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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강독3] "<지식의 고고학> 읽기" 강사 인터뷰 첫 번째2018-08-08 16: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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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강독 강좌 인터뷰 전반부

 

인터뷰 질문 및 정리: 배경진 & 조지훈



 

Q 오늘날 연구자는 물론 인문교양 독자들에게도 푸코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토록 푸코가 광범위하고도 오랫동안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뭘까요?

 

A 국내에서 푸코는 비평 이론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그 이후로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정치이론, 문화연구와 같은 다양한 분과학문의 장 속에서 푸코가 읽히고, 활용이 되어 왔어요.

 더불어 푸코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시기별로도 달라지죠. 가령, 푸코의 저작이 처음 소개되던 당시에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던 당시 지적 유행과 관련되어 푸코가 주목받았죠. <광기의 역사>와 같은 경우에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불명확한 경계라는 맥락,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말과 사물>은 지식의 조건이 시대적으로 변화하는 상대적 차원라는 관점에서 읽힙니다. 이후 <감시와 처벌>은 주체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 다시 말해 규율(discipline)이라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에 의해서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중요하게 읽혔죠. <성의 역사> 같은 경우에는 섹슈얼리티도 각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이성애는 담론, 혹은 지식-권력의 효과라는 점이 강조되었어요.


사실 푸코적 테마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90년대들어서, 구소련을 비롯한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국내에서는 문민정부의 출현이라는 한국사회의 변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80년대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경제를 중심으로 한 역사이론 등과 같은 거대이론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라는 지적 맥락 안에서 푸코의 논점들에 지적 관심이 모아졌던 거지요.

 그러다 푸코에 대한 관심이 한동안 사그러들었다가 가의 강의록들이 출판되면서 다시 푸코가 열심히 읽혔죠.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신자유주의화된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통치성과 생명정치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죠. 이러한 맥락들을 살펴보면, 적어도 국내에선 푸코가 한 명의 철학자로서 그의 사상적 핵심들이 연구되었다기보다는, 그가 연구한 다양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읽혀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Q 이미 충분히 읽히고 있는 푸코를 강독을 통해서 꼼꼼하게 다시 읽는다고 했을 때, 강사님만의 어떤 문제의식이 있으신 건지 궁금합니다.

 

A <지식의 고고학> 강독은 서교인문화연구실에서 일 년간 마련한 강독 강좌의 일환입니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구조주의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1960년대에 작업한 일련의 철학자들을 읽자는 기획이었죠. 그 철학자들 가운데 푸코를 뺄 수 없으니, 이번에 푸코를 읽는다는 건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필 푸코의 많고 많은 텍스트 중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읽으려는 이유는 우선 강독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과 관련이 깊습니다. 강독이 필요한 텍스트는 주로 이론적적인 밀도가 높은 텍스트들이잖아요? 따라서 강독강좌에서 푸코를 읽겠다는 건 그를 사회분석이나 정치철학 혹은 문화연구의 맥락이 아니라 철학적 맥락에서 보겠다는 거죠. 철학적 저작으로서 그의 텍스트를 꼼꼼히 함께 읽어보자는 거예요. 그의 이론적 테마나 개념들로 어떻게 정치나 사회 혹은 문화를 분석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식의 고고학>은 꽤나 어렵습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책은 푸코가 쓴 글 중에 가장 추상도가 높아요. <지식의 고고학>에는, 푸코가 다루는 연구 주제의 다양함과 시기별로 강조점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들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기저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그 기저란 그의 철학적 작업이 갖는 독특성과 관련되구요.

 

Q 푸코를 철학자로 다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A 푸코가 철학자로 명명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새로운 철학적 사고의 대상과 방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죠. 물론 이때 철학은 전통적 철학, 혹은 제도화된 학문분과가 규정하는 철학으로 한정되지는 않죠.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역사과학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어요. 즉 역사유물론이라는 연구대상이자 방법론의 수립이지요. 물론 역사과학 내지 역사유물론은 좁은 의미, 제도학문적 의미에서 철학이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유의 지평을 근본부터 재규정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는 프로이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죠.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죠. 이를 통해 사유의 지평을 그 역시 근본부터 재규정했죠.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철학, 사유의 지평을 근본부터 재규정하게 만드는 대상과 방법론은 무엇일까? 그게 바로 담론이라는 대륙이예요. 푸코가 발견한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서의 담론, 담론을 연구하는 방법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루어야할 텍스트가 <지식의 고고학>인 것이죠.

 

 
  
 


Q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푸코에게 <지식의 고고학>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처럼 이론적인 주저라고 얘기할 수 있을만한 텍스트인가요?

 

A 푸코 자신이 이 책은 그 이전 자기 작업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 작업이라고 얘기를 해요. <지식의 고고학>은 푸코가 1960년대부터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그리고 <말과 사물>까지의 큰 책들을 쓰고 난 다음에 자기가 어떠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러한 역사적 분석이 전제하고 있는 이론적 관점과 방법론을 체계화시키는 저작이예요.

 


Q 책 제목에 붙은 고고학이라는 명칭이 흥미롭습니다. 지식의 고고학은 유물을 발굴하듯 오래된 지식을 발굴하는 작업을 뜻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오래된 문헌을 조사하는 문헌학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A 푸코의 고고학은 다름 아니라 지식의 고고학입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가 말하는 지식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요. 불어에서 지식을 뜻하는 말에는 savoirconnaissance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학적 논의에서 지식이라고 했을 때, 아주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규정된 지식을 불어에서는 connaissance라고 표기해요. 그런데 이런 과학적 엄밀성 자체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 했지만,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의 문화를 파악하며 심지어 자연을 인식하는 수준의 또 다른 형태의 지식이 있어요. 그런 수준의 지식을 savoir라고 하는데, 제 생각에 connaissance인식내지는 지식이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savoir는 그냥 이라고 번역하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국내에서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번역 된 책은 <앎의 고고학>이라고 해야겠죠. ‘L’archéologie du savoir’이 이 책의 원제예요. 그러니까 connaissance(과학적 지식 내지는 인식)archéologie(고고학)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푸코가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인 앎, savoir예요.



그렇다면 고고학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땅을 파 봐요. 가령, 10미터쯤 팠어요. 그랬더니 여기에서 토기들이 나오는데, 간석기가 나와요. 그러면 이걸 보고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죠. 또 다른 땅을 한 20미터쯤 파보니 청동검이 나와요, 그러면 청동기라는 걸 알 수 있죠. 단순하게 말해 이런 작업을 고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굴한 유물들을 기준으로 그 시대에 전제된 문명을 추론합니다. 청동검이 나왔다면 주변에서 거푸집이 바로 발견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근처에 거푸집이 반드시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그러니까 청동검 하나에는 그 자체로 이미 청동기 문명의 네트워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푸코가 보기에 우리의 앎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의 앎도 시대적인 지층이 있다는 거예요. 그 시대에 형성된 구체적인 앎들, 가령 17-18세기 정치경제학 책들을 보면 이런 앎은 어떤 조건에서 형성 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시대별로 앎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어떤 대상이 인식가능한 것이 되고, 인식하고, 분류하고, 개념화하는 방식들, 다시 말해 그 대상을 다른 대상과 연결하는 방식들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처럼 시대별로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특정한 시대별로 앎의 조건들, 앎의 문명들이 다르다는 게 푸코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앎의 고고학이라는 것은 시대별로 앎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조직되고, 체계화 되는가, 다시 말해 앎의 형성 및 작동 조건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앎의 고고학’ (‘지식의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앎의 고고학은 앎의 조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문헌학과 달라집니다. 문헌학은 기본적으로 해석학의 맥락에서 나와요. 하나의 텍스트에 나타난 표면적인 의미보다도 더 깊은 심층적 차원의 의미를 파고드는 것이 해석학의 작업이죠. 그러니까 하나의 텍스트가 과거의 어떤 텍스트와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하나의 텍스트가 판본별로 어떻게 다른지 등등 텍스트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는 학문이 문헌학이죠.

 반면에 푸코의 작업은 텍스트 그 자체보다도 텍스트의 앎이 만들어진 조건들과 앎을 가능하게 했던 환경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상이한 텍스트들을 관통하고 있는 앎의 구조화 방식을 연구하는 게 고고학인 것이죠. 고고학은 텍스트의 심층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텍스트가 어떤 자장 속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이어 두번째 인터뷰에서 푸코의 담론과 권력 이론에 대한 강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강사소개


정정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인권과 인권들>(제8회 일곡유인호 학술상 수상작)과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을 썼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출강 중이며,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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