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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분배냐 인정이냐 3부2017-12-08 19: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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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X사회권 세미나 발제문_20171208_임당

<분배냐 인정이냐>

낸시 프레이저, 

3부. 과도한 왜곡 : 악셀 호네트에 대한 응답

오늘날 비판이론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문화적 전회”의 결합으로 인해 정치경제학적 비판은 억압되고, 문화와 자본주의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지구화로 인해 문화적 동질성의 가정은 폐기되었고, 복잡한 가치 지형들이 펼쳐졌다. 따라서 단일한 기획도 불가한 상황에서 상충되는 요구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인정이라는 범주를 주요한 위치에 두고 논쟁을 시작했다. 인정 범주를 활용할 때, 드러난 투쟁들의 입장을 비판할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의 지위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으며, 요구들을 판단할 정의의 기준또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상이한 방식으로 인정의 위상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네트는 인정 일원론을, 프레이저는 인정을 제한된 차원에서 다루며, 분배와 인정이라는 “관점적 이원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접근 중 어떤 것이 더 선호될까?

현재 비판이론의 진영에서 논쟁의 중심은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엮여 있다. 간단히 정리해 1) 경험적 준거점으로서 비판이론은 어떻게 경험적 세계에 토대를 두면서 동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2) 문화적 전회를 맞이한 현대 사회의 국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3) 지구화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규범적 기준을 주장하며 정당화 할 것인가? 이렇게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상이한 대답이 프레이저와 호네트의 견해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프레이저는 이에 더하여 호네트의 이론이 가지는 문제점들 또한 입증하며 자신의 견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1장. 비판이론에서 경험의 지위 : 정치사회학을 도덕심리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반론

먼저 “경험적 준거점”에 관해 논의 해 보자.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둘 다 내재와 초월의 독특한 변증법이라는 비판이론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상황에 내재한 긴장과 가능성을 들추어냄으로써 영향력을 가지는 비판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의 주체와 소통할 수 있는 비판적 언어를 발전시켜 급진적 잠재력을 추동시키고자 함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비판이론의 목표는 내재와 초월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는 방식은 프레이저와 호네트 사이를 갈라놓는다.

호네트는 자신의 인정 일원론의 토대를 전정치적인 고통에 관한 도덕심리학에 두고 있다. 경험적 준거점을 현실에서 찾을 필요는 있지만 규범성이 바로 현실운동으로 등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정치화 이전의 주체의 일상적 고통이다.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를 근본적인 인정요구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이를 세 차원에서 비판한다. 첫 번째로, 전정치적 경험에 대한 호네트의 믿음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일상적인 모든 불만이 인정받지 못함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에 합당하지 않은 다양한 불만의 예시(301)를 들면서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항목은 공정한 대우에 대한 기대와 같이 매우 일반적일 필요가 있다고 프레이저는 말한다. 호네트의 방법을 따를 경우, 사회적 불만들은 정치화되기보다는 내면화되어 자아를 향할 위험이 있어 인정 개념의 파멸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프레이저는 두 번째로, 호네트가 전정치적인 고통을 비판이론의 특권적인 준거점으로 설정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전정치적인 고통은 정말로 규범적 판단의 공적인 어휘들과 무관한가?  개념적으로 볼 때도 규범적 담론 없이 도덕적 경험에 도달한다는 것은 비정합적이다. 규범적인 측면에서도 전정치적인 경험이 과연 사회운동의 요구들보다 나은 준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기서 프레이저는 호네트가 자신을 비판했던 지점, 사회운동의 요구를 바로 비판이론과 등치시키려 한다는 지적에 대해 응답한다. 자신 또한 사회 운동 자체를 비판이론의 토대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사회 현실로 진입하는 다수의 입구를 설정해, 어느 것에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것들 각각을 서로에 비추어 개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교차 검토)

그러나 이러한 교차 검토를 호네트는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세 번째 비판이다. 이미 설정되어 있는 도덕심리학에 부여된 우선성이 비판적 과업에 적용된다. 모든 정치적 요구들은 인정의 요구로 단지 번역될 뿐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준 선험적인 도덕심리학을 설립함으로써 역사의 경로를 사전에 예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결국 호네트는 내재성의 계기를 초월성의 계기에 종속시키게 됨으로써 비판이론을 설정하는데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 프레이저의 결론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것은 주관적 경험이 아닌 탈중심화된 사회 비판의 담론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논쟁들과 관련된 사회 정의에 관한 대중적 패러다임을 주목하고 비판을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킴으로서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중요한 대중적 패러다임은 인정과 분배이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사회이론적으로는 분배와 인정이 사회적 통합과 종속의 형태들에 상응하는지 보여주고, 이들간의 뒤얽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도덕철학의 검토에서는 분배와 인정 양자가 모두 규범적 타당성을 가진 원칙을 산출할 수 있는지가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정의에 관한 오늘날의 패러다임은 오도된 것도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논쟁 문법의 재구성을 통해 현재 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을 지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의 방법은 이렇게 다양한 담론 연구 차원을 열게 됨으로써, 각각의 연구들이 서로 교차 검토 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를 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이론을 통해 그것이 경험되는 방식과 무관한 불의의 유형, 원인, 처방을 자유롭게 이해하고, 도덕철학에서 규범들을 확인하고, 정치사회학에서 지배적인 규범적 문법들을 분석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다중심적인 대안은 내재성과 초월성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사회적 세계에 내재적인 패러다임이지만, 역사적인 변화에 열려 있음으로써 새로운 문제에 대면할 수 있는 초월성을 가짐으로써 말이다. 이를테면 동등한 참여의 개념과 같은 것들 말이다. 

2장. 사회이론에서의 문화적 전회 :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 질서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반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비판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이다. 지구적 자본주의는 문화의 지위를 크게 부상시켰다. 그 결과 차이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차이를 정치화하는 흐름도 고무되었다. 맑스주의마저 이러한 흐름에 밀려났다. 비판이론은 이제 문화를 어떤방식으로 이해할지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모두 문화가 나름의 사회적 질서를 부과하는 수단이며, 지배의 매체로 기능하며, 인정 개념을 통해 문화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역시 그 방식은 상이하다. 호네트는 사회를 인정의 망으로 이해한다. 사회이론의 과제는 특정한 사회에서 인정에 대한 기대들이 제도화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랑과 권리, 노동의 세 가지의 인정 영역이 있으며, 각 영역들에서 발생하는 무시의 문제가 갈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네트의 방법은 모든 사회를 인정질서로만 분석함으로써 분석을 단순화 시킨다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거의 모든 사회는 한 가지 이상의 사회 통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질서는 문화적 도식에 의해 직접 지배되지 않는다. 시장 논리는 문화적 논리와 복잡하게 얽혀있다. 따라서 적절한 접근은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동학과 더불어 그것이 신분질서, 분배 체계 등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호네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호네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의 역할을 너무 과장하고 있는 셈이다. 프레이저는 더 나은 접근법으로 자신의 관점적 이원론을 제안한다. 인정과 분배를 포함하는 이차원적 틀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상호 환원 불가능하면서도 서로 뒤얽혀 있는 두 가지 구별되는 질서차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차원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경제체제에 종속된 계급적 계층화와 문화적 가치에서 기인한 신분 위계의 두 종속 질서를 포괄하면서 말이다. 이 두 질서는 인과적으로는 상호작용하지만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분석적인 차원에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분석의 결과로 사회의 특정한 구성원들이 다른사람과 동등한 참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프레이저는 이로부터 동등성의 원칙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등성을 방해하는 규범들을 공격 목표를 삼는 것이 사회적 투쟁의 목표라는 점을 주장한다.

3장. 자유주의적 평등 : 정의를 훼손되지 않은 정체성의 윤리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한 반론

비판이론의 정의관과 제반 요구들을 평가하는 비판이론의 도덕적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것은 해방적인 인정투쟁이며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한가? 그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프레이저는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비동질적인 현재의 문화적 상황을 주목한다. 다원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상이한 가치는 상충하는 목표를 낳는다.  비판이론은 상이한 가치 지평을 가로지르는 비분파적인 정의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정의론은 충분히 일반적으로 명확해야만 한다.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이에 도달하기 위해 자유주의 전통의 핵심 개념들인 인간의 평등한 자율성과 도덕적 가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둘은 갈라진다. 호네트는 좋은 삶은 곧 인간적 번영이라는 개념에 정초해 정의론을 확립한다. 정의로운 사회의 개인은 “훼손되지 않은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사랑과 배려를 통한 자신감, 법적 권리에 기초한 자존감, 자기 자신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평가에 근거한 자부심이 그것이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정의 요구는 훼손되지 않은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인정 요구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비분파성과 명확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비분파적인 이론이 되기 위해서 호네트는 인간적 번영이 실체적 내용을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해야 한다. 만약 실체적 내용이 존재할 경우, 그것은 결과적으로 분파적인 내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규범적 범주들은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배려, 존중, 존경이 모든 삶에 대한 형식적 요구들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그의 인정 원칙들이 충분한 명확성을 상실하게 된다. (337-340참조)

따라서 호네트의 세 원리 중 어느 것도 두 가지 요구들을 동시에 충족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이 세 원리들을 결합할 때 부가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서로 상충하는 지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업적 규범이 개인의 성과를 중시하는 반면, 존중 규범은 사회적 연대성을 우선시 하는 사례가 바로 그러한 난점이다. 결과적으로 호네트는 실행 불가능한 정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판이론의 비분파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질적 내용을 제거하게 된 형식적 정의는 규범적 힘들마저 제거해 불명확성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실행 가능한 접근법은 무엇인가? 프레이저는 동등한 참여를 핵심 원리로 하는 정의론에서 이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원칙 하에서는 좋은 삶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도 양립 가능하다. 타자들과 동등한 자율성을 보장받는 정의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제도적 예비조건으로서 경제적 자원과 사회적 지위의 보장 또한 요구된다. 이러한 동등한 참여의 원칙은 동등한 자율성에 대한 급진민주주의적 해석을 제공한다. 완전한 사회적 참여를 방해하는 경제적 장해물을 제거하기 위한 분배 요구를 다룰 수 있는 토대로 활용됨으로써 말이다. 때문에 동등성의 기준은 이중적인 셈이다. 그리고 동등성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공적 토론을 통해, 민주적 과정을 통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결국 동등한 참여로서의 정의는 두터운 의무론적 자유주의라는 도덕철학의 제3의 양식을 예시하고 있다. 

이러한 두터운 의무론적 자유주의에 대해 급진민주주의적 관점을 정당화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개념적인 차원에서 동등한 자율성은 그것이 적합하게 이해되는 경우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실질적 자유를 수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동등한 참여가 자유주의적 평등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온 폭넓고 다층적인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논증을 통해, 동등한 자율성을 동등한 참여로 해석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이상들이 가지는 해방적 힘을 심화시키면서 그것의 범위와 내용을 확장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 관한 비판으론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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