적 사물이 가상Schein, 구성된 현상적 현실속에 그 어떤 자리도 없는 환영과 역설적으로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지점을 지칭한다. 동일한 근본적 애매성이 라캉적 실재를 규정한다. (???) 175

3.당신을 문 개의 털

그러므로 상징적 허구들의 근본적 역설은 동일한 한 번의 조치로 그것들이 현실의 상실을 초래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라캉이 에크리에서 말하듯이, 말은 말이 초래한 빚을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에 의해 열리는 빚, “상처란 철학적으로 진부한 것이며, 적어도 헤겔부터는 계속해서 그렇다. 말은 사물의 (상징적) 살해를 함축한다. 176

그렇지만 이 언어의 상처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것의 핵심적 차원을 놓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 Fort-Da(가버린-여기에)라는 기표적 쌍에서, 상징화를 통해 불안은 사라지며, 아이는 상황을 지배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사물들이 말로 대체된다.” 즉 어머니가 어머니의 기표적 대리물(실패), 더 정확히는 어머니의 떠남과 돌아옴이 실패가 시야에서 사라짐과 돌아옴으로 대체된다. 177

라캉은 좀더 근본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실패는 어머니의 대역을 한다기보다는 주체 자신의 희생된 부분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사물의 상실을 보상하는 대상은 나 자신의 일부이다. 상징화는 어머니가 나를 위한 직접적 대상이기를 멈춘다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이유에서 나 자신도 그녀를 위한 대상이기를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기동일성의 축은 충만한 실체적 정념적 주체에서 빗금쳐진 텅 빈 주체로 이동한다. 177-178

후근대적 통념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가 자신의 빚을 전부 청산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관념이 헤겔적 Aufhebung(“지양”:부정-보전-고양)이라는 환영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 질서의 출현은 결코 의미에 의해 전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틈새를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의미는 결코 전부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끝이 잘려 있으며, -의미의 얼룩에 의해 표식되어 있다. 179

하지만 통상적인 의견과는 달리, 라캉이(그리고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다. 추상적 접근에서 문제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상태의 필연적인 구성성분이다. “문제들에 앞서는 그 어떤 문제없는무구한 상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180

따라서 변증법적 역설은 제안된 해결책이 문제의 일부일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의 진짜 원인을 재생산할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역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추상적이고 제한된 관점에서는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 자체의 해결책이라는 것 말이다. 181 (신자유주의, 예수 등의 변증법적 사례)

바로 이와같은 것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는 공허한 말과 충만한 말의 관계를 파악해야만 한다. 여기서 라캉의 이론에 대한 전형적 오해와 조우하나, 라캉의 요점은 인간의 말이 가장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암호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공허한 말만이, 그것의 바로 그 공허함을 통해서, “충만한 말을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바, 주체는 바로 그 충만한 말 속에서 자신의 언표행위 자리를 표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찌른 그 창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실체적 내용을 나 자신의 것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일체의 실정적 내용도 없는 주체성의 순수한 텅 빈 형식으로 확립해야만 한다. 182-184 (언어폭력에 상처입은 마음은 어떻게? 자존감을 내려놓음???)

 

 

 

4.근본악

상징적 상처가 악의 궁극적 패러다임인 한에서, 동일한 것이 악과 선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칸트는 경험적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인간 본성의 악을 향한 성향으로서 근본악을 파악한다. 그렇지만 악마적인 악의 가설을 거부함으로써 칸트는 근본악의 궁극적인 역설로부터, 내용상 하지만 윤리적 행위의 형식적 기준을 철저히 충족시키는 저 행위들의 섬뜩한 영역으로부터 뒷걸음친다. 184-185

악은 죽음충동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인 삶의 회로를 탈선시키는 어떤 사물에의 고착에 대한 또다른 이름이다. 악은 자연적관계의 근본적 역전을 도입한다. 칸트와 셀링의 불충분한 표준적 공식에 비해, 헤겔은 인간-되기라는 바로 그 행위,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을 죄로의 타락으로 파악하기에 좀 더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187 (라고 지젝은 주장한다. 칸트와 헤겔의 윤리 차이?)

상처는 악의 자리가 선한내용에 의해 채워질 때 치유된다. 그리하여 사물의”(즉 근본악의) 가면“(라캉)으로서의 선은 존재론적으로 이차적이며, 잃어버린 균형을 재확립하려는 보충적 시도이다. 사회적 영역에서 그것의 궁극적 패러다임은 사회를 조화롭고 유기적으로 재구성하려는 협조주의적 노력이다. 토머스 모어의 동기가 명백히 선한 것이라고 해도, 그의 행위의 형식적 구조는 근본적으로 악한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공동체의 선을 무시하는 근본적 도전의 행위였다. (예수의 경우도.) 188-189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주체성의 바로 그 개념에 속한다는 테제는 일종의 자기반성적 역전을 통해 근본화되어야 한다:주체의 지위 그 자체는 악이다. 즉 우리가 인간적인한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악을 선택한 것이다. 초기 라캉의 헤겔적인 자세는 이 부정의 부정 논리를 체현하는 수사법들에 의해-자아의 성숙에 대해 자아의 본질은 좌절이라는 라캉의 응답에 의해서-훨씬 더 확증된다. 190

칸트가 근본악에 대한 그의 테제와 결과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주저하는 이유엔 실재적 대립의 논리가 있으며, 세 가지 형태와 네 번째 악마적인 악의 가능성이 있다. 자코뱅적인 덕의 독재가 이 악마적 악의 경우였으며, 칸트 철학의 매개변수 내에서 악마적 악은 선과 구별 불가능하다. 192-195

 

5.파이프들과 파이프들이 있다.

이 악마적인 악, 칸트의 비사고는 엄밀한 의미에서 표상불가능하다. 그것은 표상의 논리의 붕괴를, 표상의 장과 표상불가능한 사물 간의 근본적 통약불가능성을 함축한다. 197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보바리 부인과 연의 첫 조우의 묘사 중 맨 살이 드러난 팔이 잠시 커튼 틈으로 빠져나왔다는 언급, 이 장면은 마치 푸코의 테제를 증명하기 위한 장면인 듯하다. 성을 은폐한다는 공식적기능을 가진 바로 그 말이 실제로는 그것의 비밀의 외양을 산출한다는 성의 역사의 테제. 정신분석의 용어를 이용해서 다시 말해보자면, “억압된내용은 억압의 효과이다. 198

핵심적 요점은 재현의 장과 성 사이의 이러한 통약 불가능성을 이전 시대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성의 묘사에 대한 검열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 리얼리즘은 커튼 뒤의이 현실의 존재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즉 은폐의 바로 그 제스처가 은폐한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창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서 시작된다. 예시로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나 망원경 등이 존재한다. 망원경 그림을 라캉적으로 볼 때, 창틀은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틀이며, 반면에 틈새를 통해 우리는 불가능한실재, 사물 자체에 대한 통찰insight을 얻는다. 199-201

상징화된 현실과 실재의 잉여 사이의 이러한 분열은 상징계와 실재가 뒤얽히는 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매트릭스를 나타낼 뿐이다. 이 기본 매트릭스가 생성하는 변종들을 계속 열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모든 역설들 배후에서 동일한 매트릭스가 출현하는지를, 궁극적으로 칸트적인 동일한 기본적 균열이 출현하는 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현실은 결코 그 총체성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현실의 한가운데에는, 기괴한 환영들에 의해 메워지는 바, 언제나 공백이 입을 벌리고 있다. 204

 

6.-상호주체적 타자

그리하여 반쯤 열린 창문의 틈새를 통해 일별될 수 있는 침투불가능한 검정은 정상적 상호주체성의 타자에 선행하는 타자의 섬뜩한 환영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놓는다. 히치콕의 프렌즈에서 머물 곳이 필요하니?” 라는 이 목소리는 현실이 중단되면서 출현하는 대상a 에 다름 아니며, 뱁즈 뒤에서 나타나는 인물은 관람자들에게 이 목소리와의 관계에서 보충적인 무언가로 경험된다. 205-206

칸트의 말대로, 사물 자체에 대한 그 어떤 실정적 앎도 없다. 그것의 자리를 지칭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수 있을 뿐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반쯤 열린 문의 균열, 이 균열 속에 응시를 위치시킴으로써 히치콕은 헤겔-라캉적인 방식으로 마그리트를 보충한다. “외양 너머에 그 어떤 사물 자체도 없다면, 응시가 있다.” 207

주체들이 공유된 현실 내부에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상호주체성의 장은 부성적 은유에 의해 지탱되는 반면에, 두 응시를 유인하는 부재하는 제3의 점에 대한 참조는 두 상대방 가운데 한 명(배경에 있는 인물)의 지위를 향유의 실재의 숭고한 체현물로 변화시킨다. 208 (바바리 노출? 무인도 미녀섹스?)

분석적 상황 그 자체, 즉 분석가와 분석자의 관계 또한 궁극적으로 주체가 그의 그림자 타자와, 자신 안에 있는 그 외화된 대상과 맺는 이 선-상호주체적 관계로의 일종의 회귀를 상정하지 않는가? 분석가가 분석자 뒤에 앉고 분석자는 소파에 누워서 자신의 정면에 있는 공백을 응시하여 분석이 시작될 때, 분석자의 대상 a로서 분석가가 위치되는 것 아닌가? 209

 

 

 

7.무한 판단의 대상

이 지점에서 칸트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의 철학에서 이 균열은, 그러한 기괴한 환영들이 출현할 수 있는 이 공간은, 부정 판단(영혼은 사멸적이지 않다)과 무한 판단(영혼은 비사물적이다)의 구분에 의해 열린다. 이것은 대립과/이나 부정의 상이한 양태를 구분하려는 칸트의 시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210

첫째로, 실재적 대립. 두 개의 긍정적 힘, 즉 하나의 힘과 상보적 대항력 사이의 길항. 이 둘은 서로를 상쇄한다. 이 대립은 현실 이라는 바로 그 개념에 대해 구성적인 특질을 지칭한다는 정확한 의미에서 실재적이다. 어떤 긍정적 힘의 대립항은 무, 부재, 이 긍정적 힘의 결여가 아니라 긍정적인 존재론적 현실성을 독자적으로 소유하는 또 다른 힘이다. 둘째, 이 실재적 대립은 사각의 원이나 나무로 된 철 같은, 부정적 무를 발생시키는, 개념이 결여된 공허한 대상-논리적 모순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211

세 번째 유형의 부정, 이율배반은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적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직관될 수 없는, 즉 우리의 경험 대상으로서 상상될 수 없는 대상들로, (직관된) 대상을 결여하고 있는 공허한 개념들로 존재한다. 상상하는 것은 쉬우나 이 개념을 실정적인 직관된 내용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한 이것을 칸트는 사고사물(ens rationis)이라고 불렀다. 212 (총체성에 있어서 우주 영혼 신)

모순과 이율배반의 이러한 차이는, 즉 모순으로 환원 불가능한 이율배반의 그 특수한 지위는 초월적 차원을 작동시킨다. 모순의 영 은 논리적이나 이율배반의 영 은 초월적이다. 213

수학적 이율배반들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은 매우 대담하다. 그는 세계관(세계 직관)의 전통 일체와 단절한다. 세계(우주)는 직관에 결코 주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사물이라는 개념은 우리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어떤 지식도 소유할 수 없는 대상들에 관계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할 수 없지만 사고해야만 한다. 214

순수이성비판 2판에서 예지체는 적극적 의미에서 비감성적 직관의 객관이다.(부정판단) 소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의 감성적 직관의 객관이 아닌 한에서, 하나의 사물이다(무한판단). “사멸적이지 않다”(부정판단) 비사멸적이다”(무한판단)의 차이 또한 여기에서 있다. 전자의 경우 단순한 부정인 반면에 후자의 경우 부정적 술어가 긍정된다. 칸트가 초월적 가상이라 부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한 판단으로 부정 판단으로 ()독해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215-216

칸트에 대한 헤겔적 결론은, 한계가 한계 너머에 있는 그 무어에 앞서는 것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사물 자체라는 개념은 너무 물화된상태로 남아있다. 헤겔의 입장은 초감성적인 것은 외양으로서의 외양이라고 진술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사물 자체는 현상 그 자체의 한계다 라는 것이다. 217

뱀파이어 및 여타의 산주검Undead” 들이 통상 사물들로 지칭된다는 사실은 온전한 칸트적 의미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즉 뱀파이어는 우리처럼 보이고 행동하는 사물이지만 우리 중 한 명은 아니다. 요컨대 뱀파이어와 살아있는 사람의 차이는 무한 판단과 부정 판단의 차이이다. 이 무한 판단의 논리가 칸트의 철학적 혁명 전체를 간략하게 포함한다. 그것은 실재적인 사물의 영역, 선과 근본악이 겹치는 곳이라서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했던 영역과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현실을 구별해낸다. 219

 

 

 

 

8.아테와 그 너머

악당 란초에 나오는 불가사의한 --은 동일한 금지된 장소이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결정적 대면들이 일상적 현실을 그녀가 통치하는 계곡과 분리시키는 경계를 표시하는 협소한 산길에서-다시 말해서, 현실과 환상의 다른 장소사이의 바로 그 통로에서-발생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의 엄밀한 형식적 동형성-뫼비우스의 띠 구조이다. 222

행복으로의 반전이 임박할 때 우리가 접근하게 되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하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경계선은 라캉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관련해 그리스어 아테ate를 통해 가리키려고 하는 그 무엇이다. 이 용어에는 근본적 애매성이 있다. 아테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한계, 건드리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한계를 지칭하는 동시에 그것 너머의 공간을 지칭한다. 핵심은 공간에 대해 한계가 우선한다. 이 환상-공간은 이차적으로, 한계를 실체화하며, 불가능한 한계를 금지된 자리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반전의 논리는 실재에서 상징계로의 변환의 논리이다. 224-225 (근본적 예로 근친상간 금지)

또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동일한 역설적 반전이 식민주의 억압 조건 하에서의 민족적 부활을 특징짓는다. 즉 오로지 식민적 억압(금지)이야말로 저항을 선동하고, 그리하여 민족적 부활을 가능하게 한다. 이 실천가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억압받은 선조들의 옛 꿈을 실현한다는 환영의 먹잇감이 된다.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근본적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여기 있다. 226-227 (우리 아닌 타자의 꿈)

장자와 나비 이야기처럼, 후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선조들의 꿈이 실현된 것임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프로이트의 이르마의 주사 꿈에서, 끔찍한 것이 기적적으로 일종의 평정으로 바뀐다. 이를 라캉은 트릴메탈아민 화학식이 예시하는 바, 정확히 상징적 기능이 작동하게 됨으로 규정한다. 주체는 상징적 행복 안에서 자유롭게 부유한다. 229

현실은 상징적 행복의 어떤 환상틀이 실재의 심연의 들여다봄을 차단할 때 안정화된다. 환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일종의 꿈같은 거미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이라 불리는 그 무엇을 구성한다. 우리는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른다. 무언가-외상의 실재-가 억압되어야 한다. 230

 

 

 

9.상징적 지복

이 지점에서 형식적 상동성을 한발 더 밀고 나가서, 전율이 상징적 지복으로 이처럼 반전되는 것은 또한 헤겔적 삼항조의 매트릭스를 획득하지 않는가? 우리는 존재에 관해 그 어떤 규정적인 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그 어떤 술어도 귀속시킬 수 없으며, 그리하여 존재의 진리로서의 무는 이 궁지의 실정화, 실체화로서 기능한다. 231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초적인 라캉적 삼항조인 필요-요구-욕망이 헤겔적 부정의 부정의 내적 논리를 얼마나 밀접하게 따르고 있는지를 간과한다. 타자는 기원적으로,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우리에게 만족의 대상을 제공하거나 박탈하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그/녀로서 경험된다. 타자의 이러한 중개적 역할은 우리가 대상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의 전 경제를 전복한다. 그렇지만 요구의 진정한 목적은 타자의 사랑인데, 그 타자는 그 대상을 조달할 역할을 가지고 있다. “요구는 수여되는 모든 것의 특수성을, 사랑의 증거로 변형함으로써, 지양한다.” 232-233

주체가 요청된 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요구는 완전히 만족되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진정한 목적은, 그 직접적 특수성에 있어서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234

욕망은 요구 안에 있는, 필요로 환원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요구에서 필요를 빼면 욕망을 얻는다. 여기서 라캉은 단순히 부정의 부정이 아닌 반전을 말하는데, 이러한 반전은 필요에서 요구로의 이행을 통해 무화된 대상으로의 회귀를 함축하는 한에서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은 필요로 상실된-지양된 대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상-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을 생산한다. 이 외설적 대상은 욕구가 필요로 환원될 수 없게 해주는 차원을 체현한다. 235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요구에서 욕망으로의 전환에서 결과하는(?) “진정의 효과이다. 욕망의 대상-원인의 출현은 필요와 요구 사이의 적대적 곤궁을 해소한다. 이와 같은 상징적 진정을 통한 적대적 곤궁의 해소는 또한 테제-반테제-종합이라는 악명높은 삼항조가 기능하는 기본 매트릭스를 제공한다. 그것의 상상적 출발점은 대립극들의 상보적 관계이다. 그로부터 그것들의 적대의 실재가 분출한다. 235-236

반테제테제가 스스로를 구체화하려 할 때, 즉 그 개념적 내용을 현실화하려 할 때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다시말해 테제는 그 자체로 추상적이다. 그것은 반테제를 통한 매개를 전제한다. 그렇지만 이는 종합이 상호완성이나 상보적 관계를 지칭한다는 것을 결코 함축하지 않는다. 헤겔이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상보적 관계의 그 거짓 외양을 전복한다. 한 극단의 위치는 단순히 그것의 타자의 부정인 것이 아니다. 헤겔의 요점은 오히려 첫 극단이, 타자로부터 추상되어 있는 바로 그 속에서, 이 타자 그 자체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를 순수함 속에서, 무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그 순간 무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36-237

차이가 그 자체로서 승인되는 것은 오로지 종합과 더불어서다. 따라서 헤겔적 삼항조의 합리적 핵심은 상상적 대립들의 상징화에 있다. ... 외적 부정성에서 절대적 부정성으로의 이러한 역전은 대상이 더 이상 부정되고 파괴되고 폐기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 실정적현존은 부정성이 실존을 취하는 형식으로서 기능하니까 말이다. 상징화된대상은 바로 그 현존이 부재를 체현하는대상이다. 그것은 체현된 부재이다. 240 .

 

 

 

맺는 시.

 

육식주의자 / 오 은

 

 

나들이 외딴 산장에 나들이하러 왔습니다. 나들은 나들만 압니다. 산장 앞에서, 나들은 외따롭습니다. 언제나 나들의 입만 중요합니다. 식성이 비슷하다는 사실만이 단독자인 나를 나들로 한데 묶어줍니다. 공기나 좋으니 나들은 불쑥 고기 생각이 납니다. 사실은 매일매시매분매초 그렇습니다. 그릴을 달구며 목을 풉니다. 그릴 위에서, 스릴은 만점입니다. 그릴 위에서, 니들은 방정입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목 타는 자가 그 우물물을 냅다 마셔버리듯이, 나들은 지금 야단이 났습니다. 개떡과 찰떡은 입에서 만나 비로소 개찰구가 됩니다. 이것만 목에 넘기면 이제 저것들을 거머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 동물이 동물 좋아하는 데에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당깁니다. 이상하게 먹으면 먹을수록 더 당깁니다.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시대가 오면 어떡할 거냐고요? 싸워야지요. 싸워서 이겨야지요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요. 목이 빠진 자가 하염없이 기다리고 목이 아직 붙어있는 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 나들은 지금 갈급이 났습니다. 나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적색 섬유와 백색 섬유뿐입니다. 회쳐먹다가 회쳐지느니 나들은 차라리 고기를 해치우겠습니다. 모름지기 붉은 색을 먹어야 피가 돈다고 하잖아요. 산장의 저녁에 붉은 해가 하얗게 떨어집니다. 나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질 겁니다. 호모에렉투스로서, 나들은 불을 이용할 겁니다. 호모 파베르로서, 나들은 도구를 다룰 겁니다. 호모사피엔스로서, 나들은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할 겁니다. 호모루덴스로서, 나들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요리할 수 있을지 생각할 겁니다. 호모로퀜스로서 나들은 입을 모아 맛있다고 쾌재를 부를 겁니다. 마블링처럼 서로 얼싸안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익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글지글은 나들을 현혹하는 의성어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방팔방에서 배를 자극합니다. 몸 둘 바는 알겠는데 맘 둘 바를 모르겠어요. 너무 많은 고기들이 있다니까요! 너무 많은 부위들이 서로 잘났다며 너무나 많은 색깔들과 너무너무 많은 육질들을 선보이고 있다니까요! 확실히 만유인력의 법칙은 동물들끼리만 적용되는 모양입니다. 목이 붙어 있어도 배가 고프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배가 고프고 심지어 목이 날아가도 나들은 배고플 겁니다. 나들은 시방 굶주렸어요. 시종 목말랐어요. 배 채우기 위해 애를 쓰다가 다급해지면 애를 먹을 수도 있어요. 마침내 애는 펄펄 끓고 나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겁니다. 그릴 위의 고기는 대체 언제 또 웅크릴까요? 배가 오프면 이처럼 참을성이 바닥납니다. 머릿속으로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욕의 가짓수를 헤아리다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욕이 나왔습니다. 그 서슬에 놀란 고기가 핏기와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눈알과 손끝이 사정없이 바빠집니다. 나들은 재빨리 나들의 중요한 입들로 고깃점을, 고깃덩이를 가져갑니다. 고깃고깃 구겨져 있던 자존심이 비로소 펴지는 순간입니다. 나들 중 하나가 마치 자기가 나라도 된 것처럼 호기롭게 외칩니다. 복이 분자째 굴러 들어왔군요! 나처럼 복분자주를 마십니다. 수세에 몰리면 헝클어진 수세미가 됩시다. 아름다워지려면 몸을 박박 문지릅시다. 고기가 된 나들은 자발적으로 나들의 오장육부를 보존합니다. 목 막힌 사람은 말할 수 없고 무릇 목을 건 사람이 무릎 쓰듯, 나들은 지금 사달이 났습니다. 좀체 줄지 않는 상추더미가 상처받은 듯 수군거립니다. 인간들이란, 어찌 그리도 인간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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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과 근본악을 받아들이고,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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