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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발제문_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세미나_『재생산에 대하여』(알튀세르)_41~902017-08-09 1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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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생산관계 그리고 계급투쟁

-재생산에 대하여(알튀세르), 1장과 2(41~90)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세미나_ 발제_ 20170803_이미라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_ 41~52


알튀세르는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의 재생산을 보장해 주는 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제1장을 철학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에 관한 설명을 철학 문제의 범주 안에 놓아두려고 한다.(29) 알튀세르가 이렇게 한 이유는 독자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철학이 현실적으로 혁명의 무기가 되는 것인지”(30)를 이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알튀세르에게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재생산 문제는 결국 맑스-레닌주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커다란 우회”(29)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민중의 표상에는 서로 모순적인 수동성의 요소”(42)능동성의 요소(43)가 있고, 이에 따라 철학도 각 요소에 상응하는 두 개의 철학이 있게 된다. 수동성의 요소에 상응하는 체념적인 철학”(43)능동적인 철학”(43)이 그것이다. 전자는 비판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 철학이자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철학형태로서, 알튀세르는 이를 상식의 철학”(43)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세계의 질서에 따르는 자의 능동적 철학”(43)은 이성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인식하고, 마치 역사적 필연성을 알고”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투쟁”(44)하는 경우처럼, 필연성의 질서에 따라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자의 철학이다. 알튀세르는 이 철학을 대문자 철학(Philosophie)”(44)이라고 부른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대문자 철학이 존재하고 변모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 사회적 계급들의 존재과학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계급 투쟁의 주목할만한 변화와 과학사의 커다란 사건이 만나 서로 강화되어 철학에서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48) 가령, 맑스-레닌주의 철학, 즉 변증법적 유물론은, 맑스가 확립한 역사과학과 노동운동의 탄생과 발전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사유 배경으로 삼아 도래한 것이다.(49) 이렇게 알튀세르는 계급과 국가의 관계과학사에서의 중요한 발견이라는 조건과 철학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보고, “이 관계를 명료히 밝히기 위해” “긴 우회를 하려고 한다.(52) 그리고 그 긴 우회의 시작으로서 사회란 무엇인가?”(52)라는 질문을 던진다.

 

2장 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_ 53~90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곧바로 알튀세르는,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 개념을 버린다. 그 대신 사회구성체 개념을 등장시키는 한편 사회구성체 개념의 작동 과정에 생산양식 개념을 개입시킨다. 알튀세르는 다음의 네 개의 고전적 명제를 상기시키고 나서, 그 명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사회구성체라는 개념들의 이론 체계”(54)에 생산양식 개념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째로, “모든 사회구성체는 하나의 지배적 생산 양식에 종속되어 있다”(55)는 명제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명제는, 한편으로는 모든 사회 공동체에는 한 가지 이상의 생산양식이 존재한다다원성의 의미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전체 생산 양식들 가운데 하나가 지배적이라면 나머지는 피지배적이라는 모순적인 복잡성”(56)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둘째로, 생산 양식은 두 구성 요소,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통일체라는 명제이다.(56) 이와 관련하여 알튀세르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매우 상이한 두 유형의 통일체를 구분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나의 생산 양식 내에있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통일체지배적인 생산 양식과 피지배적인 생산 양식들 사이에 있는 “‘통일체’”(57)가 그것이다. 셋째로, “생산력/생산관계라는 통일체 속에서생산양식을 고찰할 때, “이 통일체는 생산력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는 명제이다.(57)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생산력은 작용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57)니며, “생산력의 한계 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생산 관계이다.(57) 왜냐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는 생산력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지니고 있는데, 이 생산력은 오로지 생산관계 아래에서만 작용할 수 있”(57)기 때문이다. 넷째로,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와 결합시키는 매우 복잡한 또 다른 통일체에서 최후 심급으로서의 결정적인것이 경제적 하부 구조라는”(57) 명제이다. 상부구조는 ·국가·이데올로기올로기,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통일체를 의미한다.(57) 알튀세르는 네 번 째 명제를 앞서의 세 번째 명제 아래 편입시켜 다음처럼 진술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통일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최후 심급의 위치에서 결정하는 것은 하부구조이며, 이 하부 구조 내에서도, 존재하는 생산력을 토대로 그리고 이 생산력의 물질적 한계 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생산관계이다.”(58)


생산력과 생산 개념과 관련하여, 알튀세르는 노동력에 대한 생산 수단의 우위복수성이라는 논점 아래 생산력 개념을 다루고,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우위라는 논점 아래 생산관계 개념을 다룬다.


먼저, 생산력과 관련한 논점에 대하여. 생산양식은 일정한 사회구성체에서 살고 있는 남자·여자·아이들의 물질적 삶에 불가결한 물질적 재화생산하는 방식이다.(59)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생산 양식의 생산 과정을 구성하는 체계를 지닌 총체적인 노동과정이다.”(59) 하나의 생산 양식이 지닌 생산력은 노동대상과 생산도구, 그리고 노동력으로 구성되는데, “맑스는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합쳐 생산 수단이라 부른다.”(62) 또한 맑스는 노동 과정의 행위자들 전체를 노동력이라고 부른다.(62~63) “생산력= 생산수단+노동력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63)

그런데 노동 과정의 행위자들이 지닌 기술적 수준을 항상 결정하는 것은 노동 도구의 성격이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기존의 생산 수단이다.” 이를 맑스는 다음의 명제로 제시한다. “생산력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노동력이 아니라 생산수단이다.”(60) 한편, 앞서 언급한 생산양식의 다원성에 따르면, 생산력 역시 복수적인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산력 전체는 이 사회 구성체 안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생산 양식 아래 공존하는 상이한 생산 양식들의 생산력 전체”(63~64)를 말하는데, 이러한 생산력의 복수태통일체를 부여하는 것은 다른 생산 양식들을 지배하는 생산 양식의 지배이다.”(63)


다음, 생산관계와 관련한 논점에 대하여. 앞서도 언급했지만, 생산력의 작동은 정해진 생산관계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생산관계라는 통일체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66) 생산관계는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직접 생산자들일 때 이 행위자들 사이에, 아니면 직접 생산자들과 직접 생산자는 아니지만 생산에 개입하는 인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유형의 관계이다.”(66)

알튀세르에 따르면, 계급 사회에서 생산관계는 법률적 소유관계가 아니라 착취관계이다. 특히 이 착취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들에서 특수한 형태를 띤다.”(70) 알튀세르는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의 특수한원리를 생산수단 개념과 노동력 개념을 바탕으로 다음처럼 제시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러한 접촉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비소유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는 착취 관계로 전환”(72)될 수 밖에 없다. 이때 착취비밀자본가가 노동력의 사용을 사는 대가로 자유로운노동자에게 양도한 가치”, 임금에 있다.(72)


착취 관계로서의 생산 관계의 효과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해 알튀세르는 노동의 기술적 분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노동의 사회적 분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75) 노동의 사회적 분할 개념은 맑스가 제안한 사회적 노동의 분할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맑스에게 사회적 노동의 분할은 농업과 산업, 그리고 산업의 다양한 분야들처럼 상이한 여러 분야들 사이의 사회적 생산의 분할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이다. 이와 달리 알튀세르의 노동의 사회적 분할생산 과정의 내부 자체에 있는 착취관계로서의 생산 관계의 효과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이다.(75) 앞서 언급한 노동의 기술적 분할이란, ‘노동과정이 요구하는 작업의 질서나 규정 그리고 노동 행위자들의 자격의 유무에 따라 작업 과정이나 집단들이 나누어지는 것’(76)하는 용어로서, 이 용어는 착취개념를 작동시키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노동의 모든 기술적 분할이 사실은 노동의 사회적 분할이라는 점”(77)을 강조하면서 생산-착취의 작동 방법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85) 첫째로, 생산-착취가 작동될 수 있는 근거는 아무런 생산수단을 지니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존재와 그들이 기계의 자동적인 단순한 부속품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있다는 점, 둘째로, “생산-착취는 또한 노동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85)는 점, 셋째로, “생산-착취는 어떤 억압 조치들 덕분에 작동한다”(86)는 점이다. 이러한 세 가지측면에서의 작동생산에서 경제적인 계급 투쟁의 세 형태로서, “착취와의 싸움, 노동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기만적 내용들과의 투쟁, 억압과의 싸움”(87)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는 생산에서 경제적인 계급 투쟁의 복작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자신의 논의와 주장이 곧 맑스의 생산양식 개념이 포괄하고 있는 내용임을 밝히면서(89-90), 특히 생산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곧 모든 계급 투쟁의 운명을 가를 것이라고 선언한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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