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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강독 시리즈 2]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강사 인터뷰 첫 번째!2018-04-22 15: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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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강독 강좌 인터뷰 파트1

 



 

 

1. 서교연 강독 시리즈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서교연 강독 시리즈는 우리 시대에 주요하게 영향력을 미친 사상가들을 다시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프로그램입니다. 지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강독 강좌를 들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꼼꼼하게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난 강좌에서는 들뢰즈가 어떤 적용 가능성이 있는지를 곧바로 따져 묻기보다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고자 했던 ‘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기획을 검토해보았죠. 들뢰즈의 아우라에 파묻혀서 어려운 문장을 따라가기에 급급해하기보다는 전체 기획의 시야 속에서 공과를 따져 나가보는 다소 비판적인 거리두기를 시도했었습니다. 이번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읽기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다만 저는 데리다의 ‘해체’라는 기획에 대한 비판적 검토보다는 그 기획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상사적 함의를 드러내는데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데리다가 들뢰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하게 소개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보다는 맥락을 짚어나가는 작업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2. 데리다에 대해서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데리다는 아마 가장 유명한 현대 철학자 중 한명이 아닐까 싶네요. 2004년에 타계했을 때 시라크 대통령이 직접 사망 소식을 발표하고, 유수 저널인 <가디언>과 <뉴욕타임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했었죠. 데리다는 수많은 추종자만큼이나 반대세력도 어마어마합니다. 이러한 스캔들은 데리다의 작업 스타일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책들을 보면 대부분 어떤 사상가나 작가 혹은 텍스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이성’, ‘정신’, ‘존재’와 같은 철학사의 주요한 테마를 다루기보다는 구체적인 하나의 텍스트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이데거와 들뢰즈도 철학사에 대한 많은 연구서들을 남겼지만 데리다처럼 텍스트에 대한 독해 자체가 주요 저작들을 이루고 있지는 않죠. 그러니까 데리다의 파급력 혹은 스캔들은 어떠한 테마에 있기보다는 그가 파격적으로 책을 읽어내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데리다 하면 다른 무엇보다 ‘해체’라는 독해 스타일이 먼저 떠오르는 겁니다.


데리다가 해체하는 철학자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습니다. 플라톤, 루소, 헤겔, 소쉬르, 후설,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등등 고대 철학에서 현대 철학까지를 아우르죠. 심지어 레비나스, 푸코, 라캉, 들뢰즈와 같은 당대 최신의 철학자들에게까지도 해체적 독해를 멈추지 않습니다. 데리다는 자신이 아무리 존경을 표하는 사상가라도 글에서는 거침없이 해체해버립니다. 작업 방식만을 보자면 데리다는 철학사에서 ‘비평가’라는 다소 특이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당대 사상가들에게 데리다는 ‘모두까기 인형’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해체가 단순히 ‘까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모순점과 전제들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실제로 해체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참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데리다의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에 대해 푸코가 분노했다는 사실은 그 중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3.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라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가령 데리다 하면 ‘해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데, 강좌 소개를 보면 ‘글쓰기’라는 주제가 중요해 보입니다. ‘글쓰기’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데리다의 이론적인 주저라고 할 수 있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글쓰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프랑스어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문자 혹은 기록이라고도 번역이 되죠. 한국어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글쓰기보다 프랑스어의 의미를 살려서 작가의 문체나 미술에서의 화풍, 음악에서의 작곡법 등등 무언가를 쓰거나 기술한다는 행위 일반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글쓰기’가 서구형이상학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서구형이상학에서는 언제나 주체의 ‘말’이 특권화되었습니다. 사유는 무엇보다도 눈앞에 있는 주체에게서 생생하게 흘러나오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에 ‘글쓰기’는 주체가 남긴 ‘말’의 흔적에 불과합니다. ‘글쓰기’는 ‘말’처럼 생생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말’을 오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죠. 따라서 사유를 한다는 것은 ‘글쓰기’가 초래하는 오해가능성을 뚫고 주체가 발화하는 ‘말’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때 ‘글쓰기’는 ‘말’을 가능한 충실하게 담아내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생각은 플라톤에서부터 소쉬르에 이르기까지 이천년이 넘도록 충실히 이어져 내려온 서구형이상학의 대전제였던 것이죠.


데리다는 이러한 서구형이상학의 전통에 반기를 듭니다. 과연 ‘글쓰기’가 ‘말’을 담아내는 수단에 불과하냐는 것이죠. 여기서 그는 ‘말’과 ‘글쓰기’의 이항대립을 무너뜨리고, 양자를 모두 가로지르는 발생의 원리로서 ‘흔적’을 사유합니다. 그런데 ‘흔적’은 무언가 쓰여지고 남겨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글쓰기’와 가깝습니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사유란 진정한 ‘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흔적’으로부터 출발하는 데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이항대립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그 속에서 발생을 사유하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데리다는 ‘해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해체는 단순히 뜯어서 풀어헤친다는 뜻만이 아니라, 구조를 뒤흔들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운동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탈구축’(déconstruction)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4. 그렇다면 해체와 ‘글쓰기’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말씀드린 것처럼 일차적으로 ‘글쓰기’는 해체의 대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해체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체라는 작업 자체가 저자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남겨놓은 ‘글쓰기’를 파고들어 저자가 미처 의도하지 못한 부분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말이죠. 따라서 ‘글쓰기’는 해체의 대상이자 해체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데리다의 사유로 들어가는 핵심적인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데리다가 지적한 서구형이상학에서 ‘글쓰기’에 대한 ‘말’의 특권화는 철학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의 특권화는 다름 아닌 근접성의 특권화입니다. ‘말’이 진리를 담보하는 것은 ‘말’이 발화하는 주체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를 얼마든지 정치·사회적인 용어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정치는 가능한 매개 없이 대중들이 ‘직접’ 말을 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사회는 개별적인 주체들이 서로 ‘직접’ 소통할 수 있을 만큼의 적절한 규모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데리다가 겨냥하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직접’의 특권화입니다. 왜 ‘직접’적이고 ‘가까운’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되는가? 근접성의 특권화 속에서 배제되는 매개되는 것 혹은 쓰여지는 것의 지위는 무엇인가? 이는 데리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강사: 조지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구조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롤랑 바르트로 학위를 받았다. <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롤랑 바르트의 아마추어적 실천>, <이미지의 영도를 개념화하기>, <슈레버의 사례에 대한 분열분석적 진단>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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