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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주차 쪽글] '보편 언어'의 허위를 넘어2019-05-24 16: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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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언어'의 허위를 넘어: 억압 논리와 주변화를 초월하는 무한한 글쓰기

 

도로시 앨리슨의 계급의 문제(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메이데이, 2012)와 킴벌리 크렌쇼의 인종과 성의 교차점 탈주변화하기(웹진 인-무브, 2018)70년대 레즈비언 페미니즘 이론이 주변화하고 있는 인물들을 다른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다. 앨리슨은 억압 논리에 의해 신화화되거나 무화되는 노동계층을 자전적 에세이를 통해 그려내며, 크렌쇼는 인종과 성 사이의 교차점이지만 기존의 차별 개념에서 주변화된 흑인 여성에 집중하여 논문을 구성한다. 두 글은 글의 형식이나 대상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온도차는 있을지언정, 여태껏 논의에서 비껴간 이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호명해 보편 언어를 가장하는 지배적 차별 담론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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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은 자신의 동성애적 지향이나 불우한 가정환경을 숨기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시도에 앞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요소는 () 끔찍하게 가난한 집안의 백인 여자의 사생아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62)이라고 밝힌다. 가난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앨리슨의 삶은 여러 층위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그 기원을 빈민을 신화화하는 문화에서 찾는다. 다음은 이에 대한 인용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눈에 띄지 말라고 부추겼다. 중산층이 만들어낸 고상한 빈민이라는 신화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책이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가난은 낭만적이다. 어떻게 가난에서 벗어났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65)

 

이 나라에는 빈민들에 대한 신화가 존재했지만, 내가 아무리 우겨 넣으려고 애를 써도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선량한 빈민이라는 관념이 있었다열심히 일하고, 해어진 옷이라도 깔끔하게 입고, 본래는 고귀하다는 식이었다. 나는 우리가 나쁜 빈민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는 고귀하지 않았고, 세상에 감사하거나 희망을 품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가족은 가난이 부끄러웠고, 가망 없고 무기력한 처지가 수치스러웠다.”(66)

 

미국 중산층이 만들어낸 고상한 빈민의 신화는 중산층의 성취를 찬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동원된다. 가난이라는 상태와 빈민이라는 정체성은 현재의 중산층이 극복한 배경으로 남지만, 빈민의 고상함은 가난의 극복을 이끈 원동력이자 미덕으로 중산층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앨리슨이 겪은 빈민의 현실은 이와 명백히 대치되는 가망없고 무기력한 처지지만, 중산층 빈민 신화는 모든 이들에게 내면화되어 현실의 빈민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 침묵시킨다. 앨리슨의 가족은 멸시받으면서도 스스로의 극복할 수 없는 가난을 부끄러워했고, 앨리슨 본인도 나중에 밝히듯이 신화 속 빈민의 하나가 되는 게 더 나았다”(70)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고등교육을 마친 앨리슨은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만 결국 70년대 말 한계를 느껴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당시 그가 마주한 한계는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설령 당신이 이런 상상 속 피조물의 일부가 아님을 알더라도 () 당신은 여전히 그런 헤게모니에 의해, 또는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런 동질화된 세계관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을 나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 나 역시 어느 이성애자나 비정치적인 시민처럼 어딘가에 속하고 싶고 안심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때로는 내 삶의 나머지가 온통 싸움터였기 때문에 이런 욕구가 더더욱 중요했다.”(64-65)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론은 계급 차이라던가 섹슈얼리티와 자아가 어떻게 욕망과 부정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이데올로기에는 우리 모두가 자매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의심을 레즈비언 공동체 바깥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 그런데 문제는 내 삶에서 문제가 된 모든 것을 단순 명쾌하게 가부장제나 근친상간의 탓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고 존재조차 부인되는 우리 사회의 계급 구조 탓으로 돌리기도 쉽지 않다.”(63)

 

앨리슨은 70년대 레즈비언 페미니즘과 그 구성원들이 헤게모니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전통적 페미니즘 이론은 헤게모니인 가부장제에 저항하고자 레즈비언 공동체를 구축하고, 모든 문제를 그 바깥인 가부장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개인 역시 헤게모니에 저항하면서 느끼는 삶의 피로감을 달래고자, 소속감을 갈구하며 레즈비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리잡는다. 앨리슨이 지적하는 것은 이 헤게모니의 저항적 반영, 즉 가부장제를 적으로 세우면서 당시의 페미니즘이 간과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다. 앨리슨은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가부장제나 근친상간의 문제로만 독해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오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앨리슨이 계급 문제를 인식의 틀로 차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중산층 사회가 현실의 빈민을 침묵시켰던 것도 있지만, 당시 페미니즘 공동체 내부의 계급적 편향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앨리슨이 공동체 활동 말기를 회고하며, “내가 사는 여성 공동체에는 노동계급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쓰라린 진실을 말할 공통의 언어가 없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83)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앨리슨은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주변화의 정치학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는”(88)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각에서 자신이 속했던 페미니스트 공동체는 성차별의 지평에서 가부장제와 맞섰기에, 계급적인 언어의 개발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밀려났다. 자신의 공동체에서 축출되면서까지 이러한 언어를 문학의 영역에서 개발한 앨리슨은 자신이 얻은 통찰을 글의 말미에서 밝힌다.

 

계급 층화, 인종차별, 편견 등이 끔찍한 이유는 어떤 이들은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전이 타인들을 억압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 유덕한 생활을 하려면 다른 이들은 절단되고 야만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믿음이 우리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 이런 신화 덕분에 어떤 이들은 타인들의 파멸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운다고 상상할 수 있다. 중산층이 느끼는 수치심의 은밀한 고갱이이자, 주변부의 노동계급을 닦달하는 채찍이며, 노숙자와 빈민 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증오나 폭력을 휘두르는 원인이다.”(87-88)

 

계급적인 언어로 보았을 때, 빈민 신화를 통해 앨리슨을 경제계급의 측면에서 압박한 억압의 논리는 미국 문화를 지배하고 경제계급 이외의 측면에서도 재현된다. 그리고 이를 자행하는 것은 이성애적 백인 중산층에서 페미니스트 공동체까지, 의도와 상관없이 억압의 논리를 내면화한 구성원 전원이다. 이 논리에서 저항하고 벗어나기 위해서, 앨리슨은 개인이 스스로를 흠이 있고 보통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야야 한다”(88)고 주장한다. 앨리슨이 문학을 통해 성취한 이러한 접근은, 억압의 논리를 어떤 식으로든 담지하는 언어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신의 배경을 온전히 감싸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개인적 차원의 글쓰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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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성의 교차점 탈주변화하기인종과 젠더를 서로 배타적인 경험 및 분석 범주로 취급하는 문제적 경향을 초월하는 흑인 페미니스트 비평을 발전시키려는 내[크렌쇼의] 노력이다.(1-2) 89년에 발표된 이 논문에서, 크렌쇼는 당시의 페미니즘 이론과 반인종주의 정치가 차별을 성이나 인종의 문제로 일원화하면서 해당 집단 내부의 특권계층을 중심으로 정의하는 흐름을 포착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흐름은 인종이나 성별 요소만 아니면 충분히 특권을 누렸을 사람들”(10)인 백인 여성이나 흑인 남성을 기준으로 차별을 정의하여,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교차하는 흑인 여성의 경험을 규명하지 못한다.

 

핵심은 흑인 여성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을 겪을 수 있기에, 그들이 차별을 소명할 때 반드시 일방향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나는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 및 흑인 남성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차별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때로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이 겪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또 때로는 흑인 남성과 비슷한 차별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중적 차별 인종에 기반한 차별과 성별에 기반한 차별이 함께 가해지며 나타나는 복합적 효과- 을 겪을 때도 많다. 그리고 때로 그들은 흑인 여성으로서 차별을 겪는다. 이는 그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합친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 맞닥뜨리는 고유의 차별이다.”(8)

 

요컨대 크렌쇼는 흑인 여성의 차별 경험이 백인 여성이나 흑인 남성의 경험과는 달리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복합적 교차로 이루어져, 이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성이나 인종으로 차별을 일원화하고 분리하는 정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흑인 여성의 차별 경험을 교차로에 비유하며 창안한 차별의 교차성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지칭하는 것이다. 크렌쇼는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페미니즘의 강간 비판과 흑인 여성 가부장에 대한 흑인 공동체 내부의 공공정책 논쟁을 다룬다.

 

즉 인종주의적 지배 하에서 흑인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하는 동시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 () 종합하자면, 순결에 대한 성차별적 기대와 성생활이 난잡할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가정이 결합해 흑인 여성을 둘러싼 별개의 이슈들을 만들어냈다. () 결과적으로 흑인 여성은 성폭력 문제에 대한 소송 시도들을 당연히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흑인 집단과, 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만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의심을 부채질하는 페미니스트 집단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15)

 

기성 페미니즘은 강간법의 목표가 여성의 보호가 아닌 여성 순결의 재산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크렌쇼는 사실 이것이 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백인 남성의 규제에 한정된다고 지적한다.(14) 흑인 여성의 순결은 주법원에서 공개적으로 부정되어, 규제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강간이 흑인 여성을 향한 백인 남성의 인종적 테러의 무기“(15)로 사용되는 측면을 은폐하는 결과도 낳는다. 기성 페미니즘은 강간을 남성의 재산 강탈 및 정복 행위로 분석하기에, 이미 순결이 부정된 흑인 여성의 강간이 갖는 특수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 보호라는 강간법의 목적이 에밋 틸 사건처럼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 역사적 맥락도 있기에, 흑인 여성은 여러 조류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부분적으로만 인정받는 양가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윌슨]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흑인들의 일자리를 흑인 남성들에게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경제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성차별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윌슨은 흑인 비혼모를 직접적으로 자력화하고 지원하기 위한 경제·사회체제의 재구성 또한 고려하지 못했다. () 하지만 윌슨의 주장대로 사회구조를 재편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흑인 여성들의 선택권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19-20)

 

그렇다고 흑인 여성을 받아들이는 흑인 공동체의 방식이 크게 나은 것은 아니다. 다니엘 모이니한의 보고서부터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의 진정한 약자에 이르기까지, 흑인 남성 가장의 파괴와 흑인 여성 가장의 증가를 미국 흑인의 병폐의 증상으로 진단하는 공공정책적 논쟁은 인종차별의 맥락에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에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한 흑인 공동체마저도 대안의 중심에 흑인 남성을 배치하였고, 백인 페미니스트 집단은 이러한 가부장제적 주변화를 인종 문제로 간주하고 침묵하였다. 강간법 분석에서 그랬듯이, 흑인 여성의 경험은 일원론적 분석틀 사이에서 파편화되었다. 크렌쇼는 차별의 복합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의 원인을 해당 분석틀이 영향을 받은 단일 이슈들의 항목에 따라 분류할 수 있도록 정치를 구조화하는 방식에 두고, 차별 담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글을 마친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우리가 기존의 차별 개념 아래 감춰진 부분을 바라보고 현 체계에 안주해도 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관점에 비평적이고, 또한 통합적 활동에 일부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할 것이다. 이 활동의 목적은 () 그들[주변부에 있는 집단]을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20-21)

 

, 차별의 교차성을 고려함으로써, 페미니즘 이론과 반인종주의 정치는 기존의 분석틀의 한계를 반성하고, 여지껏 주변화된 이들을 논의의 중심에 세워 이들을 포함하는 개념과 관점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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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과 크렌쇼는 자신이 관찰한 운동의 내부적 배제를 지적하고, 이를 운동 바깥의 패권과 연관 짓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접근을 취한다. 앨리슨의 경우 이는 중산층 헤게모니, 나아가 억압 논리이며, 크렌쇼의 경우는 일원화된 정치 구조화 방식이다. 또한 그들은 운동 내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태껏 주변화된 이들을 언어를 개발하는 것을 해법으로 삼는 것에서도 일치한다. 단지 앨리슨의 저술은 자전적 에세이라는 글쓰기의 특성상 심리적인 전환과 실천적 방안과 같은 개인적 측면에서 전개되었고, 크렌쇼는 판례와 저술 등에서 근거를 찾는 논문을 통해 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앨리슨과 크렌쇼의 글은 기존 차별 담론의 보편적 언어가 갖는 배제적인 측면을 지적하여, 둘 사이의 차이점과 주제의 구체성을 초월한 새로운 담론과 언어 형성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차별 이론들을 상회하는 큰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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