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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젝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6장 발제 2017-08-04 1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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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세미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 /이상하

모순 / 권혁웅

1.

나는 아수라 백작의 팬이었다 고철 덩어리 마징가 제트나 봉두난발의 헬박사, 제 머리를 옆구리에 기고 다니는 브로켄 백작 모두 아수라의 매력을 앞설수는 없었다 아수라는 본래 제석천과 싸운 전투의 신이다 양성구유인 그는 두 명의 성우를 데리고 다녔고 왼쪽에서 등장할 때와 오른쪽에서 등장할 때 다른 목소리를 냈다 좌익과 우익을 그에게서 배웠다

2.

그 다음엔 헐크가 있었다 약을 지어먹은 데이빗 배너박사는, 그 부작용으로, 분노에 몸을 맡기면 헐크로 변했다 늘 웃옷만 찢어발기는 게 신기햇다 긴 대사는 전부 데이빗이 맡았고 헐크는 이두박근을 씰룩이며 그저 으르렁 거렸을 뿐이었는데 우리는 그가 나올때마다 열광했다

안팎의 경계가 거기에 있었다 정장바지가 쫄바지로 변하곤 했다

3.

육백만불의 사나이에 관해서도 말하고 싶다 스티브 오스틴 대령은 사고로 한쪽 눈과 팔, 두 다리를 잃었다 거액을 들여 망가진 몸을 복구한 후에, 그는 자주 왼쪽 눈썹을 들어올리거나 슬로모션으로 달리곤 했다 제 안에 제것 아닌 걸 데리고 사는 사람, 그를 흉내내느라 초당 9.8미터를 더한 속도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이 여럿이다

4.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고 노래했던 시인과 촌장은 한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며 귀가할때마다 나는 출가한 붓다였고, 샴쌍둥이처럼 그녀의 몸에 세들어 살고 싶을때마다 나는 늑대인간이었으며, 출근하기 싫어 장판에 들러붙을 때마다 나는 그레고르 잠자였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나는......이라고 쓰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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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서유럽이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에 매료된 것은 민주주의적 창안의 기원적 경험을 찾는 자아이상으로서 동유럽이 기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응시를 통해 서유럽은 스스로를 매혹적인 존재로 보지만, 동유럽의 현실에선 자유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이 예기치 않은 전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동일화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재고해야 하며, 여기서 정신분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385

1.향유의 도둑질 (라캉의 용어로는 상상적 거세)

사물의 의미 일체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주체가 그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믿는 한에서만 “있는” 존재자의 역설적 실존은 이데올로기적 원인/대의Causes 고유의 존재 양태이다. 정상적 인과 질서는 여기서 역전되는데 왜냐면 원인 그 자체가 그것의 효과들(이데올로기적 실천들)에 의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라캉과 담화적 관념론의 차이가 출현하며, 라캉은 (민족적 등등의) 원인을 실천의 수행적 효과로 환원하지 않고 실체 그 이상, 즉 향유의 실존을 다룬다. 389

타자가 우리에게 뭔가를 훔쳐갔다는, 향유의 도둑질을 전가함으로써 우리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서 도둑질해간 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가 결코 소유한 적이 없다는 외상적 사실이다. 결여(거세)는 기원적이며, 향유는 도난당한 것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한다. 혹은 논리학에 나오는 헤겔의 정확한 정식화를 인용하면 그것은 “뒤에 남겨짐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392 (여성 장교... 또는 연애인 결혼 질투의 향유...)

이러한 향유들은 명백히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컨대 슬로베니아 인들은 자신들의 향유를 강박적 활동을 통해 억압한다. 그리고 더럽고 게으른 “남부인들”이라는 형상으로 실재 속에서 회귀하는 것은 바로 이 향유이다. 394 (9번 주석 편집증의 매커니즘... 동유럽은 진정한 국가가 아님? 동아시아?)

2.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

이 향유의 도둑질 논리를 작동시키는 것은 물론 직접적인 사회적 현실-상이한 종족 공동체들이 가깝게 한 데 살고있는 현실-이 아니라, 이 공동체들이 내속하는 적대이다. 395

타자의 매혹적인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최심중의 분열,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보다 더한”그 무엇을 체현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과의 완전한 동일성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다. 타자에 대한 증오는 우리 자신의 향유의 과잉에 대한 증오이다. 398 (자신이 모르는 것을 증오하는 것은 가능한가?)

왜 종족적 원인에 대한 애착은 그것을 낳은 권력 구조가 붕괴된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주인의 형상과 더불어 사회적 구조에 내속적인 적대는 권력의 관계로, 우리와 그들, 적대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저들 사이의 지배 투쟁으로 변형된다. 자본주의를 속박하는 사슬이 깨지는 순간 새로운 주인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 몸체의 확립이 요구되고 이것이 ‘민족의 몸체’로 경험되기에 ‘민족의 적’ 형식도 생겨난다. 405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로 이처럼 증상적으로 대체할 때 작용하고 있는 욕망은 게마인샤프트(공동체)가 딸린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이며, “소외된” 시민사회가 없는 자본주의, 형식적-외면적 개인관계가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이다. “향유의 도둑질”에 대한 환상들이나 반유대주의의 재출현 등은 이 불가능한 욕망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406 (스티글리츠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

3,자유주의의 맹점

그러면 더 많은 소외, 더 많은 자유민주주의가 동유럽의 해결책인가? 이러한 동유럽 지식인의 태도가 몹시 의심스러운 것은 민족주의가 그에게 행사하는 이미 언급된 명백한 매혹이다. 그것을 논박하고 조롱하고 비웃지만 동시에 무력한 매혹됨으로 그것을 응시한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난을 통해 얻는 지적 쾌락은 자기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것의 만족과 섬뜩하게 가깝다. 향유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지 않다는 조건 하에서, 타자의 향유로 남아있다는 조건 하에서 좋은 것이다. 407 (다른 사상도 유사하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정으로 근본적인 비판이라면 비판의 대상을 지탱하고 있는 환상 속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자화자찬적 “사회분석들”너머로 나아가야 하며, 이 기저에 놓인 환상틀 자체의 힘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야만-요컨대 라캉적인 “환상을 통과하기”와 유사한 무언가를 수행해야만-한다. 409 (14번 주석. 환상을 통과하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할 일은 욕망의 충족을 무대화하기라는 소박한 환상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디 알렌은 서른살 연하 입양한 딸과 실제로 잤지만 영화에서 성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르시스적 이득?)

타자의 환상적 향유를 향한 이 양가성의 적극적 표현인 PC(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강박적 태도의 약점은, 그것이 너무 엄격하다는, 너무 광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엄격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즉 자기희생의 제스처만 제외하면. 이러한 PC적 태도는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의 자기가만의 예시적 사례이다. 그것은 문제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410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방패?)

강제버스통학의 사례는 전에는 폐쇄된 생활방식을 유지하려는 종족 공동체의 욕망, 그 자체로 “인종주의적이지 않은” 욕망이 있었던 곳에서 인종주의를 강화했으며 심지어 어느 정도는 생성하기까지 했다.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은 “계몽되지 않은”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지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유주의 좌파 지식계급의 원한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즉 이러한 저항에 대한 긍정적 이론을 제공할 수 없는 지식계급의 무능의 표현인 것이다. 412 (지식인의 무능이 또...)

1988년의 광부 대파업에 대해 영국 지식인들이 낡은 노동계급 원리주의라고 비판한 사례처럼, “과잉”동일화에 대한 두려움은 후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근본적 특징이며, 적은 분산된 복수적인 주체-위치들에 대해 온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과잉동일화하는 광신자” 이다. 후근대 이론이 환호했던 분산된 복수적인 구성된 주체는, 여하한 유형의 전복적 잠재력을 내포하기는커녕, 단지 후기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주체성 형식을 지칭할 뿐이다. (들뢰즈나 네그리의 유목하는 주체나 다중 개념에 대한 비판...?)

4.스피노자주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스피노자적인 “기표의 보편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라캉의 용어로 말해서, 스피노자는 기표사슬의 평준화 같은 것을 성취한다. 그는 앎의 사슬인 S2를 명령의 기표, 금지의 기표, 아니오의 기표인 S1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제거한다. 스피노자적 실체는 주인기표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로서의, 즉 부성적 은유의 부정화하는 절단이 개입하기에 압선 “순수 긍정성”의 환유적 우주인 보편적 앎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적 지혜의 태도는 의무론을 존재론으로, 수행을 진술로 환원하는 것이다. 416 (선악과의 농약)

반면 칸트의 경우엔 이성적 이성에 대한 실천적 이성의 우위성을 긍정하는데, 이는 명령의 사실은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한 주체로서 우리는 명령을 진술로 환원할 수 있게 해줄 관조적 위치를 결코 취할 수 없다. 스피노자적으로 우주를 관조한다는 것은 주체의 자기무화를 통해 성취되며 지복 가운데서 관조되는 자기충족적 매커니즘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가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덜게 된다. 이런 순수 긍정성의 우주와는 대조적으로 칸트는 주체의 근본적 책임을 도입한다. 417 (모두 다 내 탓이오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한국어의 이중성)

타자의 상호 인정이 아닌 정서적 동일화의 매커니즘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스피노자적 정서의 모방에서, 주체는 이 과정의 자율적 담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 측면적 연계들의 그물망을 위한 자리, 수동적 기반이다.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곧바로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고전적인 자율적 주체에 비해 이것은 매우 전복적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으나 이 스피노자적 매커니즘은 “후산업적 소비사회”라고 불리는 것에서 작동하지 않는가? 420 (스피노자는 황금 죄수복을 입은 철학자인가?)

오늘날 대중매체가 사담 후세인이나 마약 카르텔같이 파괴적 근본악의 모습으로 탁월한 적의 역할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원리주의는 지배적인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그것의 내속적 타자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 오늘날 파시즘은, 모든 것을 내걸 준비가 되어 있는 여하한 태도는 그 자체로 수상쩍은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본연의 윤리적 태도는 “근본악”이라는 모습으로만 살아남는다. 오늘날 유일하게 진정한 딜레마는 후기자본주의의 스피노자주의가 우리의 궁극적 지평인지의 여부이다. 422

5.근본악에 의해 설명되는, 민족주의의 꿈들

요점은 “편집증적”과잉동일화의 현대적 형태들이 자본의 보편주의의 내속적 이면이며, 그것에 대한 내속적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가 보편화되면 될수록 그것의 대립물은 “비합리적 원리주의”의 특질들을 띠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구성체의 보편적 차원이 자본에 의해 규정되는 한 그 어떤 사회적 탈출구도 없다. 이런 악순환을 깨뜨릴 길은 비합리적 민족주의적 특수주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넘어서는 보편성의 차원을 내포하는 정치적 실천 형식들을 창안하는 것이다. 422 (생태운동은 보편적 정치실천?)

원파시즘적 민족주의 헤게모니의 출현을 막을 유일한 길은 “정상성”이라는 바로 그 기준을,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틀구조를 의문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들”이 잠깐동안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 프로이트는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나치 인종주의를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의 자기이해에 대한 창백한 모방으로 경멸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을 믿는 자이며 따라서 반유대주의를 유효하게 와해시킬 유일한 길은 유대인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23 (힘의 비밀 아갈마. 유대인의 자체 탈중심화, 기원 자체가 잡종...)

특별히 근대적, 후칸트적 현상으로서의 “민족주의”는 민족, 민족적 사물이 칸트의 형식주의에 의해, 그가 모든 정념적 내용을 환원한 것에 의해 열리게 된 사물의 텅 빈 자리를 찬탈하고 채우는 순간을 지칭한다. 물론 이러한 공백 채우기에 대한 칸트의 용어는 열광의 광신이다. “민족주의”는 정치에서의 광신을 축도하지 않는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형식주의야말로 부정 판단과 무한 판단을 경유하여 “산주검” 및 그와 유사한 어떤 기괴한 근본악의 구현물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 놓는다. ... 자유민주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선험적으로, 구조적인 이유에서 보편화 될수 없다는 데 있다. 헤겔은 한 정치 세력의 승리의 계기는 그것의 분열의 계기라고 말했다. 426 (승리한 민주주의적 신세계 질서는 점점 내부와 외부 경계에 의해 표식. 포함과 배제)

크메르 루즈와 센데리스타스는 엄밀한 칸트적 의미에서 후기자본주의의에 대한 일종의 “무한 판단”으로서 기능한다. 세계체계로서의 자본주의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의 내속적 부정, 원리주의만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적 부정, 무한 판단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 오늘날 유럽 여기저기서 창궐하는 후근대적 인종주의와 전통적 형식의 인종주의의 차이에 특히 유념해야만 한다. 과거의 인종주의는 원색적이었으나, 새로운 인종주의는 “반성된”것이고 말하자면 바로잡힌 인종주의라서, 그것의 대립물의 형식을, 인종주의에 대항한 싸움의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그것을 “메타인종주의”라고 명명함으로써 과녁을 맞혔다. ... 현대의 바빌론에서 개인의 삶에 의무를 제공하는 명확한 종족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경험은 근거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며, 요컨대 진짜 범인은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인종들을 섞고 그리하여 자연적인 자기방어 기제들을 작동시키는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432 (라캉-메타 언어는 없다. 그렇다면 메타 윤리도??)

6.동유럽의 “사라지는 매개자”

슬로베니아에서 민주주의적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이 진정한 반민주주의적 세력들을 견대내면서 자유선거를 조직화하기를 사람들은 기대했다. 하지만 자유선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이 동일한 공산주의자들은 갑자기 적이 되었다. 선거 이전의 열린 조건에서 선거 이후의 그것의 폐쇄로의 이러한 변동의 논리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제공한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해볼수 있을 것이다. 헤겔식으로 말해서 체계가 자신의 외적 전제들을 내속적 계기들로 “정립”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외상적 기원들의 흔적들을 지워버릴 때, 체계는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436 (당신은 왜 촛불을 끄셨나요 책... 그 많던 촛불은 어디로?)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 생성되는 “열린”상황과 뒤이은 그것의 “폐쇄” 사이의 긴장이다. 우리는 일종의 열림을 목격하여 사태는 잠시동안 가시적이었으며 곧바로 비가시적이 되었다. ... 민주화 과정이 일단 정점에 이르고 나면, 그것은 그것의 기폭제가 된 자들을 매장시킨다. 437 (토사구팽??)

지난 이십년간 반대파들에서의 하이데거주의와 공식적 당 서클에서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주의. 이 두 경향이 슬로베니아를 지배했는데 논쟁이 터지자 그 둘은 제3의 진영-라캉과 알튀세르를 모질게 공격했고 특히 알튀세르의 아내를 교살한 불운한 일과 관련하여 그의 이론을 둘이서 동일한 언어로 공격했다. 알튀세르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종종 원스탈린주의적인 것으로 비방된-바로 그 알튀세르적 이론이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를 실질적으로 와해시키기 위한 일종의 “자발적인” 이론적 도구로서 이바지했는가를 확인해주었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외적인” 의례들과 관행들에 부여했고, 내적인 믿음과 확신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복종은 복종의 유사물과 일치한다. 438

이러한 사례들에서 이끌어낼 일반적인 이론적 교훈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재현주의적” 문제틀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환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요컨대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 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 442

제3의 길의 허구는 사회적 적대가 말소되지 않은 유일한 지점이었다. “후근대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다. 즉 기존의 사회질서 내에서-“허구”라는, 즉 가능하지만 실패한 대안적 역사들의 “유토피아적”내러티브들이라는 형태로-체계의 적대적 성격을 가리키고 그리하여 그것의 확립된 동일성으로부터 우리를 “소원화”시키는 요소들을 지칭하기. 443 (???)

7.“큰타자”의 붕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새로운 사회운동들 일반은 사라지는 매개자의 계기를, 새로운 질서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하고 비가시적이 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의 계기를 나타낸다. 시초에 과정을 격발시킨 작인은 그 과정의 주요 장애물로 지각되게 되어야만 한다. 실체적 지탱물로서의 “민족”은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는 매개자를 보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간과하기 위해서 보는 그 무엇이다. 민족은 사라지는 매개자의 공백을 메우는 환상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현재의 적대를 흐려놓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창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화석이 아니라면 민족 유산이란 무엇이겠는가? 443

동유럽에서 붕괴한 것은 큰타자, 사회적 협약의 궁극적 보증자였다. 1979년 이란 혁명과 관련해 테헤란의 어느 시민이 경찰관의 물러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이 소식은 불길처럼 번져 사람들은 큰타자를 믿기를 멈추었다는 것은 물론 사후적 재구성이지만, 문제의 그 사건을 단순히 종말의 시작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후의 사건들의 견지에서 그것“이었을 것일” 어떤 것이다. 445 (탄핵촛불 첫 집회때 경찰의 대응!)

모든 큰타자의 붕괴의 순간들에 공통된 특징은 전적인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실제로 위대한 그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별안간 주문이 깨졌으며 “그 무엇도 전과 같지 않았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권력에 대한 복종을) 찬성하는 이유로서 지각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반대하는 이유로 기능한다. 448

“에일리언”에 대한 두려움의 궁극적 근거는 그들이 그 어떤 방어도 소용없는 힘으로서 간주된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좀더 정확하게 보면, 에일리언과 맞서 무력한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권력에 있는 자들이다. 에일리언은 주인의 권력이 전능하다는 궁극적 사기를 폭로한다. 이런 위협을 가하는 한에서, 라캉의 Che vuoi?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지? 이 말은 즉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와 침투불가능성의 가장 분명한 체험물을 제공한다. 외계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의 궁극적 뿌리는 그것들의 물리적 위협이 아니라 그것들의 동기와 의도인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침투불가능한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450 (외계가 쳐들어오면 한일연합...)

 군대에서 고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 그의 격노와 위협, 또는 열심히 따를 때의 그의 비웃음이라는 권력의에 의한 조작의 기본적인 초자아-매트릭스, 이 불가능한 선택의 역설 속에서 이따금씩 권력 담화와 대결할 때 진정으로 전복적인 유일한 행위는 그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큰타자의 몰락 속에서 우리의 물리적 생존 자체가 “타자의 비존재”를 완전하게 떠맡는 행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의 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우리의 눙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45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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