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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 쪽글] 젠더 구성의 계보학으로의 이동 (수정중입니다 ㅠㅠ)2018-11-09 18: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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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미니즘의 주체로서의 ‘여성들’

  사법적 권력이 재현하면서 생산하는 ‘여성들’의 범주는 체제에 의해 규제된 주체들이며 체제의 필요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재생산된다.

따라서 페미니즘 주체인 ‘여성들’의 범주도 그와 마찬가지로 조건 지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권력과 체제에 의해 조건지어진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여성 범주의 보편성과 통일성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배타적 관행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재현의 정치학이 어떤 토대 위에서 주장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페미니즘에서의 ‘재현’이란 ‘여성’주체가 가정되지 않을 때에만 의의가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것이 버틀러식 페미니즘 계보학인 것 같다)


2.섹스/젠더/욕망의 강제적 질서

  페미니즘 주체에 균열이 시작된 것은 섹스와 젠더의 구분 때문이다.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이것의 문화적 해석인 ‘젠더’라는 구분에 대한 각각의 정의는 임의적이며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허공에 떠도는 인공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인 젠더에 비교하여  ‘섹스’는 담론 이전의 것이며 비구성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이토록 인과적으로 헐거운 개념일 수 있는 섹스/젠더가 어떤  담론적 역사 속에서 구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계보학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것이다. 


3.젠더-현대 논쟁에서 돌고 도는 유적

  젠더에 대한 담론적 분석의 한계는 모든 젠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석의 경계가 담론적으로 조건지워진 경험의 한계를 시사할 뿐이라는 데 있다.

그 한계는 늘 보편적인 합리성의 언어처럼 보이는 이분법적 구조에 입각해 기술된 지배적 문화 담론의 관점에서 정해진다. 

  여성을 남성의 타자로 지목하는 보부아르에 반대하면서, 이리가레는 주체와 타자는 모두 폐쇄된 남근로고스 중심의 의미화 경제의 남성적인 버팀목이라고 주장한다.

이리가레의 분석에 따르면 남성적 담론 속에서 여성적인 ‘성’은 언어의 부재지점이기에 실체 없는 환영이다.

이리가레의 해석에서 보부아르의 ‘생물학적 성’의 여성은 전복되고 여성은 타자성의 양식으로 활보하는 또하나의 체현된 남성적 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보부아르와 이리가레의 젠더에 대한 해석을 따져보면 정체성의 범주들은 근본적으로 재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4.이분법적인 것과 일의적인 것 이론화하기, 그리고 그 너머

  성차가 발생하는 문화 역사적 맥락의 배열을 횡단하는 독백적이고도 획일적인 남성적 경제를 규명하는 것(이리가레)으로 젠더 억압을 모두 설명하려는 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와 다르지 않다. 다른 한편, 여성 범주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거부한 것이기에 거부해야 할 것이다.

연합의 정치를 위해서 통일성을 가정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버틀러는 젠더란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이기 때문에

완결된 규범에 복종하지 않는 상태로 다양한 집중과 분산에 대한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정체성, 성, 그리고 본질의 형이상학

  젠더 정체성이 인식 가능해지는 문화적 매트릭스는 어떤 특정한 ‘정체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문화적 인식 가능성 안에서 발견되는 젠더는 이를테면 이리가레의 연구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여성’이란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버틀러가 보기에 이리가레의 논의는 남성에 대한 타자로서의 ‘여성’을 발견하면서도 결국에는 성별 이분법적 경제 대립 책략이 반복되는 것이랄 수 있다.

반면 푸코가 보기에 결국에는 이분법 관계로 향하게 되는 본질적인 성의 문법은 이성애적, 재생산적, 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위티그는 강제적 이성애에 대항하며 오직 여성만이 젠더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레즈비언인데 레즈비언의 자유와 해방을 통해 인본주의적 규범을 획득하려는 모델은

버틀러가 보기에 본질의 형이상학을 고집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버틀러는 니체를 참고하여 본질의 형이상학 비판한 아르를 통해 젠더가 통일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안정적인 이성애에 대립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한다.

본질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젠더가 물화되어 있고 욕망은 이성애의 증거가 된다고 이분법에 근거한 일관성을 해체할 인식을 제공한다.

이는 담론 안에서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일관된 젠더의 수행성은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것을 밝히며 오직 행위만이 있고 행위 뒤에는 인간이라 불릴 젠더의 본질이 없음을 밝혀내는 것이다.


6. 언어, 권력, 그리고 위치 변경의 전략

  젠더 정체성의 구성을 프로이트의 유아기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붕괴시키려고 하려는 위티그와 이리가레의 입장은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일까?

성차에 대한 페미니즘의 접근은, 여성성을 이론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이 작업들은 모두 배제를 통한 의미화 경제에 기반하고 있는 남성적 재현 불가능한 부재로 이론화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남성 동일시’의 섹슈얼리티 대신에 남근적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구성된 섹슈얼리티 개념을 전개해보자고 버틀러는 제시한다.

이 권력관계는 섹슈얼리티의 권력의 장에서 피할 수 없는 ‘동일시’의 전복 작용을 통해 바로 그 남근 중심주의의 가능성들을 재상연하고 재분배한다(143쪽) 

  동성애자의 동성애와 이성애자의 섹슈얼리티를 해석하는 데에 이성애적 구성물을 반복하여 넣는 대신 이성애적 원본이 순전히 만들어진 위상임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이것은 복사본과 복사본의 관계 이상이 아님을 밝힐 수 있는 계보학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젠더 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기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함께 도출하는 것은 통일성의 허구를 밝히면서 동시에 외관을 창조하는 우연적 행위가 오히려 젠더의 다양한 물화를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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