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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 젠더화된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2018-10-19 15: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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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주 쪽글

게일 루빈과 주디스 버틀러는 특정한 섹슈얼리티가 억압되는 방식을 통해서 억압받는 주체가 형성되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루빈은 선물 가치와 금친상간 금기를 통해 친족이 형성되고 여성거래가 일어나는 방식이 만들어내는 여성억압에 대해서 고발한다면, 버틀러는 동성애 금기가 어떻게 자아 내에서 슬퍼할 수 없고 슬픔의 대상이 되 수 없는대상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며 멜랑콜리적 젠더가 형성되는 지를 밝힌다. 현재의 사회에서는 허용된 섹슈얼리티만을 받아들여야만 주체성을 인정받는다. 

루빈은 일탈 1장 <여성거래> 에서 한 사회에서 다양하게 명명될 수 있는 섹슈얼리티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 행위의 산물이 되는지, 변형되고 억압되는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개인이 어떻게 '문화화' 되는지에 대한 인류학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게일 루빈은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의 생각을 이끌어와서 현실을 설명하고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해야하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이들의 작업은 섹스와 젠더를 정치 경제학적인 생산양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공헌을 보여주지만, 여성억압에 대해서 침묵하고 용인하는 한계를 지닌다. 게일 루빈이 주장하는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과 싸워야 하며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친족구조는 생물학적인 여자가 순치된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체계적인 사회적 장치들로, 생물학적 생식위에 문화적 조직이 부과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기가 자연상태와 문명상태를 구별하는 핵심적인 기준이라고 지적한다. 누구와 함께하고,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선택을 제한하며 "근친상간 금기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한다" (109). 근친상간 금기를 통해 형성된 친족 체계는 사회적 구성물인 동시에, 아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집단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개인은 증여권을 가지게 되는 남성과 거래되는 선물로서 여성, 이 둘 중 하나로 자기를 동일시 하도록 강제적으로 형성된다. 이 구조 속에서 나름의 생산, 분배,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특정 집단은 권력과 신망을 얻고 특정 집단은 억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친족 구조 안에서 개인은 '적절'하고 '정상적'인 개인이 되어야만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체계의 핵심이 남성들 사이의 여성 교환에 있다고 보았다. 다만, 여성 교환은 모든 사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거나 반드시 나타나는 보편성이 아님을 밝혀야 한다. (보편성으로 이해하는 순간, 여성의 억압을 사회를 상상하는 순간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러한 여성 교환은 아주 빈번히 일어나고, 여성 억압의 핵심적인 기제로 작용한다.

정신분석학은 유아가 사회화가 되고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겪게되고 겪어야만 하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는 한다. 다시 말해, 전-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양성애적이고 양성적인 유아가 어떻게 남자아이가 되고, 여성아이가 되는지 설명하는 정신분석학은 어떻게 남성이 여성 거래의 증여권, 라캉의 언어로 팔루스를 가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아이들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쳐, 그의 리비도와 젠더 정체성이 문화적 규칙에 순응하도록 조직된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구를 가지지만, 자칫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는 성인이 되면 자기 여자를 차지한다는 관계를 보장 받기 때문에 리비도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 인내하면 그의 사회계약 권리는 승인된다. 반면, 여자아이는 모든 여성에 대한 금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자 아이의 어머니를 향한 욕구는 동성애적 위치로 인해서 부정되며, 팔루스가 없어 다른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팔루스가 순환되는 상직적 교환 체계 속으로 그녀가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아버지를 통해서 뿐이다" (127). 그러나, 여자 아이는 팔루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팔루스는 그녀를 통과하며, 그로 인해 팔루스는 어린아이로 변혀된다. ... 그녀는 팔루스를 '얻을' 수 있지만 남성에게서 받는 선물로서만 얻을 수 있다" (128).

레비스트로스가 밝히는 친족구조의 핵심, 근친상간 금기는 라캉이 밝히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 팔루스의 비대칭적 위계질서 부여를 함으로서 형성된다. 주디스 버틀러의 글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에 대해서 통찰한다. 버틀러는 본인의 글을 "정신분석학적인 이론과 결합한 문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359). 버틀러는 우울증적인 동일시는 자아가 젠더화된 성격을 습득하는데 핵심적이며, 이를 통해 동서애적인 애착의 상실을 애도하기가 어려운 현재 문화 속 곤경에 대해서 조명한다고 밝힌다. 버틀러는 근친상간의 금기에 앞선 동성애 금기가 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근친상간 금기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이성애주의를 전제하고 있으며, 동성애를 애도할 수 있는 영역으로 부터 가능성 자체를 폐제시킨다. 애착대상이 상실되는, 즉 어떤 사람의 성적 대상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에, 자아는 자아의 내부에다가 대상을 설치하여 "해소되지 않은 슬픔의 침전물이자 고고학적인 잔재"처럼 자아안에 남는다. 우울증적 동일시는 자아의 일부로서 자아 안에 대상을 보존하게 해줘 상실이 완전한 상실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단절하지 않고 애착대상과 동일시를 통해서 우울증적인 합체가 된다. 이는 일종의 상실을 거부하는 대응기제의 작용이다. 이성애는 분명히 금지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배제된 상실은 청산될 수 없는 애도를 부른다. 특정한 형태의 상실이 사회에서 계속 되면서, 우울증은 만연화되어있다. 하지만 드랙의 예시에서 보여주듯, "'정상적인' 구성에서 수행된 젠더는 일련의 부정된 애착과 '수행불가는한' 다른 영역을 구성한 동일시에 의해서 구성된다 ... 사실상 성적으로 수행발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것은 젠더 동일시로서 수행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368).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는 거부되고 사실상 대상에 대한 비판이 자기비난의 경험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상당히 자학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루빈의 독해가 맞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각 개인의 오이디푸스적 경험이 덜 파괴적이게 되는 방식으로 섹스와 젠더의 영역을 재조직함으로써 문화의 오이디푸스 위기를 해소하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133).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하는데, 혁명적인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지금까지 축적되 있는 친족체계의 구성 양상과 역사를 전부 다 들어내고 폐기할 수 없다면, 어떻게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핵가족이 크게 자리잡은 우리 사회에서,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자체를 폐기하는 것일까? 대안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오이디푸스 위기가 최소화되도록 어떻게 구성이 가능한가? 

"우리는 여성으로서 억압받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억압받고 이쓰며, 아마도 그 점은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억압의 철폐 그 이상을 꿈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 역할들의 제거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꿈은 양성적이며 (섹스가 없진 않겠지만) 젠더가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이다. 그런 꿈속에서 한 사람의 해부학적 성은 그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하며,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문제와는 무관할 것이다" (140-141).

위계적인 권력구조와 그 억압에 대해서 파헤치려고 발버둥치면서 억압 구조의 원인이나 양상에 대해서 계속 접하게 되지만, 항상 불안하다. 내가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지, 그 세상의 모습이 구체적인 모습은 내가 이 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쉽지 않다. 강제적인 이성애가 해체되었을 때 오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 세상은 집단을 정의하면서 '보편자'를 설정하지 않는, 위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가? 아니면,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강제적 이성애를 부시고 나면, 권력은 다시 재배치될 뿐인가? 만약 그랬을 때, 현재 사회에 너무 깊게 뿌리 박혔던 이성애주의를 벗겨버리면, 그 이후에 오는 권력은 계속해서 전복될 수 있을 만큼 뿌리가 깊은 권력은 아니게 되는 것인가? 내가 당장 벗겨야 하는 것은 이성애 중심주의적 사회이고, 쉽게 벗겨지지도 않을 것이며, 아직 오지도 않은 그 이후를 걱정하는 것은 기우지만, 권력 전반의 구조를 감안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이란 어딜까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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