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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음만나는정치철학 7강 후기2017-07-08 13: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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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폭풍, 철학의 왕자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무인도에 들고갈 하나의 책을 꼽는다면 스피노자의 저작을 꼽을거라고 한 것 만큼 강사님의 애정이 듬뿍 담긴 강의록을 보곤 
이걸 하루에 다 끝낼 수 있을까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꼼꼼하고 빽빽한 강의와 강의록이었는데, 그게 어디갔..

아무튼 개인적으로 ‘철학’으로만 스피노자를 바라보다. 이번 강의에서 보편제국을 벗어나, 개인과 사회, 국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만난 스피노자라 색다르고 반가웠습니다. 잠깐 세는 이야기지만 이번 강의 만이 아니라, 2차 대전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서 늘 드는 생각이 저 사람이 살았던 때는 어땠을까 하는 거 였어요. 누가누가 집권했었고, 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어떤거, 예술은 저런거 정도 말고 
아니 그런것도 포함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살수 있었고, 어떻게 사물을 인식했는지 등등 결과적으로 어떤 물적 조건들이 그들 앞에 펼쳐졌길래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잘 떠나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저 양반 살았던 때는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했는데, 황금시대라고까지 하는 시대에 어쩌다 어제까지 한 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사람을 폭도들이 찢어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게 잘 이해 안가더라구요. 차우셰스쿠 처럼 대놓고, 시위대에 총을 겨눈것도 아닌데(심지어 총을 겨눠도 아직 멀쩡한 사람이 더 많죠) 
물론 목마른놈이 우물 파듯이, 궁금하면 직접 찾아야 하지만 그걸 안하… 고 있던 찰나, 친구가 세계체계론에 대해 한번 같이 공부해보자 하더군요. 세계체계는 일국의 관점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기술하는 일을 넘어서서,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실제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합니다. 물론 이번 수업을 통해서도 정치철학의 역사를 통해서도 그때 그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힌트가 팍팍 나옵니다만 이것도 혹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의미에서 매주 일요일 세시부터 하는 세계체계론 세미나를 같이 하는 건 어떨까요? 자세한 내용과 신청은 세미나 게시판으로 gogo~

쓰다가 갑자기 이상한데로 빠졌네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스피노자의 정치철학,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을 이해 하기 위해 그의 철학, 굳이 따지자면 에티카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기에 수업의 대부분을 실체, 본질, 양태, 속성, 정동, 욕망, 코나투스 등등등에 대한 설명으로 진행됐었죠. 
후기로는 수업때 충실히 한 부분 보다는 좀 더 궁금했던 부분을 더 공부해 정리하는게 더 낫다 생각되었으나…. 음.. 네.. 거기까진 못갔구요, 다만 앞서 세계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서 16세기 네덜란드에 대해 찾아봤는데요, 그거 정리한거라도 덧붙이고자 합니다. 물론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후기를 빙자로 찾아본걸 정리하는 차원에서..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15세기 합스부르크가 치하 저지대 지방의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문화에 종교박해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몰렸고, 이로인해 기술과 인력이 집약된 결과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도 마라노라고 불렷던 포르투갈 유대인 이주민 2세였지요.
당시 네덜란드는 따로 왕은 없었고, 각 주의 총독과 연방의회, 이원화된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총독에게는 군대지휘권이 있었고, 연방의회 그리고 의회의 지도자(정무관이라고도 하고 총리, 재상이라고도 하는)에게는 공적 금융의 관리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구도는 다른 역사와 유사하게, 총독파는 보수적이며 중앙집권적 권력을 지향하고, 정무관파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 체제를 지향했다고 합니다. 사실 총독파도, 정무관파도 애초에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레헨트라 부르는 네덜란드 상층 부르주아 계급이었습니다. 다만 네덜란드가 사실상 스페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벗어난 이후에는 이 둘 간의 정치적 알력싸움이 일어난 것이지요. 
재밋는 것는 요한 드 비트가 집권하는 것은 그의 정치적 투쟁이 승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정치적 투쟁이 결과를 맺은 것일수 는 있지만 직접적인 요인은 당시 총독이었던 빌렘2세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에겐 어린 아들 하나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그의 어머니와 미망인이 섭정권으로 다투는 바람에 공화파(정무관파)들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네덜란드 독립선언 이후 쭉 이어오던 오라녜 가문의 집권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기에 요한의 아버지인 야코프 드 비트가 이끄는 세력이 두각을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요한도 능력이 출중했지만, 겨우 28세의 젊은 변호사였던 그가 곧바로 정무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후원이 주요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요한이 집권(1653) 하는 시기는 제1차 영란전쟁 시기(1752~4) 였습니다. 찰스1세의 목을 친 크롬웰이 네덜란드에 겐세이?!를 놓으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는데, 두 나라 다 소모전으로 들어가게 되자 두 국가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냈습니다. 이 때, 크롬웰은 협상 조약에서 요한에게 오라녜가문이 네덜란드의 관직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는 조건을 내세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요한 직전에 총독이었던 빌렘2세의 미망인이 크롬웰이 목을 쳤던 찰스1세의 딸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빌렘2세의 아들 빌렘3세는 찰스2세의 외손자이고, 크롬웰은 스튜어트가가 다시 부흥하지 못하게 하도록 국내외적으로 말뚝을 박을려고 한 것입니다.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가 아직 프랑스에서 시퍼렁게 눈을 뜨고 있을때였으니까요. 요한은 크롬웰의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도시 상공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라 우선 전쟁을 끝내고 장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혹하지 않았겠습니까. 문제는 칼뱅파의 수호자이자, 사실상 왕노릇을 백여년 가까이 한 오라녜가문을 따르는 시민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는 것이죠. 카톨릭과의 항쟁노선을 펼치는데 있어서 오라녜가가 군사적 지도자로 역할 함으로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듯한데 그런 영웅가를 배제한다는게 깔뱅주의자들에게선 영 탐탁치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함에도 요한은 20여년 동안 집권 했습니다. 심지어 세번째 집권기때에는 홀란트에선 총독을 폐지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정무관의 권력이 더 높아진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권동안 해군은 유럽에서 최고급으로 키운 반면, 육군은 있으나 없으나 하는 정도로 유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육지가 이어져 있던 프랑스가 침입해 온 것입니다. 서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통일된 영토국가가 사실상 도시연합일뿐인 공화국을 치는 상황. 그렇지 않아도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요한에 대한 견제가 점점 심해지는 정국이었는데, 전쟁까지 나버리니 국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버렸습니다. 점차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급기야 신흥귀족들이 오라녜가문을 복권시킵니다. 정국은 요한을 압박해갔고, 요한의 형 코르넬리스 드 비트가 내통혐의로 체포당하기 이릅니다. 결국 요한은 정무관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코르넬리스가 추방령을 선고 받고 요한의 집을 방문하던날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두 형제를 찢어죽입니다.

이때, 스피노자는 생각했겠죠.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라고
홉스가 (영국에서) 왕당파로서 절대군주정을 상정한 리바이어던을 이야기 했다면,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에서) 정무관파로서 민주정을 이야기 한것이겠지요. 만약 그 들이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으면, 다른 주장으로 진행되었을까요? 가정은 없다만, 애초에 위치가 달라졌으면 그들의 삶이 달랐을거고, 그들의 철학 자체가 뒤바뀌지 않았을까요. 가정이 무의미 합니다만, 그들이 삶을 영위했던 위치가 철학을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에 역사에 대해 더욱더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후기 마치구요.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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