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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 마주한 것은 ‘지형변화’인가 ‘혁명’인가2019-04-12 16: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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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2010)와 실비아 페데리치의 혁명의 영점(2013)은 신자유주의적 맥락에 놓인 페미니즘을 진단하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6장에서 제2물결 페미니즘에 대한 통속적인 진보에 대한 서사를 거부하고, 이를 세 국면으로 나누어 이에 대응하는 역사적 맥락과 젠더정의적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페데리치는 6장에서 9장까지 네 장에 걸쳐 신경제질서가 주도한 세계화의 해악을 꼬집고, 재상산노동에 주로 종사한 여성의 시각에서 이에 저항하고 있다. 두 학자는 유사한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사유를 선보이나, 페데리치의 전 지구적이고 복합적인 고찰에 비해 프레이저의 것은 여러모로 제한된 지점이 발견된다.

 

프레이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첫 번째 역사적 국면으로 1960년대의 신사회운동을 지목한다. “정치적 관심을 계급 간 분배 문제에만 국한시켰던 경제주의적 정치적 상상력을 변형시키려는 신사회운동에서 출발한 제2물결 페미니즘은 가사노동, , 출산을 정치적 주제에 포함하도록 저항의 범위를 확장시켰, “복지국가를 해체하기보다는 남성지배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것을 변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탈사회주의·신자유주의적 시대정신에 이끌려, 페미니즘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정체성정치의 형식문화적인 변혁의 기획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국면은 정체성정치가 정치경제적 변혁과 분배정의로부터 분리되는 특징을 지니고, 이는 복합적인 효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신분질서에 뿌리박고 있는 남성지배의 형태들에 주의를 집중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심화시키기보다는 대체하여 불완전한 경제주의를 불완전한 문화주의와 교환한 결과를 낳는다.

 

물론 이러한 전환은 상술한 시대정신에 이끌린 전 지구적 변화의 일부이긴 하나, 9·11 이후의 미국은 이것이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자유시장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의 사악한 동맹2004년 대선에서 국가를 장악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공화당원들은 노동계급에 반하는 재분배정책을 은폐하기 위해 반여성주의적인 인정정치를 성공적으로 활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가 항상 불안감을 조성하는 한에서 신자유주의에 특히 잘 들어맞는 자기배려의 기술로서 복음주의가 노동·하층계급 여성에게 먹혀든 것이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새로이 부상하는 세 번째 국면으로 근대 영토국가라는 틀을 거부하는 초국적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주의 정치의 흐름들을 조명하며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지구온난화나 초강대국 일방주의 등에서 드러나듯, “영토국가라는 틀의 전체적 효과는 국경을 초월하는 젠더부정의에 대한 민주적 성찰 자체를 배제한다. 따라서 여성주의는 세 번째 국면에 걸맞는 젠더정의의 새 차원으로 이전 국면에 대응하는 분배와 인정을 넘어 대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정치공동체 내부의 동등한 발언권 보장은 물론, “이미 확립된 정치 공동체 내부에서 적합하게 포함될 수 없는 정의에 관한 논쟁들의 틀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역시 요구한다. 초국적 정치공간의 대표주자로 지목한 유럽연합에 대한 제언과 함께, 프레이저는 재분배, 인정, 대표는 균형 잡힌 방식으로 통합되어야만한다며 삼차원적인 젠더정의를 강조하고 글을 마친다.

 

각 국면이 주로 선진국의 역사적 상황을 포괄한 지구화 시대의 정의와 달리, 혁명의 영점은 세계화에 따른 제3세계의 역사에 집중한다. 페데리치의 분석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은 제3세계 박해에 동원되는 자본주의적 축적논리의 도구를 지적하는 6장과 7장이다. 6장에서 호명되는 것은 신국제노동분업이다. 페데리치는 이를 보통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갈등 심화에 대한 대응에서 다국적 기업, 그 중에서도 (중략) 노동집약적인 부문에서 개도국으로 산업시설을 이동시키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상품생산의 국제적인 구조조정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위계구조를 없애는 한편, 성별분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적 찬사를 받지만, 실상은 이와 반대되었다. 신국제노동분업의 터인 자유무역지대는 고용된 여성들로부터 그곳의 노동은 저발전을 양산하며 숨겨진 형태의 노예제라는 규탄을 받았고, “오로지 상품생산만을 유일한 노동이자 경제활동으로 인정하는 기존 이론은 신생독립국가들이 국가프롤레타리아트의 재생산에 쏟아부은 노력을 모두 무로 돌리는 일까지 자행했다. 결과적으로 신국제노동분업은 약속한 제3세계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자본과 노동의 3세계에서 1세계로의 이전을 초래하고 말았다. 전쟁 또한 이런 메커니즘을 보여준다는 것이 7장에서 확인된다. “구조조정이 전쟁을 양산하고, 이렇게 양산된 전쟁은 피해국이 국제자본과 미국, 유럽연합, 유엔 등 이를 대변하는 권력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업무를 완수함을 보여준다.” 전쟁 역시 신국제노동분업과 같이 선진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기에, 식량원조라는 인도적인 수단조차 자본주의 축적논리를 강화하는 데 쓰인다. 이는 구호품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갈등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군대에 먹을 것을 제공함으로써 전쟁을 연장시키며, “비정부기구의 필요를 중심으로 배급소를 건립함으로써 농촌공동체를 뿌리째 뽑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두 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자본주의 축적논리에 부합하는 명확한 결과를 빚어낸다. 신국제노동분업으로 제3세계 여성에게 재생산노동이 전이된 것은 여성 내에 하녀-주인여성관계를 만들어내고”, 선진국 여성이 가족 내 노동분업에 저항하는 투쟁이 약화된다. 식량원조를 위시한 개입으로 토지와 농업의 상업화와 국제농산업에 의한 아프리카 식품시장의 인수가 가능해진다. 두 문제가 자본주의에 의해 얽혀있기에, 여성운동과 반전운동 모두 자본주의의 축적 논리 위에 구축되지 않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시켜야 한다.”

 

8장과 9장에서는 논의의 중심을 재생산노동으로 옮겨, 재생산노동의 주요 종사자인 여성이 처한 난국과 해결책을 본격적으로 고찰한다. 먼저 마주하는 난국은 8장의 세계화이다. “노동과 천연자원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기업자본에게전달하기 위해, 세계화는 노동자들로부터 더 강력한 착취에 저항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생존수단을 박탈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화는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대한 국가의 투자중단에 크게 의존하며, 고로 이 노동의 주요 주체인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 근본적인 속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세계화는 노동자들의 노동거부를 좌절시키기 위해 노동시장을 전 세계로 확대시키는 전략이기에, 사회문화적 혁명과 투쟁을 차단하고 만다. 하지만 9장에서 탐구하는 맑스주의는 여기에 별 해답이 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맑스의 설명에서도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는 상품과 시장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의 기술주의적 개념에 고취된 그의 시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인간해방의 전투를 유급산업노동에 한정시키고 말았다. 이는 현대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까지 계승되어, “여성들의 재생산노동에 대한 저항에 내재한 역사적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동문제에 대한 퇴보에서 보이듯 맑스보다 더 재생산문제에 무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결국 유급산업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 축적의 주요기여자이자 혁명의 주체로서 특권을 부여했다는 제3세게 정치평론가들의 비판을 면치 못했다. 반면 여성주의자들은 노동력의 재생산이 상품의 소비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활동들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의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자본주의적 생산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그리고 따라서 특수한 가족, 섹슈얼리티, 번식형태)에 의존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70년대 중반의 가시적 저항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저항은 여성을 화폐경제로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마주했고, 이는 노동시장 확장·경제활동의 금융화·노동력재생산에 대한 투자의 체계적 철회·기업의 젼례없는 자연파괴 등의 방법으로 실현되어 구식민지들을 대상으로 한 신식민주의를 낳고 말았다. “반식민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이 약화시켰던 성별 및 국제 노동분업이 다시 만개하는 이 상황은 전 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인구집단(노예, [식민 시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연한 계약 노동자, 재소자, 불법체류자들)의 창출이 아직도 자본축적을 위해 구조적으로 필요한 요소임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재생산노동의 기술화·재조직화·세계화 등은 재생산노동에 내재한 착취를 제거하지 못한 채, 여성을 세계화의 충격 흡수 장치나 가내노동·폭력·성상품화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페데리치는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행동을 요구한다. 첫째로, 여성 풀뿌리조직의 구축이다. 유엔부터 맑스주의자까지 재생산노동을 가치절하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여성들은 오직 스스로 조직함으로써만 삶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 여성 풀뿌리조직은 이를 철폐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으로서 요청된다. 둘째로 필요한 것은 생산 및 생계수단에 대한 통제력으로 시작하는 특정한 물질적 조건이다. “재생산을 둘러싼 집합적 투쟁의 문을 다시 여는작업을 위해, 물질적 조건의 통제를 회복하고 자본과 시장의 논리 밖에서 재생산노동과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협력을 창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협력관계의 창출에서, “재생산노동을 숨막히고 차별적인 활동에서,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창의적인 실험의 장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경제가 나타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축적논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이에 동화·협력하지 않겠다는 의미로써 여성징병에 반대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대립에 대한 두 학자의 관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의 파편화된 개인은 무한히 이어지는 현재의 생존에서 이념적으로 무지하거나 표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에게 프레이저와 페데리치의 사유는 개인이 처해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고, 이끌리는 삶이 아닌 추구하는 삶을 주장하고 실천할 기회, 나아가 삶과 세상의 주도권을 주장할 기회까지 선사한다. 하지만 유사한 논의이면서도 프레이저의 글은 프레이저가 본문에서 직접 양해를 구한 단서조항에서 드러나듯, 확실한 두 가지 한계를 지닌다. 첫째 한계는 논의가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프레이저는 <인정의 지형: 탈공산주의, 탈식민주의 그리고 제3의 길>이라는 부분을 통해 전 지구적인 분석을 파편적으로 보여주나, 2물결 페미니즘의 역사적 국면으로 호명하는 것이 주로 선진국 사회라는 점은 다양한 대륙과 국가의 사례를 비교하는 페데리치에 비해 논의가 제한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둘째 한계는 헤겔변증법적 서사에서 기인한다. 프레이저 본인도 이 점에 있어서는 사실상 각 국면은 많은 문제와 내용에서 서로 중첩되어 있으나 각 국면들 사이에 과도하게 날카로운 경계선을 그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으로 얻은 삼차원적 정치라는 개념은 미래를 위해 필요한 (중략) 지적이고 정치적인 통찰이라기에는 막연하다. 세계화에 대한 페데리치의 사유를 기반으로 하자면,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적 정치공간이 신뢰될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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