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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주차 쪽글] 형상으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인간2019-04-19 11: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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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살해하기1장과 2장을 통치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주체를 생산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읽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유일한 인간상으로 확립되면서 집합적 정치능력의 담지자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는 지워진다. 브라운은 푸코가 계보학적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의 이성 형식에 착안한 점에서 출발하여 현대 현실 신자유주의의 특성들을 덧붙이며 수정하여 제시한다. 또한 인민의 정치적 역량에 주목하지 않는 푸코 방법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정치적 삶의 주체로서 인간을 불러낸다.

 

브라운이 주목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제 체제가 아니라 통치 합리성이다. 국가 권력에 한계를 부여하는 다양한 양상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푸코의 논의에서 출발한다. 푸코에 따르면 국가 이성은 17세기에는 법적 이성에 의해, 18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에 의해 제약받으며 규정된다. “이런 시장에 의한 제약 및 시장의 이성 형식이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의 핵심”(71)이며,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 통치 합리성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재편된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형상이다. 모든 시공간에 경쟁을 확립함으로써 경쟁이 아닌 것들을 비워내는 이중의 활동 형식에 주목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태동기에 그것의 특성을 간추렸던 푸코의 논의에 금융화 시대의 신자유주의의 특성들을 보완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중의 형식이 세계에 틀을 부여한 인간 형상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서보다는 자본가로서, 하나의 인적자본으로 정체화 하고, 불평등한 지반 위에서 무한 경쟁의 승자 혹은 패자가 될 운명의 인간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네트워킹마저도 투자자 모집의 논리로 전환되어 어떠한 연대의 기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파편화되고 동시에 연결되지 않는 대중으로 공존하며 고립된다. 이들의 공동체를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라 부른다.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 합리성에 의한 주체화의 결과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푸코에 의해 발견된 표지이다. 그러나 브라운이 보기에 이 표지로는 충분치 않다. 외부가 없다고 여겨질 만큼의 신자유주의 규범의 양적 확산이 가져온 질적 변화를 놓쳤기 때문이다. 푸코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호모 주리디쿠스와 호모 레갈리스라는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이윤의 주체이자 권리의 주체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브라운은 보다 인민의 자기 통치 잠재성의 측면에서 이 사태를 보고자 한다. 푸코의 관점에서는 근대에 등장했던 호모 폴리티쿠스가 무시된다. 그러나 브라운은 인적자본의 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기 지배자이면서 자기 초월자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라 강변한다.

 

신자유주의 이성의 활동에 의해 비워지고 잠재적으로 은폐되는 것은 호모 폴리티쿠스로서의 인간이다. “스스로의 주인이자 데모스의 일부로 지배권을 행사하던 존재인 호모 폴리티쿠스가 퇴출된 후 자신을 어떻게 빚어내고 어떤 길을 거닐며 삶을 살까 같은 열린 질문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도덕적 자치, 자유, 평등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목적이나 목적 달성 수단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도 아니다.(50) …… 심지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쫓는 이익 추구의 존재도 아니다. 포용, 평등, 자유라는 용어는 경제 영역에서 재배치되고 경제 용어로 재정립되어 각각 경쟁, 불평등, 시장의 방임으로 대체되어 인민주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압축적으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유민주주의 이성과 민주적 상상력을 비워내는 공식이다.”(51) 이 공식에 따라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적절하게 약분되어 사라지지 않고, 인간 자체가 통째 사라지는 이 현실에 대해 푸코는 무관심하다고 브라운은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재편하는 과정에 아주 큰 흥미”(69)를 보이며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호모 에코노미쿠스(그리고 경제 전반)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면서통치하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현대적인 하나의 새로운 장으로 규정”(70) 할 수 있었지만 데모스로서 계쟁을 확립하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언급이 현저히 없다고 지적한다. 브라운은 푸코의 방법에서 이 부분을 보완 발전시키고자 한다.

 

브라운은 신자유주의를 규명하는 것만큼이나 민주주의를 정식화해내는 것도 어렵다고 말한다. 푸코는 “‘역사적 사건의 표면에 기록된신체에 대한 일련의 예속으로 발현되는 대체, 퇴거, 은밀한 정복, 체제 전복을 추적”(66)하는 방법을 통해 통치성을 탐구해나간다. 정치적 인간의 근대적 형상은 자유와 평등이 구현된 시민사회를 꿈꿨던 정치사상들 속에서나 주목될 뿐이다. 이것은 문서고에 그림자를 드리울 뿐 쓰이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경쟁이라는 형상으로 생산한다. 이것의 유일한 미덕은 경제성장이다. 환경의 변화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의미도 변화시켰다.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원칙들이 국민을 시장 원칙에 정치적으로 구속시키고 체제로서의 시장 원칙에 전반적으로 복종시키는”(85) 일련 과정 속에서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인간의 부활은 아닐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성공한 질적 도약의 다른 한편에서 인간들이 다른 인간으로의 도약을 일으키는 계기에 대해 상상해야 하는 시기가 온전히 도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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