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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음 만나는 맑스 3장 후기2017-10-08 08: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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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3강에서는 공산당 선언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핵심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제 1 장 '브루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1장의 내용은 '예정론'의 형태를 통해 브루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관계와 그것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브루주아지는 자신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회적 조건을 창출합니다. 왜냐하면 브루주아지는 자신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화물을 운송하는 인프라를 깔아야하고 장거리 통신수단을 만들어내야하기 때문이죠. 또한 브루주아는 세계시장으로 확대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본주의 외부세계를 브루주아지식으로 생각하고 살게끔 강요합니다. '과학'이라 부르는 '보편적' 활동 또한 이런 경향의 연장선 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맑스에 따르면 이렇게 단일하고 보편적인 세계관과 물적토대를 형성하는 브루주아지들은 이런 사회체제 속에서 보편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일군의 프롤레타리아를 생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브루주아지들이 만든 보편적이고 단일한 세계 속에서 계급은 오직 둘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브루주아지들이 만든 보편적인 삶의 조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들은 결집할 수 있는 공동의 억압조건과 문화, 운송 및 통신수단을 얻게 되죠. 따라서 국제적 투쟁이 일어나고 승리를 쟁취하면 하나의 계급만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2) 제 2 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


2장의 내용은 크게 공산당의 보편성과 억압구조로서의 사적소유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한상원 선생님께서도 강조하셨듯 맑스에게 공산당은 특정한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집단이 아니라 보편적 삶의 조건이 된 자본주의에서 억압의 위치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싸우는 집단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맑스가 브루주아지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논리가 보편성의 폭력을 비판하는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맑스는 브루주아지들은 자신들이 역사 위에 살면서 마치 맥락이 없고 보편적인 것 처럼 군다고 비판합니다. 그런 면에서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성은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나타나는 보편성이지 항구적인 보편성이 아닙니다. 결국 현재의 시대가 보편적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억압을 받는 집단인 프롤레타리아 또한 보편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억압구조는 '사적 소유'입니다. 사적 소유란 '사회적'으로 소유되어야 할 생산수단을 개인이 가지게 하는 브루주아지적 소유입니다. 이런 사적 소유는 개인적 소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맑스는 개인적 소유를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적 소유 때문에 다수의 개인적 소유가 침해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물적 토대를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자본주의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은 특정한 개인이 모든 부를 다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사적 소유 때문에 개인적 소유를 침해당합니다. 따라서 맑스는 국가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국가를 통해 생산수단을 비롯한 자본을 사회가 소유할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정책적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3) 제 3 장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 장은 다른 사회비판 흐름에 대한 공산주의적 비판입니다. 이 장에서 맑스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가 근본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에 소극적이라 비판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반동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수업시간에 다루지 않아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이 장은 뒤의 4장에서 이야기 할 '비판적 지지' 개념을 실천할 때 필요한 논리들을 제공하는 장이라 생각됩니다.


4) 제 4 장 '각종 반정부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마지막 장은 공산당이 다른 사회운동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서술 했듯이 공산당은 보편적 범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모든 체제저항 운동에 결합하여 같이 싸우되 여기서 보편적 억압구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앞서나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사적 소유 폐지를 관철해야합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보이는 보편성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출되어야할 무엇입니다. 왜냐하면 브루주아지의 헤게모니는 사람들이 같은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서로 완전히 다른 억압이라고 느끼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는 마지막 문장은 보편적 억압에 대한 인식과 각성을 촉구하는 문장입니다.


5) 기타 논의 및 질문


1.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1장이 예정론이라는 형식 때문에 이 장이 유물론적이지 않다고 비판받기도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이 장은 현실분석과 함께 어떤 사회적 상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방식으로서 예정론을 도입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의 목적 자체가 분석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당이 당 내부의 의지를 고양하기 위해서 쓰인 것인데 좀 과한 비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석적 일관성과 행위의 일관성은 다른 맥락이기도 하고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추석 연휴기간에 같은 물리학과의 비판적 개신교인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인간이 과연 종교적 상상과 형식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선명한 논리가 잡아내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은 결국 그런 문화적 장치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텍스트 자체가 상당히 공동체주의적이고 특정한 개인이 부를 다 가져가지 않게 만드는 문화적 제동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유대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더군요.


과학도 이런 종교적 상상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맑스의 초기저작들에 '낙원의 상실과 회복'이라는 종교적 메타포가 등장한 것 처럼 과학에도 '대칭성', '오컴의 면도날', '최소주의'와 같은 미학적 형식이 등장하고 그것이 사물과 운동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등장합니다. 뉴턴의 3법칙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현실의 사물들은 이런 이상적의 사물의 형태와 운동이 (등속직선운동) 이러저러한 이유로 (힘)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이 기본적인 서술구도입니다. 이런 식의 서사는 포이어바흐가 전개한 종교비판과 유사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사물의 운동과 존재를 이런 방식으로 이상화함으로서 실제의 사물 작동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이 부각되면서 나머지가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물에 대한 이미지가 사물의 분열적 행동보다 선행하는 현상은 어떻게보면 '시뮬라시옹'의 논의와도 비슷하다고도 생각하고요. 따라서 다른 관점의 미학적 기준을 적용했을 때 다른 과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가 존재하면서도 이런 '가짜'에 의존하는 것은 그것 말고는 다른 재료가 없고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게 두렵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유물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단순히 신비주의, 상상, 서사구조를 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것에서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혹시 수업 때 기회가 된다면 사회운동과 사회분석에서 이런 종교적, 문학적 장치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한계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 수업 시간에도 다루었듯이 맑스의 논의는 모든 사회 문제를 브루주아적 세계의 파생물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지나치게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고, 더 복잡해지고 고도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 수록 여러 미디어와 기술 그리고 소비라는 생활양식을 통해 체제는 사회적 관계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차이의 경계를 자기가 유리한 대로 생산한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세계화가 진행되면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우리는 현재 전 세계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성차별의 반동적 강화를 보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보편성'이라는 것을 구축하지 않으면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유지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성은 인간 억압의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서로가 같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라고 느낄 때 더 쉽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렇게 보편성이 되었던 차이가 되었던 그것을 연대의 재료가 아닌 폭력의 재료로 환원해버리는 이 토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남은 추석연휴 잘 보내시고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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