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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강독 시리즈 2]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강사 인터뷰 두번째!!2018-04-28 1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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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강독 강좌 인터뷰 파트2





(첫번째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5. 데리다가 말이나 직접성의 특권화를 비판한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말 혹은 직접적인 것의 특권화를 비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데리다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부분이 바로 ‘매개 없는 직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감각으로도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 정말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직접적’이라는 수식어로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의 현전(presence)이 특권화되었죠. 특히나 이는 현상학에서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를 데리다는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통칭합니다.


데리다에 따르면 현전과 같은 그 자체로 주어지는 순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생생한 체험도 기호에 의해 매개되어야 인지됩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는 물론이고 스스로 어떤 경험을 했다고 인지할 때도 말이죠. 이런 면에서 데리다는 구조주의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 합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실천이 개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서 규제된다고 보는 사상이니 말이죠. 더군다나 구조는 기호들의 체계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구조주의와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구조주의가 기호를 마치 처음부터 이 세계에 주어져있는 체계처럼 다루고 있다면, 데리다는 기호를 흔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접근법이 다릅니다. 흔적은 부재하는 것도 현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진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의 흔적은 발자국의 주인이 부재하는 상태이지만, 또한 발자국이라는 형태로 남겨져있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흔적은 우리에게 현존과 부재의 운동을 사유하게 만듭니다. 데리다의 사유가 구조주의보다 한발 나아갔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기호를 이미 존재하는 대상으로 전제하지 않고, 흔적이라는 독특한 운동 속에서 사유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기호의 개념을 확장하여 ‘글쓰기’라고 명명한 것이죠.






    






6. 데리다는 정치철학에서 많이 인용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던 직접성에 대한 비판이나 흔적으로서의 글쓰기 같은 내용들이 여기에 관련이 있나요?

   


‘글쓰기’는 ‘대리보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정치철학적인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대리보충은 루소가 ‘글쓰기’를 ‘이 위험한 대리보충...’으로 표현한 것을 데리다가 차용한 개념입니다. 루소는 ‘글쓰기’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글쓰기’는 ‘말’을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도구인 동시에, ‘말’을 항상 오해하게 만들고 이를 초과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죠.


앞서 데리다가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던 것처럼, 루소의 사상에서도 직접적인 ‘말’이 이를 매개하는 ‘글쓰기’보다 특권화되고 있는 것이죠. 다만 루소에게 특이한 점은 그렇게 매개하는 것이 원본을 초과할 만큼 위험한 위상에 놓여있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리보충의 논리로 매개를 사유하게 되었을 때, 원본과 매개의 역학 관계가 뒤집어집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원본이 매개에 의해 오해되고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면, 매개야말로 좀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매개가 근원이라고 한다면 사실 근원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여기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면모가 열립니다. 루소 혹은 이를 인용하는 데리다에 따르면 사회는 자연의 대리보충물로 존재합니다. 사회는 자연의 결핍을 보충하는 동시에 자연을 초과하고 이를 오염시키는 성향이 있는 것이죠. 데리다가 보기에 사회 없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이라는 개념을 명명할 때 우리는 이를 사회라는 대리보충물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데리다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원시민족을 사회 이전의 자연스러운 공동체로 상정하는 대목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자연은 정글이나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장소를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평등, 정의, 해방, 공동체와 같이 일정하게 전제되어 있는 이념들도 ‘자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이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사회를 통해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이념을 허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회는 언제나 자신이 상정하는 ‘자연적인’ 이념과 함께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할 뿐이죠. 이념은 사회적 제도들과 구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제도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한 이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념들은 늘 사회 속에서 마련되는 제도적 실천을 통해 매개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왜곡되고 심지어 원래의 자연적인 이념을 초과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연적인 이념과 사회적인 제도의 대리보충적인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 데리다에겐 정치를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아닌 ‘철학’의 영역에서 탐구하는 작업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7. 수업 시간에 특별히 주목해서 다루는 부분은 어떤 건가요?

데리다는 “해체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해체는 그저 텍스트에 드러난 이항대립을 트집 잡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항대립에 개입할 것인지를 타진해보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데리다가 수행하는 해체는 맥락(context)적 개입을 통해 텍스트(text)로 진입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독해의 기술만이 아니라 개입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번 수업 시간을 통해서는 해체적 독법만이 아니라 데리다가 해체를 통해 개입하는 맥락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기존의 한국에서 출간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번역본들의 번역 상태가 안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렇지만 전설로 회자되는 번역서들만큼 읽을 수 없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시간이 된다면 오역들도 잡아가겠지만, 저는 여전히 데리다의 사유를 입문하기 가장 좋은 길은 맥락을 짚어나가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 상태에 너무 큰 근심을 갖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큰그림을 같이 그려 나가보면 좋겠습니다.

   




 

8. 많은 수강생들이 어려워 보여서 주저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수강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어려운 철학책을 쉽게 읽는 방법은 자세히 읽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꼼꼼하게 읽으면 난해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더 명쾌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독 강좌는 데리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나 현대 철학 입문자들에게 적극 추천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같이 읽으며, 난해하다고 소문난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사: 조지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구조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롤랑 바르트로 학위를 받았다. <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롤랑 바르트의 아마추어적 실천>, <이미지의 영도를 개념화하기>, <슈레버의 사례에 대한 분열분석적 진단>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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