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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2019 겨울강좌]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 : <인정투쟁> 읽기" 강사 인터뷰2019-01-06 20: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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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 : <인정투쟁> 읽기 강사 인터뷰

 


 
 



Q. 우선 악셀 호네트라는 철학자에 대해,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A. 악셀 호네트는 현대 인정이론의 대표자로, 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학자입니다. 비판이론이 한국에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호네트의 이론의 독창성과 중요성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호네트의 인정이론의 원천은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불리는 오래된 전통에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부설 연구소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활동하고, 관여했던 연구자 집단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잘 알려진 인물들로는 연구소 설립 당시 활동했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발터 벤야민 등이 있고, 2세대로 불리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호네트는 바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 이론가로 불립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 내에는 상당히 다른 여러 이론과 기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하나의 학파나 이론으로 묶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실제로 프랑크푸르트학파 일반을 대표할만한 테제나 이론(의 내용)은 없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비판이론’ 혹은 ‘비판적 사회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현대 사회의 잘못된 발전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현상들, 즉 물화, 소외, 일차원적 인간, 도구적 이성의 지배,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같은 용어들에 의해서 지시되는 현상들에 주목합니다. 사회적 병리현상이 사회구성원들의 ‘좋은 삶’ 혹은 인간의 자기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동시에 이들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비판하고 극복할 계기를 바로 그 사회 안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개인들의 ‘좋은 삶’과 자기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가령 호네트 이전 세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도구적 이성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신화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연의 지배를 위한 도구적 이성과 합리성의 발전이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지배와 억압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버마스의 경우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를 통해 인간의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의사소통 행위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경향이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발달을 방해한다고 주장합니다. 


 호네트는 윗세대의 비판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합니다. 한편으로 기존의 비판이론의 이념을 계승하면서도, 이들이 제시한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세웁니다. 그리고 『인정투쟁』은 바로 이와 같은 기존의 비판이론의 한계를 넘어서, 인정, 무시, 인정투쟁과 같은 개념들을 중심으로 비판이론의 현대화를 시도하는 호네트의 첫 번째 저작입니다.




Q. 다루려는 <인정투쟁>의 부제가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만...

 

A. 오늘날 여성, 난민, 성소수자 등의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사회적 갈등입니다. 이들, 여성 난민, 성소수자들은 기존의 사회의 차별적인 구조와 제도 및 문화를 비판하고, 자신들을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한편 반-페미니즘, 반-난민,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혐오가 ‘정당한 주장’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길 원합니다.


  예컨대 20-30대 남성들, 개신교집단은 여성이나 난민, 성소수자에 대한 정책과 제도에서 자신들이 무시되고 있다고 여기며, 자신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박탈당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정이론은 인정요구들 모두가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인정요구와 부당한 인정요구를 구분할 기준을 제시합니다. 만약 모든 인정요구에 동일한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갈등적인 두 집단의 ‘정당한’ 인정요구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사회적 갈등은 인정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혹은 정치적 관점에서 중립성의 외양을 띤 합리성이나 경제주의적 관점을 통해 판단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면, 호네트는 인정투쟁이 단순한 이해관계에 의한 갈등, 개인이나 집단 간의 갈등, 정치적 입장의 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호네트는 인정투쟁이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투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정투쟁은 사회의 규범들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사회가 개인에게 약속한 것, 즉 사랑, 권리, 가치평가와 같은 개인의 ‘좋은 삶’의 근본적인 조건은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고, 규범입니다. 개인들은 바로 이러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 또 여기서 배제될 때 무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무시의 경험에 기초한 인정투쟁은 하나의 도덕적 투쟁이고 규범적 투쟁이죠.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에 대하여(Zur moralischen Grammatik sozialer Konflikte)’라는 부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갈등(sozialer Konflikte)을 도덕적(moralischen) 혹은 규범적인 것으로 다루며, 인정투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이나 저항 일반에 대한 규범적 정당화를 시도하며, 사회적 갈등의 형식 혹은 문법(Grammatik)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강에서는 인정에 관한 호네트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왜 인정투쟁은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투쟁인가, 또 어떻게 우리는 어떤 인정투쟁 혹은 인정요구가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Q. 보통 맑스주의는 사회적 갈등을 구조적 문제로 접근합니다. 호네트의 경우는 어떤가요? 


A. 호네트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맑스주의의 구조적인 접근 방식을 기각하지는 않습니다. 호네트 역시 사회적 갈등을 단순히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호네트가 맑스주의적 접근을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사회적 갈등을 구조적으로‘만’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경향입니다. 통상 맑스주의에서 사회적 갈등은 경제구조에 의해서 결정되는 개인들의 위치, 즉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간주됩니다. 또한 그밖에 다양한 양상의 사회적 갈등은 이러한 경제구조에 의한 것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죠. 또한 맑스주의에서는 개인들이 투쟁에 나서는 동기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계급이 곧 계급의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설명하죠.

  반면 호네트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의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투쟁이나 갈등을 모두 계급투쟁으로 환원하는 것 또한 동의하지 않죠. 따라서 호네트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투쟁이나 갈등 속에서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병리현상, 그리고 이를 극복할 해방의 가능성을 탐구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호네트의 주장이 맑스주의를 기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주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맑스주의의 해방론이나 갈등이론에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호네트는 무시의 경험을 중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애초에 무시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면,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가령 노예의 경우가 그럴 것이고,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노동을 시작할 경우,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경우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이렇게 경험되었으나 감각되지 않은, 인식하지 않은 무시에 대해서 호네트는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A. 확실히 무시가 항상 명확하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시를 경험한 이들의 저항 역시 항상 동일한 형태로 수행되는 것은 아니죠. 호네트는 무시와 고통이라는 용어를 개인들에게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경험되는 것에서부터 이론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 위치한 것까지 폭넓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조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시는 (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떠한 형태로든 개인에게 경험됩니다. 호네트는 바로 여기에 사회적 병리현상을 비판하는 실마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네트는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을 중요하게 인용합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구조적 모순들은 상징폭력과 오인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구조 안에서 개인에게 경험됩니다. 그래서 개인들은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될 수 없지만, 직접적이고 명확한 형태인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항상 사회적 맥락에서, 또 이론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비판이론은 이와 같은 실마리들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해방의 계기들을 찾습니다. 비판이론이 갖는 실천적 효과는 바로 이처럼 은폐되고, 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은폐되거나 무의식적인 무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Q. 오늘날 어떤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호네트의 이론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지요? 


A. 어떤 사람들에게 인정이론이 유용할지를 특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호네트의 인정이론이 유용한 것은 이론의 개방성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개방성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호네트 자신이 항상 현 시대, 즉 역사적으로 특수한 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호네트가 구분하는 사랑, 권리, 가치부여와 같은 인정의 유형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유효합니다. 이후에 다른 사회에서 인정이 어떤 유형들로 구분될 수 있을지, 아니면 인정 개념이 여전히 유효할지는 호네트에게는 전적으로 열려있는 문제입니다. 

비판이론은 항상 현 사회의 병리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해방의 계기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해방의 주체의 자리를 비워두었다는데서 폭넓은 논의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인정투쟁의 주체, 다시 말해 사회의 변혁과 해방의 주체는 구조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호네트에게는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지위를 갖는 해방의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방의 주체의 자리는 항상 사회적 고통의 현상들을 위해 비워져 있습니다. 그 자리는 프롤레타리아트든, 여성이든, 난민이든, 성소수자든 상관없이 사회적 고통을 경험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열려있는 자리입니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저는 이러한 개방성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비판적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정이론은 다양한 사회운동이나 비판적 사회이론들과의 대화할 여지가 있고, 현 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는데 유용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호네트의 인정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시대의 다양한 형태의 무시와 인정투쟁에 주목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강사소개

백선우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철학을 전공했고,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독일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비판이론을 공부했다. 석사과정 수료 후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으로 논문을 준비중이다.


 

 

  • 일시 : 2019년 1월 17일 ~ 2월 14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5주간)
  • 장소 서교인문사회연구실
  • 정원 : 20명 
  • 강좌회비 : 10만원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2-239-531656 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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