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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1주차 발제]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흑인페미니즘사상 4장2019-06-07 11: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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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정희진,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임당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여성주의 언어


  정희진은 이 글에서 ‘페미니즘의 대중화’라고 불리는 현상 속에서 ‘피해자-운동가-연구자’를 지향하는 고민을 담고 있다. 여성은 지나치게 각성하고, 남성은 술에 덜 깬 상황이라는 비유는 젠더 전쟁이 쉽사리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련의 사건들은 이러한 젠더전쟁의 지속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연대를 단절하려는 내부의 전쟁 또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가장 위계가 덜한 사상이다. 반면 한국 사회 운동은 언제나 ‘우선’과 ‘나중에’의 정치가 횡행하는 장이었다. 성차별 문제는 민족 문제, 노동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선’과 ‘나중에’의 프레임은 인간의 위계를 전제한 발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권에는 경합이 있을 뿐 순서는 없다. 정희진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주의의 대표적 개념들인 ‘피해’,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 ‘신자유주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에게 유일한 자원인 새로운 언어와 윤리를 가짐으로써 ‘인식론적 권력’을 가지기 위함이다. 


피해는 사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정치의 산물이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피해 사실은 만들어 가야 할 역사이다. 광주사태가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세월호가 국가폭력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담론적 실천’을 통한 페미니즘적 해석과 이름 붙이기의 투쟁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다. 다수의 성폭력 피해가 법적인 처벌을 피해가는 것은, 법적인 피해 사실을 성립하려 할 때 피해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 역시 그 판단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자연스럽게 허용되어 온 남성의 권리였기 때문이다.

  피해는 그 자체로 진실이 될 수 없고 투쟁으로 획득되는 영역에 있으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서 피해자 역시 ‘피해자 되기’를 통해 피해자로서의 위치성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


  정체성은 “개인이 특정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모두가 똑같은 ‘동일성’의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일하지 않음에도 동일시하는 세계를 살아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은 모두 국내에서 대표적인 정체성의 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성방식은 전혀 다르다. 민족주의는 ‘동일성’을 구성해내기 위해 남성 주체를 호명함으로써 젠더 정치를 수행하고 여성을 배제한다. ‘남성은 자신을 민족으로, 여성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정치가 민족주의인 것이다. 민족주의는 내부를 단결시키고 하나로 봉합하려는 시도로 구성되고, 사람들간의 차이와 차별의 문제를 가리려는 목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페미니즘 정치는 이러한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에 차이를 제기하면서 등장했다. 억압받는 여성의 범주를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하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체성을 피해자로 본질화할 때 발생한다. 피해자성을 근간으로 한 정체성의 정치는 강력해지지만, 집단 내부에서 고통의 위계를 산정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실존이 주변화, 배제, 종속의 상처를 통해 증명하기 때문이다. 피해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여성을 보편성으로 묶어내어 ‘동일성’을 추구하기에 페미니즘적인 방식이 아니다. 실제로 여성이라는 집단 내부 역시 차이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성의 몸과 피해자 정치성의 정치


  가부장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차별적 해석에서 시작되었다. 여성 정체성은 남성이 아닌 몸이자, 몸 그 자체로 환원된다. 이는 성차별 사회가 여성의 몸에 부과한 사회적 평가에서 비롯된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몸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관점에서 통제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여성을 몸으로 환원시켜 동질화하려는 시도는 남성 사회의 법칙을 답습하는 것이 된다. 여성을 피해자 정체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이다. 피억압자가 스스로 피해자화 함으로써 남성 권력이 바라는 여성의 위치성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된다. 거의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나이, 외모, 피해자성을 자원으로 삼아 불가피한 생존 전략을 취한다. 그렇지만 피해자성을 중심에 두었을 때 페미니즘은 타자와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는 타자와 연대하거나 지배세력이 원하는 피해자가 되거나 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페미니즘

  

  신자유주의는 젠더법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자본의 연결망은 개인으로 하여금 다양한 위치성을 갖게 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화가 개인의 주체성을 국민, 소비자, 이주민 등으로 재구성해 낸 것이다. 주권과 영토는 불일치하고, 노동 시간과 이익은 무관해졌다. 정의로서 평등은 사라진 반면, 누구나 다 똑같다는 같음으로서의 평등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호출한 개인은 여성에게 기회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자본주의에서의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은 극도로 제한된 것이기에 곧 난관에 봉착했다. 온라인은 개인에게 똑같이 자아를 위한 영토를 주었지만, 사람들간의 공감과 연대 줄이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나 가부장제의 규범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익 집단으로서의 페미니즘’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젠더는 여성이 아니며,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호출한 “평등한” 개인은, 여성으로 하여금 페미니즘을 ‘피해자’로 생존하기 이한 전략으로 꺼내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희진은 이러한 방식의 페미니즘 대중화는 절대로 여성의 지위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페미니즘을 자본주의의 먹이로 던져주는 꼴이라고 비판한다. 젠더는 오로지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복합적이기에 횡단의 정치를 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유모, 가모장, 그리고 흑인여성을 억압하는 통제적 이미지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임당


 서로 교차하는 억압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흑인여성에 대한 억압을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는 흑인여성을 통제적 이미지에 가두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통제적 이미지는 그 맥락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억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정상성의 경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병행한다.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도전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 주제가 된다.


타자로서 흑인여성의 대상화


  흑인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이항적 사유방식하에서 탄생한다. 사람, 사물 관념 등 둘 사이의 대립적 차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관념이 그것이다. 주의할 점은 두 개의 항이 동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심이 되는 한쪽이 나머지 한쪽을 대상화시켜 타자로 만드는 것이 이항대립의 기본이다. 두 항의 불평등한 관계는 이항대립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흑인여성에 대해 작동하는 교차적인 억압은 이항적 사유, 대립적 차이, 대상화, 사회적 위계등의 요소들로 구성된다. 흑인여성의 투쟁사는 현실을 스스로 정의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역사를 명명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이항대립의 비대칭성이 생산한 부정의와 불안정성의 틈새를 파고든 저항이었다. 


통제적 이미지와 흑인여성억압


 1) 흑인 유모 mammies

흑인여성에게 부과된 첫 번째 이미지는, 충실하고 순종적인 가사노동자 하인의 이미지이다. 흑인 유모는 백인남성의 권력을 중심으로 배열되는 가족체계 하에서 흑인여성에게 요구되는 이상적인 자리인 것이다. 유모 이미지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억압에 핵심적이다. 백인들은 유모 이미지를 통해 유모가 아닌 흑인여성이나 심지어 아이들을 모두 유모로 대하는 태도를 기르고, 흑인들은 백인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이고 존경심을 가지는 태도를 학습한다. 또한 흑인여성의 유모 이미지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억압 전반을 지속시킨다. 서구 문화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존속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생성되는 긴장감과 공포를 흑인 유모 이미지에 우겨넣음으로써 흑인 여성에 대립하는 백인 여성의 이미지까지 억압적으로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2) 흑인가모장 Black matriarch

두 번째 이미지는 흑인 가정의 빈곤함을 가리고 흑인 권리 운동의 싹을 자르기 위해 필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흑인에 대한 정치적 권리박탈과 경제적 착취를 지속시기키 위해서는, 밖에서 일하느라 제대로 흑인 가정을 돌보지 못해 가정을 엉망으로 만드는 나쁜 흑인어머니의 상이 필요한 것이다. 흑인가모장 이미지는 흑인여성의 순종적 자리를 거부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 낙인이다. 흑인가모장이 구성하는 가정에서 아이들은 관심과 사랑을 덜 받는 결핍된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 하에서 인종적 행위규범과 젠더 행위규범을 모두 거스른 흑인 여성은 자신을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공격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여성은 남성을 거세하는 어머니로 재현되는 이미지를 통해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3) 복지수당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welfare mother

세 번째 이미지는, 복지수당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이는 흑인여성이 정치적 힘과 국가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요구하였을 때 필요한 이미지이다. 흑인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보호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제조업과 농업 분야의 경제적 기회가 줄어들면서 맞물려 획득되었다. 흑인이 담당하던 저임금 일자리가 수출되거나 이주민으로 대체되는 동안, 여성과 아동은 잉여인구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동물처럼 아이를 많이 낳는 흑인여성의 “번식력”은 이번에는 미국에 대한 위협이기에 통제될 필요가 있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에 들어서 복지수당여왕이라는 이미지라는 더 혹독한 이미지로 진화한다. 가난한 흑인여성은 미국의 사회복지관련 지출 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로 활용되었다. 흑인이 처한 불리한 상황은 모두 흑인여성에게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4) 제제벨, 창녀, 혹은 “후치”

마지막 통제적 이미지는 흑인여성의 억압의 핵심인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위해 날조되었다.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일탈적이라는 것이 이 통제의 핵심이다. 과도한 성욕, 성적인 자유분방함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흑인여성의 이미지는, 백인남성의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흑인여성에 대한 혐오를 지속시키는 방식으로 억압을 작동시킨다. 이와 맞물려 생산되는 것은 능동적 남성과 수동적 여성을 한 쌍으로 하는 이성애적 규범, 후치나 제제벨과 한 쌍이 되는 초강력남성성을 보유한 흑인남성의 이미지, 일탈적인 섹슈얼리티 전반에 대한 경계를 긋는다. 이러한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핵심에 두고 유모, 가모장, 복지수당여왕을 둘러싼 지배적 이미지들이 서로 엮인다. 


통제적 이미지와 사회제도


  학교와 학문은 흑인여성을 둘러싼 통제적 이미지들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연구틀에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집어넣음으로써,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회적인 문제로 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전지구적 테크놀로지를 타고 흑인여성의 이미지를 유통한다. 힙합음악은 흑인여성을 마음껏 혐오하고, 각종 뮤비에서 흑인여성은 후치로 그려진다. 정부기관은 이러한 통제적 이미지를 합법화한다. 흑인청소녀의 임신과 자녀양육이 학문연구의 과도한 관심을 받고, 이에 맞춘 공공정책을 입안함으로써 흑인여성의 섹슈얼리티는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규범화된다. 정부가 흑인소녀에 대한 법과 정책을 생산할 때, 법이 “관리해야 할” 성적으로 향락적인 흑인소녀의 이미지 역시 강화되는 것이다. 백인 권력 중심의 사회뿐만 아니라 흑인 시민사회 역시 이러한 흑인여성의 통제적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장이다. 핍박과 학대를 견뎌온 흑인여성의 힘은, 흑인 사회의 통합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것이 흑인여성임을 재차 강조한다. 흑인대학에서, 흑인교회에서 그리고 흑인가족과 흑인단체에서 흑인여성은 그 공동체를 지속시키기 위한 뒷배경으로 존재해야 한다. 인종억압에 대항하는 흑인 공동체 내부에서조차 흑인여성은 타자화되는 것이다. 


피부색, 머릿결, 그리고 미의 기준


  드러나는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속에 농밀하게 녹아든 가치들 역시 흑인여성에 대한 통제적 이미지를 지속시키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는 무엇이 미인지를 평가하는 대목에서 서로 맞물린다.” 지배적인 미의 기준으로 제세되는 흰 피부와 곧은 머릿결, 금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종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흑인/백인의 대립적 차이에 근거한 인종차별주의의 부산물이다. 사회적 위계가 피부색에 근거해 협상되고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흑인여성 서로 간에도 위계를 생산하고, 고통을 주고받게 만듦으로써 흑인여성간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통제적 이미지에 대한 흑인 여성의 반응


  그러나 억압적 상황이 흑인여성간의 분열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흑인여성에 대한 통제적 이미 하에서 흑인여성이 어떻게 사회적 현실을 구축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통제적 이미지가 도처에 퍼져있음에도 흑인여성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왔다. 흑인여성문학에서 두드러진 주제는 흑인여성의 내면화된 억압을 경험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흑인여성문학에서 등장하는 유예된 여성은 시간·공간적으로 유예되어, 고통, 폭력, 죽음으로 점철되는 삶을 살아간다. 등장인물들은 흑인여성의 고통스러운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창조하려다가 약물, 술, 과도한 종교 심지어는 광기속으로 숨어들어간다.

  흑인여성에 대한 통제적 이미지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부인denial이다. 일부 흑인여성은 다른 흑인여성들과의 연결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대접을 요구하기도 한다.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흑인이라는 정체성이 주는 자양분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여성에게 부과되는 통제적 이미지에 대한 저항을 통해 긍정적인 자기정의를 향해 가는 성장과정의 서사도 있다. 이러한 서사에서 인물들은 부정적인 흑인여성 이미지를 내면화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흑인여성성을 정의하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흑인여성문학에는 사회계급적 다양성이 반영되고, 흑인여성간의 연대 역시 새롭게 조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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