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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장 발제2017-04-19 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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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장 발제.hwp (19.5KB)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세미나_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 페미니즘이란?

 

서문에서 설명하듯, 1장은 페미니즘의 주요 논제들을 정리하는 장이자 다음 장을 위한 예비단계 정도로 봐도 좋을 듯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착취를 설명하는 대목인데(106), 미즈는 자본주의하에서 임금노동자의 경제적 착취를 언급할 때 쓰이는 착취를 억압적인 남녀관계(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왔던)의 원인을 설명할 때 역시 쓸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신여성운동 슬로건에서 영향받은 바도 있겠지만, 여성에 대한 착취가 순전히 문화적/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라 뿌리 깊은 역사적 문제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미즈는 여성에 대한 착취 및 억압을 유지하는 체계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가부장제가 함의하는 바(남성 지배)에 망설임을 표하기는 하나, 1) 여성 착취를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2) 여성 착취를 역사화하는 데 적절한 단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자본주의는 바로 이 가부장제를 작동시키면서 여성을 착취하고, 잉여가치를 갈취한다. ‘말하자면 이 체제의 목적인 끝없는 자본축적은 가부장적 남녀관계들이 온존하거나 새로 창출되지 않는다면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 미즈의 논지다(110). 그리하여 미즈에게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문제의식이 성립한다. ‘페미니즘은 남녀관계를 비롯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 중심부와 식민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계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111).

따라서 페데리치가 가사노동 임금투쟁이 혁명의 영점임을 주장한 반면(나중에 페데리치 역시 나이지리아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화 문제를 다루는 듯하나), 미즈는 가사노동 문제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하며(100), 가사노동 논쟁에는 자본축적과정에서 자본이 스치고 가는 무상노동의 영역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유럽 중심적 시각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생계형 농민, 소생산자, 주변인 등 주로 여성이며 저개발국가 국민인 이들의 노동은 제대로 된 자본주의와 사회의 외부에 놓여 있는 것, 즉 전자본주의, 봉건, 저개발, 후진 등으로 형용된다는 것이다(101). 이는 가사노동이 생산관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 ‘자연화된 노동이 되는 논리와 일치하며, 자본은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착취하듯이 식민화에 기반해 제3세계 여성을 저임금 노동자로서 착취한다. 하지만 제3세계는 결코 멀리 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구조 아래, ‘저개발국가에서 개발된 패턴을 따라 형성된 경제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서구 자본이 실질임금을 낮추고, 생산비를 줄이고, 노동조합의 힘을 분열시키는 수단이다’(68). 이는 제1세계에서 남성 실업률 증가, 여성의 빈곤화를 연쇄적으로 불러온다. 때문에 미즈는 자본의 여성 착취와 제3세계 착취를 한데 겹쳐놓는데, 이때 미즈가 사용하는 가정주부라는 단어는 비단 여성 가사노동자만이 아니라 비공식부문에서 일하는 제1세계 노동자, 존재 자체가 자연화된 제3세계 노동자까지 포괄하며, ‘가정주부화노동의 유연화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심장에는 폭력여성에 대한 폭력(가정폭력, 성폭력), 식민지에 대한 폭력(정복, 전쟁)이 놓여 있다(20). 미즈는 남성 폭력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을 거부하는 대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일부’(89),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18)이라 받아들인다. 앞서 말했듯 미즈는 여성 착취가 문화적인 문제가 아닌 역사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문화적인 문제라면 (3세계 노동자가 자본주의 외부에 놓이듯) ‘근대성이 남녀관계를 문명화하고, 이제껏 남성이 자행해온 공격적이고 반여성적인 경향을 순화’(20)한다는 명제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이 체제의 (오래된) 비밀이다. 맑스는 이런 폭력과 원시적 축적이 제대로 된 자본주의보다 앞선 시기의 특징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여성운동의 몇 장면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구여성운동은 대개 공적인 영역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국가를 향해 투쟁하고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이는 부르주아 혁명, 특히 1789년 프랑스혁명과 1776년 미국혁명에서 시작됐는데(72), ‘부르주아 혁명의 민주적 권리가 결국은 여성에게까지 전달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힘을 얻은 것이었다(74). 여성해방의 열쇠가 공적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냐’(자유주의) 아니면 사회적 노동에 온전히 경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냐’(좌파)는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두 경향 모두 여성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지위를 높이는 데 여성의 교육 및 훈련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즉 이들은 여성 억압이 구조적 결함이 아닌 여성의 낮은 계급의식이나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았고, 교육과 차별철폐정책, 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겼다(75).

반면 신여성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여성의 몸에 관한 혹은 여성의 몸과 관련된 문제였다(82). 구여성운동이 여성참정권 등을 요구하면서 (정치적·경제적) 공공영역에 대한 투쟁에 집중했다면, 신여성운동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영역(섹슈얼리티, 임신, 낙태, 피임 등 자신의 몸과 같은 개인적인 영역)을 열어 투쟁의 공간으로 삼았다. 몸의 정치는 남녀관계의 사적이고 분리된 영역을 정치적 영역으로 규정함으로써,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냄으로써,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구조적 구분에 도전했다. 이는 동시에 통상적인 정치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83). 페데리치가 <혁명의 영점> 2장에서 여성이 남성을 위해 성적 만족을 꾸며내거나, 남성에게 성적 만족을 안겨주어야 함을 언급하면서 섹슈얼리티는 왜 노동인가묻듯이, 신여성운동은 남녀관계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며 여성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며, 강간문화, 가정폭력 등을 고발했다. 이러한 영역에서 폭력과 강제는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주된 메커니즘으로 보인다(85).

이러한 몸의 정치는 두 가지 단절점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불러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가사노동에 대한 재조명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슬로건은 여성이 비정치적존재라는 자기인식을 변화시키면서, 자신과 담을 쌓고 있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적 주체로 활동하도록 부추겼다(90). 여성들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을 남성 위주의 정당 혹은 다른 조직에 위임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대표를 통한 정치혹은 대의정치의 개념에서 일인칭 정치의 개념으로 이동하고자 노력했다(91). 후자에 대해서는 앞서 미즈가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음을 말했다. 하나 미즈는 이렇듯 구여성운동과 신여성운동 사이의 지속 및 단절, 신여성운동에서 가사노동 임금투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길게 서술하는데, 이는 1장 첫머리에서 페미니즘에 이런저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결국 여성 문제를 기존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틀에 맞추려는(60) 움직임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여성 억압 혹은 착취가 제대로 된 역사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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