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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서평]21세기의 플로토크라이티아, 혹은 민주공화국 없는 자본주의2019-05-03 19: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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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02 | 신자유주의와 교차성 페미니즘 6주차 쪽글. 20190503.취생몽사

 

21세기의 플로토크라이티아, 혹은 민주공화국 없는 자본주의

-웬디 브라운의 민주주의 살해하기에 대하여-

 

1.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유일한 주체

 

민주주의 살해하기의 원제목인 Undoing The Demos 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해방적 이상이 깃든 정치의 가능조건으로서 민주주의의 주체가 어떻게 신자유주의라는 통치합리성에 의해 해소(undoing)되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브라운은 무엇보다 주체화의 형식으로서 신자유주의를 파악한다. 즉 신자유주의가 전사회를 통어하는 합리성의 형태가 될 때, 그 사회에 남는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기업으로 경영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밖에 없으며, 이 자기 자신에 대한 기업가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단지 경제영역만이 아니라 결국은 정치의 영역에서 유일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의 주체,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의 주체인 데모스는 해소되고 그 자리를 기업으로서의 주체가 차지한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특정한 이성의 형태로 파악하는 푸코의 논의에 기반을 두고 분석하는 브라운의 기획이 당연히 이르게 되는 결론일 수밖에 없다. 푸코에게 있어서 통치성이란 무엇보다 행위에 대한 지휘/인도’(conduct of conduct)였다. 이때 행위란 구체적 행동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방식, 특정한 원리에 따라 모든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성향 내지는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강의록 국역본에서는 conduct품행으로 번역한다. 통치성은 이 품행을 조성하는 권력의 기술이며, 이는 결국 주체화의 문제인 것이다.

 

민주주의 살해하기1부가 이론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주체를 해소하기 사회의 유일한 주체형식으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자리하게 되는 가를 밝히고 있다면, 2부는 거버넌스, 법률/소송, 교육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이러한 대체 현상을 분석한다. 특히 이러한 구체적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브라운은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보다 한 걸음더 나아가려한다. 브라운이 지적하는 바대로 아직 신자유주의가 전사회적, 전지구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이전인 1970년대 말에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담론을 통해서 분석했다. 하지만 푸코 이후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도래했다. 그러므로 푸코가 신자유주의의 형성 및 부상기에는 파악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또 다른 효과를 이제는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라운의 이 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논의를 당대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푸코의 문제틀을 통하여 신자유주의 통치성 이론을 보다 심화하고 변형함으로써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현재적 형태와 그 효과를 정치, 혹은 민주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맥락화하는 것. 그 결론이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의한 호모 폴리티쿠스, 즉 데모스의 살해이다.

 

2.민주주의라는 기의를 바꾸기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어떻게 민주주의의 주체인 데모스를 해소해버렸을까? 브라운은 거버넌스, 법률, 교육의 사례를 통해서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세가지 사례를 관통하는 핵심은 민주주의라는 기표는 유지되나 그 기의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정치적으로유지해왔던 기의는 경제적인 것으로 변동되었다. 가령 가버넌스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방식에서 민주주의나 정의와 같은 기표의 의미는 철저하게 달라진다.

 

민주주의 뿐 아니라 정의의 속성 그 자체에 대한 논쟁도 훌륭한 거버넌스의 현대적 규범 그리고 문제 해결에 맞춰 거버넌스를 조정하려는 움직임으로 대체된다....중략.... 요컨대 이해 당사자는 이익 단체나 계급을 대체하고, ‘가이드라인은 법을, ‘촉진은 규제를, 다양한 기관들과 제도에 의해 전파되는 표준행동규칙은 명시적 정책과 다른 형태의 강제를 대체한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또한 이런 대체어들은 가버넌스가 조직하고 지시하는 삶과 공간에서 권력의 어휘를 몰어내고 이런 이유로 권력의 가시성마저 지워버린다. (170)

 

가버넌스 체계에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시민의 참여, , 계급, 인민주권의 표현형태 등과 같은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의미화되지 않는다. 대신 이해 당사자’, ‘가이드라인’, ‘표준’, ‘행동 규칙과 같은 경제 혹은 경영의 맥락 속에서 재의미화된다. 민주주의의의 기의는 정치적 장에서 탈각되어 경제의 장으로 이식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의미변동은 법의 영역에서도 발생했다. 브라운은 케네디 대법관의 시티즌유나이티드 판결을 분석하면서 그 핵심에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준이 정치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움직임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시장 행위를 행위의 유일한 원칙으로 인식하고, 또 시장 지표를 인간 행동의 모든 영역에 대한 유일한 척도로 삼는 한 온전히 이치에 맞는다. 중요한 것은 케네디의 견해가 단순히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기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헌법을 해석하고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 생활을 생산하기 위한 일련의 원칙으로 분명히 표현한다는 점이다. (221)

 

국가의 최고규범인 헌법조차 경제적 합리성의 원리에 의해 해석되고, 정치 생활 역시 시장 행위를 모델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에서는 선거는 정치시장으로 의미화되고, 표현의 흐름은 자본의 흐름으로 이해된다.

 

물론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민주 시민의 함양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생산이 교육의 의미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의 결론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치적 기의를 가지는 기표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의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할 때 이 기호질서 속에서 생산되는 주체는 더 이상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정치라 불리는 영역에서도 경제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행위하는 주체들만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데모스는 해소되는 것이다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민주공화국없는 자본주의를 원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우리는 민주주의 다음으로 금권정(Plutokratia)을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지속되나 그것의 정치적 형태라고 했던 민주공화국은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3.죽게 만드는 권력으로서 신자유주의

 

브라운이 푸코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이론의 한계로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상의 논의와 같이 통치합리성으로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그 주체에 대해 가지는 이론적 함의를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브라운은 푸코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인적자본에 대한 논의가 철저하게 개인적 수준에서 논의됨으로써 신자유주의 통치 전반에서 그 개인이 언제든지 폐기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존재, 희생될 수 있는 존재임을 주목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은 사적 이익의 추구가 전체 이익에의 기여를 보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시경제 성장과 신용 등급 향상을 위한 기획의 일부”(108)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거시경제의 차원에서 언제든지 정리될 수 있다.

 

개인, 회사, 산업이 이런 목적에 보탬이 되지 않고 짐만 되면 그런 개인, 회사, 산업은 구조조정, 해고, 아웃소싱, 복지 혜택 축소, 법이 강제하는 일자리 나누기, 생산기지의 해이 이전 등을 통혜 폐기되거나 재편되어도 그런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되면 이윤은 왕좌에서 쫓겨나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희생이 왕좌에 올라 그 자리를 대신한다. (108)

 

다시 말해, 개인이나 개별 기업들, 혹은 단체들의 이윤추구 활동이 전체 거시경제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성과를 저하시킨다고 판단 될 때 그 개인, 기업, 단체들은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푸코라면 이를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생명정치적 죽음권력의 작동, 혹은 생명정치적 인종주의의 작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브라운이 신자유주의적 통치 하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희생메커니즘을 푸코와 다르게 파악하는 지점은 이러한 희생 메커니즘을 일종의 대리보충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모이쉬 하비탈의 종교적 희생과 도덕-윤리적 희생에 대한 비교 연구를 참조하는데 이 두 가지 희생은 결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요구되는 희생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을 우선 강조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비경제적 희생 메커니즘을 자신의 대리 보충으로 삼는다.

 

이런 특성들은 희생의 논리가 신자유우의 논리 외부에 존재하며 신자유주의 논리를 대리보충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리보충이 필요한 이유는 자본의 세계가 완벽하게 응집되었거나 자기 규제가 가능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유주의 합리성에 자본의 규범적 가치 향상과 경제의 규범적 성장 간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개인 또는 구가 연합체가 글로벌 경제 질서에서 정치적 방향 설정과 정당성 확보의 근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293)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가 거시경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손실을 가져오는 개인, 기업, 집단을 희생시킬 때 종교적, 도덕적-윤리적 희생 논리로 경제적 희생의 명분을 대체하면서 보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간극과 충돌 가능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희생의 메커니즘과 논리에서 대체보충이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합리성 안에 내재하는 필연적 내적 균열과 간극 때문이다.

 

브라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부분이 정밀하게 분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대체보충은 오히려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그는 파악한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일종의 의지주의이다. 이는 무엇보다 이러한 대체보충을 필요로하는 합리성의 체계에 내재한 간극과 상호충돌의 지점을 정치화할 주체가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브라운에게 저항은 저항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보편화된 신자유의 의식에 구멍을 내야하는, 그 자체로 이미 어려운 기획과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맞선, 실천 가능한 그럴듯한 개발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좌파는 이런 문명의 절망과도 맞서야 한다. 삼중고에 직면한 우리들 조파에게 주어진 임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어떤 즉각적인 보상도 약속되지 않고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정의롭고 지속가능하고 살 만한 미래에 대한 실낱간은 희망이라도 제공하겠는가? (303)

 

이제 좌파정치는 희망을 있어서 저항한다기 보다는 희망을 위해 저항을 해야 하는 당위에 종속된다. 일종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그 브라운의 결론이 되고 있는 것이다.

 

4.푸코와 맑스, 전쟁모델과 모순모델

 

브라운은 이러한 의지주의적 후퇴는 그가 주요하게 의거하는 푸코에 대한 면밀한 독해의 부족과 그가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맑스에 대한 적극적 참조의 부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아닌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권력이론은 기능주의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지만 푸코에게 권력은 언제나 전쟁모델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푸코가 권력을 전략관계로 파악하면서 그 전략관계에서 기술이 중요하고 발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 역시 일종의 전쟁상태에서 등장하는 권력의 전략이자 기술이며 이는 항상 이에 대항하는 편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합리성, 혹은 이성형식이라면 이에 맞서는 대항적 합리성과 이성형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앎(savoir)의 봉기는 가능하다. 저항의 의지를 벼르는 것이 아니라 푸코식으로 저항의 가능 조건을 탐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목적론적 함의를 제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역사변동의 동학에 대한 그의 관점을 더 사유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결국 생산양식 내의 모순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임과 동시에 생산관계 내의 계급모순이 역사변동의 동력이다. 신자유주의는 통치성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축적양식이다. 이 축저양식에 내재하는 모순이 또한 저항의 조건이 될 것이다.


푸코의 전쟁모델과 맑스의 모순모델을 어떻게 절합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의지의 낙관주의를 다짐하는 것 못지않게 필요한 지적 실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가능성은 없을까? 그 가능성을 발견할 때 우리는 21세기의 플루토크라티아를 막아낼 가능성을 찾아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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