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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페미니즘세미나_주디스버틀러_젠더허물기_2장 젠더규제들_201803302018-03-30 18: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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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세미나_주디스버틀러_젠더허물기_20180330_임당

2장 젠더 규제들

‘규제’라는 표현은 표준적인 사람을 만들어내는 법적 제도가 구체적인 법과 규칙, 정책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버틀러는 실제의 규제들로부터 젠더 규제의 방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에서는 실제 규제를 살펴보며 젠더가 어떻게 규제되고, 그 규제는 어떻게 강제되는지, 또 그 규제는 강제된 주체들에게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따르면 규제는 젠더에 선행하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푸코 계열의 연구에서는 복종과 규제에 관한 다음의 두 가지 주의사항을 강조한다. 1) 규제 권력은 이미 존재하는 주체에게 작용할 뿐 아니라 그 주체의 형상과 형식을 만든다. 게다가 권력의 모든 사법적 형식은 권력의 생산 효과를 가진다. 2) 규제에 복종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 규제로 인해 주체화가 된다는 뜻이며, 다시 말해 바로 규제화를 통해 주체로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2)는 1)에서 비롯된다.

버틀러는 젠더를 이러한 푸코계열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반박을 하고자 한다. 젠더가 권력 규제의 한 사례가 아닌, 하나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는 그 자체의 분명한 규제 체제와 규율 체제를 필요로 하고 또 확립한다.(72) 젠더가 하나의 규범이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규범은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 속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규범은 명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규범을 통해 사회적 영역을 인식하게 되고, 특정한 실천과 행위를 인식할 수 있는 기준을 얻는다. 그러나 그 실천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젠더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생산과 규범화가 그 젠더 특유의 호르몬, 염색체, 심리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 사이의 형태들을 따라 생겨나는 장치”(73)이기 때문이다.

성별 이분법은 젠더에 의한 것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젠더 조합들 또한 젠더의 일부 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젠더는 남성성과 여성성 개념을 생산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기제임과 동시에 그런 관점을 해체하고 의문시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성별 이분법에 근거한 규제적 젠더 담론은 지배적 사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규제적 권력작용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젠더의 다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을까? 이에 뤼스 이리가레는 수량화하는 남성적인 성(one)에서 벗어난, ‘하나이지 않은 성’으로서의 여성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트렌스젠더’가 젠더들 간의 통로가 되는 양식으로서의 전환적 젠더 형태라는 대안을 내놓는다.

상징적 위치와 사회적 규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라캉계 이론가들은 젠더 규범이 처음부터 심리에 자리 잡고 있던 어떤 상징적 요구를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상징계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욕망을 규제하는 법의 영역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근친애에 대한 금기와 족외혼의 원칙에 따라 가족과 친족의 위치를 기호화한다. 즉, 상징적인 규범은 친족관계를 성적 교차의 관계 속에 놓는다는 말인 것이다.

버틀러는 이러한 개념을 통해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을 하려고 한다. 1) 라캉의 ‘상징계’로 변형된 문화 개념이 현대에 통용되는 문화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2) ‘욕망을 규제하는’ 규칙을 영원히 고정된 법의 영역 안에 확립하려는 모든 주장은, 젠더의 사회적 변형이 가능한 조건을 이해하려는 이론에는 별 효용성이 없다는 주장. 3) 상징적 법과 사회적 법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다. 그리고 친족 관계의 변화가 정신분석학의 구조주의적 전제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 또한 보여주고자 한다.

우선 근친애 금기로 돌아가자. 근친애 금지의 위상은 무엇이고 또 그 위치는 어디인가?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애 금기가 생물학적 법칙이 아닌, 문화의 보편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라캉의 상징계 개념의 기반이 된다. 라캉에게 보편성은 그 문화의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규칙으로 이해된다. 상징계는 사회적 구조로 환원시킬 수 없는 언어구조라는 관점에서 정의된다.

따라서 규범은 라캉계의 ‘상징적 위치’와 딱히 같지 않다. 라캉의 관점에서 상징계는 사회적인 인과론으로는 알 수 없는, 사회생활에 대한 어떤 이상적이고 무의식적인 요구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계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징계는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새로운 친족관계가 등장해 상징계를 수정해보려는 시도들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친족 연구가 구조주의 언어학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문제의 하나는 친족 위치가 근본적인 언어 구조의 위상으로 격상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친족 개념이 초시간적인 것이며, 인식 가능성의 기본 구조가 된다. 그러나 규범은 수행을 통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변형되는 틀이기에 구조주의가 제시한 친족안의 ‘위치’와는 다르다. 또한 새로운 상징적 위치가 등장할 경우, 기존의 상징적 위치는 어떤 우연적 규범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이에 대해 구조주의자는 “그게 법이다!”라는 말로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법이다”에 내재된 의미는, 상징적 법의 절대성을 수행적으로 특권화 하는 방식이다. 정신분석학의 법 자체에 대한 모든 비판을 무력화하고 싶어 하는 정신분석학 이론 내부의 신학적 충동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든 논쟁을 초월하는 데다 논쟁 자체에 한계를 긋는 상징적 위치로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주장하는 이론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설명하는 주장의 권위를 뒷받침하도록 서술되는 바로 그 권위에 의존하는 이론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계는 비평적 실천의 장을 좌절시켜 젠더 가능성의 장을 닫아버리고자 한다. 그런데 상징계는 상징계를 수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실천을 언제나 좌절시킬 수 있는가? 욕망이 근본적으로 조건부라고 할 때,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들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상징적 권위에 대항한다는 것은 필연적 시간성 시간성 속의 규범이 그 내부로부터의 변화와 전복에 열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상징계는 성에 대한 가정을 규제하는 영역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서 남/녀의 위치는 다르다. 이는 사회학 담론상의 젠더 개념이 라캉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캉이 영향받은 레비-스트로스의 모델에서 남녀의 위치는 특정한 형태의 성적 교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특정 양식의 성적 유대만을 허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젠더는 주체가 사회적으로 규제되고 생산되는 성적 관계들을 금하기도 하고 명하기도 하는 어떤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성적 교환을 지배하는 규칙과 섹슈얼리티의 규제에 관한 주체 생산의 규칙들은, 그 규칙을 따라 사는 개개인들과는 구분된다. 인간은 법의 본질을 변화시킬 역량이 없고, 법은 자신이 규제하는 내용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젠더가 상징적 법의 규제를 받는다는 생각을 사회적 규범에 규제를 받는다는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젠더가 어떤 규범이라면, 젠더는 주체가 인식될 수 없는 장을 생산하는 사회 권력의 형식이고, 젠더 이분법이 제도화되는 장치이다. 젠더 규범은 그 나름의 젠더의 이상성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이상화는 실천과의 관계에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화 자체는 잠정적이므로 탈 이상화나 권위 박탈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규범은 사회적 실천 속에서 행해지고, 그 실천을 통해 재이상화되고 다시 제도화 되는 만큼만 규범으로 존속한다. 규범은 그 구현물을 통해, 규범에 근접하고자 하는 행위를 통해, 그 행위 속에서 또 그 행위로 인해 재생산되는 이상화를 통해 제 스스로가 (재)생산되는 것이다.(84)

푸코의 영향을 받은 프랑수아 에발드에 따르면, 규범은 규제 항목들을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변화시켜서, 그로 인해 푸코식 용어로 말하자면 사법적 권력이 생산성을 띠게 되는 움직임을 표시한다. 규범은 부정적이던 사법적 규제 항목을 긍정적인 규범화의 통제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규범은 사법적 규제 항목으로 생각되던 권력을 (a) 어떤 조직화된 규제 항목의 집합으로, 또한 (b) 어떤 규제적 매커니즘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변화를 표시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변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85-86)

규범과 추상화의 문제

푸코의 관점에서 규제적 담론이 개인을 생산한다고 주장할 때, 이는 담론이 개인을 관리하고 활용할 뿐만 아니라 규제가 개인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뜻이 된다. 이는 규범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 생산한 공통성의 추상화에 복종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화는 18세기 말 새롭게 사회 영역에 대한 기술을 하게 되었을 때 등장하는 개념으로, 양적인 측량을 기반으로 규범적인 현상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발드에 따르면 규범은 어떤 비교 가능성이자 공통된 기준이다. 여기서 규범은 외부를 알지 못한다. 그 스스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됨으로써, 대립물 또한 규범 안에 이미 포함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라캉의 개념에서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푸코적인 개념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규범의 재의미화는 어려워 보인다.

피에르 마슈레의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보자. 여기서 우리는 규범을 행위의 형식들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규범은 주체에게 행사되는 금지의 관점에서 주체를 억압하는 형식이며, 그에 따라 주체는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킬 가능성 또한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떤 ‘해방’은 규범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하며, 반 억압적인 담론만을 환영할 것만도 아닌 것이다.

마슈레는 규범이 규범행위를 통해서만 존속된다고 주장하면서 행위의 위치를 사회적 개입의 장소로 가져갔다. 규범은 그것이 적용된 장 외부에 있지 않다.(89) 규범이 규범으로 구성되는 이유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참조하며, 사실상 현실을 참조하는 반복된 규범의 힘 덕분인 것이다. 규범은 그 사례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규범 중 어느것도 구체적 사례와 유리될 수 없다.

젠더 규범들

위의 논지에 따르면, 젠더 규범이 생산한 현실의 장이 이상회된 차원에 있는 젠더의 표면적 외관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젠더 규범이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몸의 실천을 통해 환기되고 인용되며, 몸의 실천은 그 인용 과정에서 규범을 변화시킬 능력도 가진다.(90) 그러나 어떤 비정상 사례는 여전히 규제의 대상으로 재빨리 활용될 수 있다. 젠더 규범과 어떻게 분리하는 것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성할 것인가?

인터섹스 아동들을 외과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아이의 몸을 ‘정상화’하는 수술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젠더의 규제적 집행을 통해 생산된 몸은 고통받는 몸이며, 폭력과 고난의 표지를 담고 있는 몸이다.

따라서 젠더는 어떤 규제적 규범이지만 동시에 다른 종류의 규제들이 작용하는 가운데 생산된 것이기도 하다. 캐서린 매키넌은 성희롱 관련법이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의 위치를 설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희롱이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성적 복종의 결과라고 말한다. 매키넌은 이러한 이성애의 위계적 구조가 바로 젠더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성적 불평등은 한 사람의 특질로 멈추어 젠더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움직이다가 섹슈얼리티의 형태를 취한다. 젠더는 남녀 간의 불평등한 섹슈얼리티가 굳어진 형태로서 나타난다.”(91)

이렇게 젠더를 섹슈얼리티로 변형한 형태는 퀴어이론에서 두 가지 문제로 이어진다. 1) 섹슈얼리티를 젠더와 분리시키는 것, 2) 젠더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퀴어 섹슈얼리티로 맥락화되면 젠더는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불일치는 두 개의 다른 관점에서 주장된다. 1) 이 둘을 묶는 주장의 인과론적 환원론을 격파하기 위해 젠더로 규제되지 않는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고, 2) 지배적 이성애주의의 형식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젠더의 가능성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젠더가 이성애 안에 감춰진 성적 예속의 결과일 뿐이라고 보는 섹슈얼리티의 관점에 성희롱 관련법이 기반하고 있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특정 관점이 그 논리를 통해 강화된다는 문제가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성희롱 관련법은 그 자체가 젠더를 재생산하는 도구인 것이다. 젠더 위반에 따르는 사회적 처별은 다면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성애적 예속만을 처벌하는 성희롱 금지법은 이성애 안에 젠더 규범을 생산하고 유지하려는 규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희롱과 같은 특정한 행위를 단순히 제한하려 하는 규제는 대부분의 다른 행위를 수행한다. 그것은 인간됨의 경계를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이 사는 삶의 조건이 되면서도 그 삶을 초월해 삶을 무너뜨리려는 추상적 규범에 따라 인간을 만드는 일이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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