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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5주체 쪽글]여성, 인적 자본의 비가시적 인프라 : 신자유주의, 파테라르키의 새로운 형태?2019-04-26 17: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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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연 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02 | 신자유주의와 교차성페미니즘 5주차 쪽글. 취생몽사. 20190426.

 

여성, 인적 자본의 비가시적 인프라 : 신자유주의, 파테라르키의 새로운 형태?

-웬디 브라운, 민주주의 살해하기,(2018) “3장 민주주의 해체하기를 읽고-

 

1.브라운은 민주주의 살해하기3푸코의 신자유주의 이론 수정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 분석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브라운은 일차적으로 거시경제관리의 부품으로서 언제든지 폐기 및 대체가능한 주체가 바로 인적자본이라는 점과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대체한 주체형상은 호모 폴리티쿠스였음을 지적하며 이를 푸코가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와 더불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젠더를 질문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통치합리성과 여성의 관계를 질의한다.(3) 개인적으로 이 챕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3절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성이었다.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통치성의 차원에서, 즉 행위의 지도(conduct of conduct)로서 통치성은 젠더 정치학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정치학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논의를 젠더의 관점에서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을까?

 

2.브라운은 이 작업을 위하여 대처의 그 유명한 연설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사회 같은 건 존재 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남성과 여성……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가족만이 있을 뿐입니다.” 브라운에 따르면 이 연설에서 핵심은 바로 ……가 보여주는 머뭇거림이다. 개인으로서의 남성과 여성그들이 이루는 가족은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어떤 주저함, 망설임의 표지인 ……을 필요로 했을까?

브라운은 여기서 개인과 가족의 관계에서 사회의 기업화, 자본화라는 기획이 머뭇거리게 되는 지점을 발견해 낸다. 경제화된 세계의 기본 단위는 가족인가 개인인가? 이런 질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성별 위계를 자연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표상의 근저에 놓인 가부장제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 같은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과 가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머뭇거림에는 기호학적(semiotic) 목적이 있으며 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머뭇거림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모든 개인이 경쟁하는 인적 자본이라면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가족은 인적자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성과 연속적인가 아니면 단절적인가? 또한 자기 투자를 추구하는 인적 자본으로서의 개인의 본질과 정서적 유대를 본질로 하는 가족의 영역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3.이러한 질문은 개인을 인적 자본으로 주체화하는 기획이 사실은 성별분업에 기초한 가사노동/돌봄노동을 은폐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해준다. 실제로 페미니스트들은 인적자본이란 결국 남성이라는 비판을 해왔다. 그러나 브라운은 여기서 인식론적 문제를 추가한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만열 할 때, 개벌적인 인적자본의 가치 증대 활동이 언제 어디서나 통치 규범으로 작동할 때……어떤 젠더화된 질서가 생산 및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여전히 제기해야만 한다.(136~137)

 

다시 말해 이는 결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으로 통치화될 때 젠더 질서에는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유일한 주체형상이 되는 세계에서 여성은 다음 두 가지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브라운은 전망한다. 첫째는 여성도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은 여성이 생존하기에 부적합한 곳이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상호 경쟁만을 아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활동하는 세계에서 여성은 세계의 유대를 위한 그림자노동을 수해하지만 여전히 그 노동은 더더욱 가치절하될 가능성.

물론 이러한 답변은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 비판이 40년간 줄곧 주장했던 바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여성주의자들이 재생산노동 및 재생산노동의 시장화 테제를 통해 주장했던 바를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연결시키면서 그것이 젠더 종속을 심화시키는가, 그리고 변화시키는가를 묻고자 한다. 답변은 둘 다이다. 우선 여성의 종속은 더욱 심해진다. 기업으로서 자신의 수익을 책임지는 인적자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이들을 책임지는 역할’, 다시 말해 사회를 재생산하는 노동은 결국 여성의 노동이 된다. 그것도 가치절하된 노동. 또한 젠더 질서는 변화한다. 경쟁하는 인적 자본들의 세계가 이 세계의 진실이 되면 사회적 노동의 성별분업적 성격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 된다. 위계적 성별 분업과 불평등이라는 집합적 차원은 투자-수익을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차원이 되는 것이다. 젠더 관점의 삭제라는 변화.

 

4.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실의 체제로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관계, 권력 관계로부터 기인하는 성적 불평등을 생물학적 성적 차이의 자연적 귀결로 전도한다.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란 호모 에코노모쿠스가 사실은 담론적인 정치적 과정을 통해 젠더화된 존재임을 삭제하는 인식론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론, 혹은 진실 체제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성에게는 신자유주의가 해체하려 하는 가시적인 사회 기반시설의 존속이 필요하며, 자기-투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적자본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지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반시설은 바로 여성이다.(140)

 

신자유주의는 사회 재생산을 담당하던 공적 체계를 해체하지만, 젠더화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활동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인프라는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인프라를 여성이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그 사회적 인프라는 공적 성격을 전부 상실당하고 사적인 것으로 여겨져 비가사회되고 이 비가시성의 영역에서 사회적 인프라 자체로서 수행되는 여성의 노동은 가치절하된다. 그리고 이 비가시화/가치절하가 바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물적 조건 중 하나이다. 경제적 합리성을 체화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신을 자본으로 삼아 다른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를 재생산하는 노동을 하는 여성을 사회기반시설로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5.그렇다면, 경제적 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에서 경제’(economy=oikos) 자체가 이중화되는 것이 아닐까?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관계에서 오이코스가 폴리스를 장악한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이제 필연성의 영역이자 비시민의 영역인 오이코스와 자유의 영역이자 시민의 영역인 폴리스의 구별은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오이코스가 폴리스를 자신의 원리에 따라 통치화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공간에서 조차 시민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오이코스에 유폐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브라운의 논의는 오이코스화된 폴리스에서도 시민권, 즉 인적 자본은 여전히 오이코스 그 자체에 유폐된 비시민인 여성의 노동을 통해서 재생산될 수 있는 파테르(pater)들에게만 부여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즉 오늘날 시민권이 사실은 인적 자본이라면 그 인적 자본이 될 수 있는 것도 여전히 파테르인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활동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는 파테라르키아(paterarchia)의 새로운 형태인 것이라고 질문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비가시화된 인프라이다라는 테제의 젠더 정치적 함의 가운데 하나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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