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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주차 쪽글] 이성애 메트릭스를 깨기 위한 몸부림-'기호계', '쾌락'은 법을 전복할 수 있을까, 2018-11-30 15: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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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3장 전복적 몸짓들

 

 

지난 시간 복습...

 

1. 근친상간 금기의 전제로서의 동성애 금기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로 양성애적 성향을 가진 아이들이 이성애자 남/녀로 젠더화 된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에 대한 포기에는 거세위협에 대한 공포, 다시 말해 엄마에 대한 애정을 두고 경쟁 관계에 놓이는 아버지로부터 거세위협을 느끼고, 아이는 아버지에게 동일시하고 어머니를 포기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를 근친상간금지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이 이미 앞서 작동하고 있는 금지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하는 아이를 아직-성인 남자아이가 되지 못한 상태로 혹은 양성애적 기질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어디서 많이 듣지 않았나? 그렇다. /젠더 이분법이 늘 이렇게 설명한다. 젠더 이전에 아직-젠더화되지 않은 젠더 정체성을 얻지 않은 자연상태의 을 가정하곤 한다. 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우를 범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가정하면서 아이들은 아직 남자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남자 아이의 (최초의)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이라고 한정하는 듯 하다. 버틀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아들-아버지 간에 최초의 동일시가 형성될 때, 이 동일시는 이전의 대상-카섹시스 없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p.21) 이는 그 동일시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상실되거나 금지된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프로이트는 성격 형성이나 젠더 형성과정의 근원적인 양성애를 하나의 복합적 요소로 가정한다. 리비도 기질에 대해 양성애 군을 가정하게 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품던 본래의 성적 사랑을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프로이트는 은연중에 이를 부인한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최초의 카섹시스를 실제로 유지하고 엄마를 유혹하기 위해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양성애 표식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젠더트러블, 199)

 

 

버틀러가 지적하듯 리비도 기질에 대해 양성애 군을 가정하게 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품던 본래의 성적 사랑을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프로이트는 은연중에 이를 부인한다.’(199) 그리고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 기질양성애이다. 프로이트는 아이에게는 두 개의 성적 기질 남성적 기질여성적 기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함께 있으면서도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이 더 우위에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면서 긍정적 동일시부정적 동일시를 말한다.

그런데, 기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한 무엇이 리비도의 남성적 기질이며, ‘여성적 기질인가?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여성적 기질의 증거로 읽어내는가그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201)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 스스로도 분명히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로이트는 기질을 내세워 마치 이것들이 문명 이전의 선택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질이라는 말은 마치 자연적인 것인냥 뉘앙스를 풍기는 바람에 일련의 내면화의 결과물이며 생산물’(202)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만든다. ‘기질이라는 표현은 이미 아이들이 남성적 기질과 여성적 기질이라는 문화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을 은폐한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의 아이들에게는 이미 기질이 내면화 되었으며 그것의 생산물이다. 그런데, 이 습득된 기질이란 어떤 성격을 갖을까? 그것은 바로 이성애적 욕망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양성성이 하나의 심리 안에 있는 두 개의 이성애적 욕망의 공존으로 드러난다.’(202) 다시 말해, 양성성은 이성애와 다를 것이 없다. 이성애 이전, 혹은 양성성이라는 말 때문에 착각하지 말지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 과정에서 남아가 근친상간 금기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선택에는 동성애 금기가 먼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버틀러의 지적이다.

다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프로이트는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을 경쟁자인 아버지로부터의 거세위협 때문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 선택에는 거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근친상간 포기를 하는 것에는 아버지가 (거세시킬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거세당할까봐(여자가 될까봐, 동성애자로 오인 받을까봐)두려워서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 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에 대한 설명으로 근친상간 금기를 든 것은 그 앞에 선행하는 동성애 금기를 은폐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 버틀러의 지적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모순들을 비판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성애의 성취가 동성애 애착 가능성을 미리 배제함으로써’(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시, 356) 가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성의 취득과 남성성의 취득이 언제나 희박한 이성애의 성취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성애가 성취된다는 것은 동성애 애착의 포기를 강제함으로써, 보다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동성애 애착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함으로써, 동성애 영역을 슬퍼할 수 없는 상실이자 청산될 수 없는 열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폐제foreclosure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성애는 근친상간 금기에 의해 산출될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 금지에 앞서서 동성애 금기를 강제함으로써 산출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성애 욕망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구별은 강제되었다.(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구분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동성애 금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친상간 금기는 욕망의 이성애주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시, 356)

 

2. 우울증적 젠더

그런데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사후적으로 취득하는 방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에서 우리가 비판적으로 가지고 와야 할 부분이 있어 보인다. 프로이트는 에고가 젠더화 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탄생을 말하는데, 이 젠더화 과정이 사랑의 대상에 대한 상실과 거부를 수반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초의 애정의 대상에 대한 상실과 거부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을 잘못한 것은 맞다. 앞서 버틀러의 비판을 요약했듯이, 그는 이 상실과 거부의 원인을 근친상간 금기로 설명했다. 그 보다 앞서 존재하는 동성애 금기에 대해 간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동성애 금기가 작동한다는 것. ‘욕망의 이성애주의가 전제된 상태라는 것을 은폐했다는 점에서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에 대해 근친상간 금기보다 앞서는 동성애 금기에 대해 명확하게 조직화하지 못했으면서도, 동성애 금기가 젠더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젠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는 문화의 논리에 대해서는 다른 한편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러한 방식 젠더 형성을 우울증의 기제로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방식을 가져와서 우울증적 젠더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정식화한 것에 따르면 멜랑꼴리는 대상에 대한 상실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대상을 자기 내면으로 내재화하는 방식이다.

 

우울증에서 상실이 거부될 때,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포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재화는 정신 속에 상실을 보존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실의 내재화는 상실의 거부 메커니즘의 일부가 된다.(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시,355)

 

버틀러는 동성애에 대한 금기라는 억압적 명령이 젠더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이것이 바로 우울증적 젠더를 만든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경우를 볼까. 여성은 동성에 대한 애정은 금지되어 대상에 대한 상실에 놓인다. 이 경우 이 여성은 이 상실을 거부하고 자기 안에 내면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내면화된 대상이 초자아가 되어 나를 비난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동성애 대한 사랑의 상실과 포기의 문제는 욕망의 대상과 목적 모두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성애 대한 애정의 상실과 포기의 경우 욕망의 대상만 바꾸면 되지만, 이 경우에는 목적도 부정되는 것이다. ‘억압적인 법이 동성애를 배제하고 또한 이성애를 허가로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이성애 정체성은 젠더 우울증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울증적 젠더 이론의 핵심이라고 할만한, 동성의 대상을 상실하고 그 상실을 거부하는 우울증적인 포기의 최고 고비(?)란 여아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물론 근대적인 가정이지만) 여아·남아 모두 엄마를 사랑하게 된다. 그 경우 남아의 경우 엄마에 대한 최초의 사랑을 포기하면서 사랑의 목적은 포기하지 않고, 대상만 포기하면 된다. 물론 이 경우에 남아 역시 자기가 여자가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아버지를 동일시한다는 과정에 나름대로 힘겨운 상실과 거부를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여아의 경우에는 사랑의 목적과 대상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이 경우 더욱 더 이 상실과 거부 과정이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욕망을 이성애로, 그리고 역시 대상도 남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 아닌가. 이 거듭된 부정을 겪는 과정에서 에고는 어떨까. 상실의 거부의 방법으로 내면화된 (애정의)대상이 초자아가 되어 를 원망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끔찍한 자기 비난과 혐오의 메커니즘이 아닐련지...





[9주차 쪽글] 이성애 메트릭스를 깨기 위한 몸부림-'기호계', '쾌락'은 법을 전복할 수 있을까,  

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3장 전복적 몸짓들

 

1절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크리스테바는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의 한 차원으로의 기호계를 가지고서 라캉의 상징계에 대한 전복을 꿈꾼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는 변함없이 상징계에 종속된다는’(239) 점에서 한계가 있다. 버틀러를 따라 크리스테바의 이론이 갖는 난점을 보면 크게 다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먼저, 모체에 대한 일차적 관계는 실행 가능한 구성물(239)인지 질문할 수 있겠다.이 역시 모체를 물화하는 것 아닐까.‘크리스테바가 담론 이전의 모체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주어진 역사적 담론의 생산물’ ‘문화의 결과가 아닌지에 대해 고려’(240)가 필요하다. 또한 버틀러는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는 여전히 아버지의 법에 의지한다고 지적한다. 언어 안에서 기호계의 기능에 대한 서술은 기호계에의 층위에서 아버지 법을 복원해내는 것 같다’(240)

크리스테바는 기호계에 대해 언어 속에서 표명되는 충동의 다양성(242)을 말하면서 리듬, 유운(assonance), 억양, 소리 작용, 반복 등을 통해 시적 발화 속에서 모성적 몸을 재현(re-presentation)하고 회복한다고’(242) 강조한다. 그러니까 최초의 어머니와 아이가 느끼는 유대감을 억압하고 상징계에 진입했다면(이러한 가정을 보면 라캉과 공통적이다.) 기호계의 언어를 통해 그 억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상징계를 깨는 방식이 상상적인 모성의 몸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모성적 몸을 물화한다는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내재한다. 이 기호계와 상징계 사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크리스테바는 분명히 상징계를 기호계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와 기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표명을 허락하는 상징계 안의 이런 경험들을 입증하려는 것(248)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앞서도 버틀러가 지적했듯이 크리스테바에게 있어 기호계는 상징계를 전복한다기 보다는 여전히 상징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와 모성성을 통해 상징계의 억압된 토대를 폭로하는 방식, 다시 말해 상징계와 기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라는 전략은 한계가 분명하다. 이 전략은 언어 내부에 있는 억압된 다양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아버지 법의 헤게모니를 탈구시키려하지만, ‘본능적 이질성아버지 법안에서, 아버지 법을 통해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근친상간 금기에 전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상징계에서 가장 취약한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249) ‘부권적 법의 위치를 바꾸려던 시적-모성성의 실천은, 구문론적 요건에 복종하고 있어서 언제나 미약하게 그 법에 매여 있다. 따라서 완전한 상징계의 거부는 불가능하며, 크리스테바에게 해방담론이란 전혀 불가능하다.’(249)

크리스테바는 금지하는 아버지의 법이 문화의 토대가 된다는 구조주의적 가정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부권적으로 인가된 문화의 전복은 다른 형태의 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억압된 문화의 내부로부터, 문화의 감추어진 토대를 구성하는 충동의 이질성으로부터 나온다.’(249) 크리스테바가 기호계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 상징계로부터 억압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이상, 그 한계는 분명한 것이다. 크리스테바가 참조하는 충동이란 상징계를 참조한 것일 뿐이다.

쾌락에 대해서도 크리스테바는 을 물신화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아버지의 법을 넘어선 쾌락, 즉 다시 말해 레즈비언의 경험은 필연적인 불가능성과 더불어서만 상상할 수 있’(251)는 것이며 레즈비언 발화에 대해서는 정신병적 단어 소용돌이(Whirl-of-words)라고 특징화’(252)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레즈비어니즘을 비합리성의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애 문화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환영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까 이성애가 그 스스로를 정의내리기 위해 동성애라는 구성적 외부를 상정한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기호계를 어떤 대안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된다. 기호계의 것이 상징계 안에서 허가된 위치 이동을 하지 않는한 크리스테바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의 틀에서 기호계아버지 법을 피할 언어의 가능성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 가능성은 어쩔 수 없이 법의 영역 안에, 혹은 그 아래에 있다.’(252)

 

2. 푸코, 에르퀼린, 그리고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푸코의 계보학적 비평은 주변부 섹슈얼리티의 형태들은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다고 몰아붙이는 라캉과 신라캉 이론들을 비판할 한 가지 방법을 제공했다. 글을 쓰는 동안 푸코는 에로스의 해방 개념이 가진 미몽을 지적하면서 섹슈얼리티에는 권력이 들어와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법 이전이나 이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론들에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푸코가 성의 범주와 섹슈얼리티의 권력체계를 비판하는 텍스트 사례속에서 그 자신이 비판했던 해방의 이상을 주장하고 있다(263) 버틀러는 푸코의 성의 역사와 19세기 프랑스의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친 서문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푸코 텍스트 내부의 모순을 비판한다.

우선 에르퀼린의 일기에 대한 서문에서 푸코는 진정한 성이라는 개념이 꼭 필요한 것인지를 묻는다.’(263) 버틀러는 이 질문은 성의 역사1권의 결론즈음에서 제시한 섹스의 범주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의 역사에서 그 자신이 주장한 섹슈얼리티 이론과는 반대로 에르퀼린을 읽어낸 것이라 짐작할 만한 단초’(264) 역시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것은 푸코가 /녀의 쾌락세계를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limbo)’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세계로 낭만화’(264)하고 있는 지점이다.

버틀러가 요약하는 푸코의 성의 역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푸코는 섹스의 일원적 구성(사람은 그 사람의 성인 것이지 다른 성이 아니다)

a)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규제와 통제 작용으로 생산되었으며,

b)전혀 다르고 관련 없는 여러 성적 기능들을 숨긴 뒤 그것을 인위적으로 통일해서는,

c)어떤 원인, 즉 온갖 종류의 감각, 쾌락, 욕망을 섹스-특정적인 것으로 생산하고 인식하게 하는 내적 본질을 담론 안에 설정한다고 주장한다.’(264)

 

푸코가 지적했듯이 ‘‘쾌락섹스의 표현물 혹은 기호들로 흔쾌히 해석’(264)된다. c에서 지적했듯이, 쾌락이 섹스의 표현물이 되는 것이다. (‘섹스/쾌락이라는 방식은 문화 이전의 자연을 가정하는 섹스/젠더라는 이분법과 유사한 설명방식이다,)이는 푸코가 섹스를 쾌락을 구성하는 기원적이고 연속적인 원인이자 의미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역으로 ‘‘섹스담론과 권력이라는 열려 있는 복합적인 역사체계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제안한다’(265) 이 책에서 버틀러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이 담론의 체계란, 즉 결과를 기원으로 바꾸는 담론의 체계는 권력관계를 감춤으로써 그 관계를 영속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섹스라는 잘못된 이름을 생산한다.’(265) 억압이론 혹은 사법적 모델이 섹스/젠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선호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 영속화를 위해 억압이나 지배로 간주되는 권력’, ‘해방이나 진정한 자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용감하지만 좌절된 에너지로 간주되는 성’(265)이라는 자의적 관계가 활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섹슈얼리티 분석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 다시 말해 섹스범주 자체의 역사적 생산에 대한 탐구가 배제된다는 점에서 문제다.

푸코에게 성별화된다는 것은 일련의 사회 규약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제들이 명하는 법이 사람의 섹스, 젠더, 쾌락, 욕망을 형성하는 원칙이자, 또한 자기 해석의 해석학적 원칙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 범주는 반드시 규제적이며, 이 범주를 미리 전제된 것으로 만드는 모든 분석은 권력/지식체계로서의 규제 전략을 확대하고 그의 합법화를 촉진한다.(266~267)

 

규제는 사람의 섹스, 젠더, 쾌락, 욕망을 형성하는 원칙’(267)이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성해방이라는 담론에 푸코가 비판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델은 또 다시 성을 하나의 범주로서, 즉 권력관계의 신비화 효과로서 역사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법적 모델’(266)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성이 담론으로부터 구성된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담론 밖으로 해방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성 해방이라는 환상은 을 담론 이전, 법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 물화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푸코는 에르퀼린의 일기를 편집, 출간하면서 그/그녀의 몸-양성구유의 몸, -교차적 몸이 어떻게 성적 범주화의 규제 전략을 드러내고 또 반박하는 지를 은연중에 폭로한다.’(267) 그리고 그는 성이 서로 필연적 연관성이 없는 몸의 기능과 의미를 통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이 소멸된 결과는, 이분법 안에서 일의적 성으로 강제되었던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쾌락의 증식을 낳을 것이라고 예측한다.’(267) 이러한 푸코의 서술은 성 해방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성의 역사의 논조와 모순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버틀러는 푸코의 이러한 모순이 이미 성의 역사안에서 해소되지 않은 긴장’(267)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본래적인 쾌락이라는 난감한 주장으로 드러난다. ‘푸코는 담론과 권력의 복합적 상호 작용으로 생산되지 않는 섹스란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특정한 담론/권력의 교환 결과가 아닌 본래적인 쾌락의 다원성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268) 다시 말해, ‘법 앞의섹슈얼리티를 사실상 전제하는 전담론적 리비도의 다양성이라는 비유를 동원하고 있고, 사실상 섹스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섹슈얼리티를 불러온다.(268)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를 성의 부과나 규제에 앞서는, 유토피아적 쾌락의 유희로 낭만화하려는 유혹’(270)을 거부하면서, 다시 에르퀼린의 텍스트에 푸코식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에르퀼린의 다원적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하지 않고’ ‘어떤 사회적 관행과 관습이 이런 형태의 섹슈얼리티를 생산하는가’(270)라는 질문을 가지고서 에르퀼린의 사례를 구체적 서사구조와 정치문화적 관습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푸코는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를 그녀의 독서나 그 시대의 종교 이데올로기 등등의 여러 관습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 섹슈얼리티 혹은 쾌락을 절대화하고 에르퀼린 고유의 것으로, 다시 말해 해방되어야 할 쾌락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읽고 있다. 하지만, 푸코 그 자신이 성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듯이 관습이나 규율 밖에 있는 섹슈얼리티는 없으며, 에르퀼린의 쾌락에 대해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사실 푸코가 에르퀼린의 쾌락의 이질성을 강조할 때, 이러한 오해는 에르퀼린의 몸을 이질적 쾌락을 가지고 오는 하나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방식에서는 쾌락이 어떤 본질의 결과이자 표명’(272)이 된다.같은 맥락에서 에르퀼린이 스스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성과 맞서는 자연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지칭’(275)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버틀러는 에르퀼린이 말하는 전혀 다른 요소에 대한 피상적 검토이 요소들을 작용’ ‘감각으로, 심지어는 충동과 같은 철저히 의료화된 언어로 만들게 된다는 것을 시사함을 지적한다. 사실상 푸코는 에르퀼린에게서 이질성을 강조하지만 이질성’, ‘그 자체가 바로 푸코가 억압적인 사법적 법으로 설정한 의료 담론 때문에 구성된다.’는 점이 간과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에르퀼린의 몸이 이질적인 쾌락의 장소로 이해될 때, 몸이 쾌락의 원인이라는 방식이 일차적으로 문제다. 또한 이때 이 몸을 이질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인가? 이러한 호명은 이성애를 기준으로 하고 동성애를 명명할 수 없는 리비도적 이질성의 자리를 지칭하기 위한 것으로 활용’(276)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 이 동성애를 이성애 매트릭스를 깨는 전복적인 담론으로 볼 수 있을까. 푸코는 왜 에르퀼린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혹은 성의 역사에서 쾌락에 대해 말할 때 만은 다시 쾌락을 본질화하고 혹은 몸을 쾌락의 모체로 생각했을까. 또는 그의 서술이 동성애라는 호명이 이성애 담론 안에서 이성애를 구성하기 위해 구성적 외부로 만들어질 때, 동성애를 명명할 수 없는 리비도적 이질성의 자리를 지칭하기 위한 것으로 활용’(276)되는 방식에 대해 간과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버틀러가 지적하는 푸코의 한계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을 꼽자면 육체에 대해 에 대해 절대화한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273쪽 참고.)

하지만, 계속해서 버틀러가 분석하는 에르퀼린의 성적기질은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가 아니라 처음부터 양가성의 하나’(283)였다. 에르퀼린은 수녀원이 부과하는 관습과 규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녀의 섹슈얼리티는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양가적 산물이다.’(283)에르퀼린은 처음에 어머니를 사랑했고, 또 다시 어머니의 여러 딸들과 사랑했다. 하지만, 이것은 금지되었고, 우울증적 젠더의 메커니즘이 여기에서 다시 한번 등장했다. 이렇게 포기한 사랑에 대한 거부로 그녀들은 에르퀼린에게 내면화되었고, 자기 비난의 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이후, 에르퀼린이 남성 주체로 허가 된 것은 어떤가. 에르퀼린이 비로소 법에 복종한 후에야 비로소 법률적 남성주체로 허가된다.’(283)

에르퀼린 자신이 혹은 푸코가 모두 에르퀼린의 을 기반으로 하여 쾌락의 특수성을 설명하고, 이것이 법 밖에 있는 몸 혹은 쾌락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에르퀼린은 우울증적 젠더라는 메커니즘 안에 있었다. 물론 우울증적 젠더를 강요(?)하는 법과 매끄럽게 화해한 상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에르퀼린이 쓰고 있듯이 늘 투쟁이고 불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투쟁과 불화가 법의 외부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녀는 법의 외부에 있지만 이 법은 자신 안에 그 외부를 갖고 있다. 사실 그/녀는 법을 체현한다. 칭호를 부여받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모반만을 생산하는 법의 기괴한 역량에 행해진 증언으로서의 법을 체현하는 것이다.’(284) 단순히 법의 위반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타자라고 해서 법 바깥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2장에서도 거듭 버틀러가 강조했듯이 법이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2절 푸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버틀러가 푸코의 서술이 간과한 지점을 지적한 부분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버틀러는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섹슈얼리티가 권력과 동시 공존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난하는 구체적인 권력관계를 인식하지는 못한다.’(264)고 지적했다. 에르퀼린의 경우에도 이를 간과한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이리가레의 의견도 비판할 수 있을 듯 하다. 이리가레는 여성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적 경제를 강화시키는 비대칭적 차이’(279)라고 비판하면서 의미화 경제 바깥을 말한다. 하지만, 법이 위반하는 바깥 까지 생산하고 있다면, 법 바깥을 상상하는 것의 한계는 역시 분명해 보인다. 결국 먼 길을 돌아 다시 에 대한 앞선 논의를 생각해야 한다. 법 이전의 무엇을 가정할 때, 그것이 기질(프로이트)이거나, 기호계(크리스테바), 쾌락(푸코)이거나, 혹은 몸을 가정하는 순간 담론의 작용을 은폐하고 성/젠더 이분법을 수용하고 이성애 담론을 자연화한다는 것. 물론, 이성애 담론을 전복하겠다고 기호계, 쾌락, 몸 등을 가정했을지 모르나, 어쩌면 전복이라는 방법론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버틀러는 이성애 메트릭스를 깨기 위해서는 고작 한 번의 부정이 아니라 두 번 이상의 부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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