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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교연 2020 강독강좌] "상징폭력과 계급: 부르디외의 계급사회학" 강사 인터뷰 part 1.2019-12-15 19: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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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연 2020 강독강좌 시리즈6] '상징폭력과 계급: 부르디외의 계급사회학' 강사 인터뷰 part 1.

Q1.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만 그의 책은 제대로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서교연에서도 처음 다루는 학자인데요,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부르디외의 글은 만연체에다가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아서 많은 연구자들이 기피하는 학자 중에 한 명입니다(^^;). 그의 문체는 '글을 더럽게 못쓴다'는 악평과 '아름답다'는 엇갈린 평가가 상존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의 문체는 결코 읽기가 쉽지 않지만 (다른 학자들의 글도 그렇듯이) 인내심을 갖고 읽다보면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가 납득이 되고 그의 통찰력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저와 함께 만연체의 '미학'(?)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ㅎㅎ).

아무튼 들어보셨겠지만, 부르디외는 분과학문으로서 사회학을 넘어서 문화연구, 인류학, 정치학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대사회학/이론의 거장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저 중 하나인 <구별짓기>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서 중에 하나로 꼽히며 이미 현대의 고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지적 궤적 자체가 철학에서 인류학으로, 또 사회학으로 발전했고, 인접학문에서 그의 이론적 성과를 수용, 참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류학의 '참여관찰' 방법론을 비판한 그의 '참여객관화' 이론은 인류학자들에게도 성찰적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성장은 처음부터 기성 부르주아 계급문화에 대한 반발심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동부 소도시 베아른의 말단 지방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스 엘리트 대학인 에꼴노르말에 입학했지만, 항상 동년배들의 상층계급문화에 소외감과 불편함을 느꼈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 중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하고 결국 사회학으로 '전향'하게 된 이유는 당시 지식(인) 장에서 '계급적대'(이런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를 수행하는 일이 부르주아 계급과 밀접하게 연동된 철학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철학(특히 형이상학)을 '스콜라적(학자적) 이성'의 오류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가령 <구별짓기>는 칸트 미학에 대한 비판이었지요.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대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들, 그리고 맑스주의자들까지 비판해 마지 않았습니다. 맑스주의자들은 현상을 너무 단순화시키고 규범적 대안만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알제리의 사회학>은 식민주의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고 말만 하는 당대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작업이었고,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은 하이데거 철학을 즉각적으로 나치즘으로 환원해서 비판하는 맑스주의자들(반영론)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대 지식(담론)장이 크게 객관주의(구조주의)와 주관주의(실존주의)로 구조화되어있다고 판단했고, 이 양자를 비판해서(혹은 변증법적으로 종합해서) '총체적 사회과학'을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사회학/사회이론은 프랑스와 영미권 사회과학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오늘날 다양한 (좌/우파) 부르디외주의자(Bourdieuan/ian/sian)들과 비판적 계승자들을 양산했습니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그 자신이 사회학이라는 학문 장의 신참자에서 지배자가 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사회학 장(의 구조-행위 아포리아)은 부르디외의 문제틀(장-아비투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나마) 구조화되었고, 현대의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의 이론들을 비판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2. 부르디외가 계급과 사회를 설명하면서 ‘상징xx’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상징’이라는 것은 어떤 용어로 쓰이는 것일까요? ‘상징’이라는 말은 상징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인지요? ‘상징’이 중요하다면 왜 그런 것인지요?
 
부르디외에게 ‘상징’은 권력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말하자면, 지배가 관철되는 방식이 상징적이라는 것이지요. ‘상징자본’, ‘상징권력’, ‘상징적 지배’, ‘상징폭력’과 같은 개념들에서 ‘상징’은 정당화된 지배의 문화적 논리를 의미합니다. 즉 권력이 정당한 것이 되는 과정에 상징적인 것이 필수적으로 매개되거나 개입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상징은 ‘차별적이고 대립된 관계들의 표상체계’로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들의 관계적 체계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는 일종의 기호로 인식되고 기능합니다. 이 상징들의 체계는 이른바 ‘구별짓기’라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하는 문화적 논리입니다. 

‘분류체계’라고도 하는 이 인지적 기제를 통해서 사람들은 사회적 실재의 객관성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 사회적 세계 역시 물리적이거나 경제적인 관계구조로만 파악할 수 없고 객관적 관계구조를 정당화하는 의미구조를 통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즉 오늘날 사회적 공간은 상징적으로 구성된 공간(들의 총합)에 다름아니며, 사람들은 상징적 분류체계의 체화를 통해서 이 사회적 공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역시 상징적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하지만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분류체계의 적용규칙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지배 이데올로기는 정당화되고 자연화된 문화적 매개의 승인을 통해서만 온전한 지배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이란 착취와 지배가 정당성과 합리화의 기제를 통해서 ‘완곡화’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시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부르디외를 이를 ‘상징적 연금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상징의 ‘완곡화’ 효과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의 형태를 띠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배는 노골적인 경제적 이해타산이나 세속적인 ‘권력욕’과 같은 방식보다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부정’에 의해 더 효과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이지요. 부르디외는 이를 가리켜 ‘반경제적 경제’라고 설명했습니다. 노골적인 지배의 효율과 이익(경제)을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효율적 지배(경제)를 달성한다는 것이지요. 부르디외는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를 폈는데요. 예컨대 교회와 성직자들 역시 경제적 이익을 부정하고 그것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서만 종교적 권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징은 바로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부정함으로써만 물질적 세계를 재생산할 수 있는 근대세계의 작동 원리인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과 연결되는데요) 이러한 논리에 따라 계급 역시 자명한 실체적 속성에 의해 규범적으로 구분되는 집단범주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동형적인) 다양한 장들 간의 교차점(또는 교차성) 속에서 생산되거나 구성 또는 해석되는 ‘표상들의 대립적 범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Q 3. 부르디외의 이론은 계급, 국가, 사회를 주요한 타겟으로 잡고 사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르디외에게는 정확히 가시적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배와 피지배, 강자와 약자 라는 명명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한 이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급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은 비정규직 안에서도 단계가 나뉘어지고 하청노동이 노동환경에 노출되는 형태만 보아도 그렇구요. 그럼 계급투쟁이라는 것이 고전적인 정의를 벗어나서 끝없이 나뉘어지고 나뉘어지는 현 시점에서 부르디외의 계급론은 현재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계급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넘어서 현재성을 사유하기 위해서 저는 부르디외를 공부합니다. 저는 부르디외가 신자유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에 대한 적절한 참조점과 상상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계급을 ‘고전적인’ 맑스나 베버, 어느 한쪽에만 기대어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르디외가 맑스주의자냐 아니면 베버주의자냐, 또는 뒤르켐주의자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이에 관해서는 보다 섬세한 이론적 해부를 통해 더 깊은 이해해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은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자신을 차별화하듯) 특정한 ‘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고전적인 계급(론)의 인식론적 전제들을 해체하고 필요한 이론적 자원들을 가져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할 뿐이었죠. 

물론 그는 세계를 객관적인 위치들의 차별적 공간, 불평등한 자원배분 공간으로 파악함으로써 질문자의 말씀처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동학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성공적인 투쟁전략을 통해 장의 지배자가 된 행위자는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요? 그 행위자 역시도 신참자들의 입장에서 도전해야할 투쟁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즉 고전적인 계급투쟁의 궁극적 완성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역사의 목적 같은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세계는 여러 영역(장)으로 분화되어 있고 각각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모든 영역에서 필연적이고도 자동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각각의 사회영역은 저마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부르디외는 모든 영역(장)들을 초월하는 ‘메타적’ 계급투쟁의 공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투쟁을 결정짓는데 핵심적인 영역이 바로 국가입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각 사회영역의 고유 자본(가치)의 전환율을 결정하는 '상징폭력의 독점기관'입니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모든 자원과 전략을 총동원해서 벌어지는 (고전적 계급이 아닌) 전체 ‘사회계급’들 간의 투쟁이 벌어지는 영역을 ‘권력 장’으로 규정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서로 다른 영역들이라 할지라도 위계적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장들 간의 ‘구조적 상동성’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장 이론은 오늘날 분화된 각각의 사회영역들 내부의 고유 논리, 즉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의 권력자원배분(구조)이 다른 장들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또한 전체 사회의 지배구조와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즉 현대사회에서 전체 사회공간은 전문적 장들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은 (구조적으로 동형적인) 여러 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의 전체적 효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고전적인’ 계급투쟁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전체 사회의 지배문제를 간과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 강좌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것이 부르디외 이론의 계급정치학적 함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강사소개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사회학 연구자. 서강대, 서울과기대, 말과활아카데미, 서교예술실험센터, 연구집단 카이로스 등 대학 안팎에서 다년간 현대사회이론, 문화이론, 사회과학철학/방법론, 과학/지식사회학, 문화/종교사회학 등을 강의했으며, 부르디외를 활용하여 사회 및 정치, 종교현상을 설명하는 논문들을 썼다. 극우정치와 혐오동학을 연구하고 있다.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좌정보 

일시: 2020년 1월 11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3시(10강) (1월 25일 휴강) 

장소서교인문사회연구실 강당(마포구 잔다리로 60. 합정역 2번 출구 부근, 중화요리 '시향' 건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원: 20

회비: 20만원

입금계좌3333-07-4776628 카카오뱅크(정우준)

*강의 시작 후 회비 환불이 어렵습니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프로그램 회비는 연구자들의 재생산과 연구실 유지에 사용됩니다. 함께 공부하는 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상세안내 >>> http://seogyo.net/lecture?board_name=lecture&mode=view&search_field=fn_title&order_by=fn_pid&order_type=desc&board_page=1&list_type=list&board_pid=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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