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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여성 혐오는 어떻게 탄생하는가.2018-10-19 12: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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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는 어떻게 탄생하는가.-게일 루빈, 여성 거래 



게일 루빈은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와 레비-스트로스 이론을 경유하여 여성 억압의 원인을 분석하다. 이러한 분석 작업은 젠더 위계가 없는 성 평등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행해야할 작업이다. 이는 현재 작동하는 억압을 합리화하는 각종 잘못된 설명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분석에 앞서 게일 루빈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명제를 반복한다. ‘금은 그 자체로 돈이 아니고 설탕은 그 자체로 설탕의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그것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다이는 다시 여성에게도 적용된다. ‘순치된domesticated 여성이란 무엇인가? 인간 종 여성이다. 앞선 질문은 뒤의 설명이나 매한가지이다. 여성은 여성이다의 동어반복이다. 그녀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인, 아내, 재산, 플레이보이 바니걸, 매춘부, 또는 인간 속기록 기계가 될 뿐이다. 금이 그 자체로 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기타 등등 자체가 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그녀는 더 이상 남성의 조력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가 생물학적인 여자female를 억압받는 여성woman이 되도록 만드는 것일까?’(92)

여성 억압에 대한 해명에 대해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가 출발점을 제공한다. 물론 두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작업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는 않았’(93). 또한 루빈이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둘 다 자신들이 기술한 과정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93) 루빈은 프로이트나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마르크스가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을 읽어냈던 방식으로 -독해하고자 한다. 이 작업 이전에 마르크스가 놓친 것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성 억압 sex oppression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개념화하는 데 실패했다.(94)

게일 루빈이 비판하듯이 맑스주의 전통은 물질적 삶의 두 번째 측면을 발견했으나 그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 게일 루빈은 바로 이 대목을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르면서 이를 분석한다. 섹스/젠더 체계의 억압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이 체계에 대한 다른 이름들을 살펴보는 작업도 흥미롭다. ‘물질적 삶의 두 번째 측면은 섹스/젠더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재생산 양식이라고 다른 말로 불리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섹스/젠더 체계는 재생산 양식이지만, 성적 체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한 예이며, 생산 양식에서도 역시 재생산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섹스/젠더 체계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의 재생산인 생식 관계들’(102)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른 것들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부장제라는 개념 역시 모호한 대목이 있다. 가부장제라는 용어는 이것으로 적절히 묘사될 수 없는 젠더 계층화 체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되어온 여성 억압의 오래된 구조를 밝힌다. 이를 위해 살펴보는 것이 친족 체계다. ‘친족 체계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섹슈얼리티의 구체적 형태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또한 재생산한다. 친족 체계는 섹스/젠더 체계를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형태들이다.’(104)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에 대한 이론은 섹스/젠더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친족 체계에서 여성 교환은 단지 여성을 교환하는 것’(113)이 아니라 사회 관계의 구체적 체계들 속에 있는 성적 접근, 가계의 지위, 혈통의 이름과 조상들, 권리, 그리고 사람들-남성들, 여성들, 아이들-을 교환한다.’(114) 이 교환이 문제적인 것은 권리가 불평등하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특정한 권리는 남성에게, 그 밖의 다른 권리들은 여성에게 귀속시킨다.’(114) 여성 교환을 친족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던 레비-스트로스가 옳다면, 여성 억압은 섹스/젠더가 조직되고 생산되는 관계들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다.(114) ‘여성 교환이라는 개념을 찾은 것은 성적 체계들의 정치경제학을 밝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여성 교환은 친족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공동체는 서로 다른 가족 공동체의 여성을 교환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다른 공동체의 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하나의 사회를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 결혼을 해서는 되고 안되고는 배우는 것. 그러니까 근친상간 금지의 원리를 배우는 것으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룰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원리 그러니까 여성 교환을 통해 권력을 배분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게일 루빈이 지적하는 것처럼 여성은 교환되고 여성을 교환하는 이들은 남성이다. 물론 이때 권력은 교환되는 쪽과 교환하는 쪽 사이에서 위계가 작동한다. 섹스/젠더 체계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를 밝히기 위해 여성 교환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 있다.

그런데 이 근친상간 금지라는 룰. 누가 나의 친족인가. 그 친족 빼고 다른 여자와 잘 수 있으니까... 이러한 룰을 배우기 전의 아이들은 어떤 상태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자신을 남자라고 여자라고 알고 태어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배우고 습득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이디푸스 마법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은 어떻게 양성의 아이들이 성을 획득?하는지, 이성애자 여성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여아든 남아든 아이들의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의 거세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거세되었고 어머니는 이성애자로 아버지를 사랑한다. 이것을 인식한 결과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만족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남근 선망에 사로잡힌다.

팔루스가 결핍된 여자아이. 그리고 여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 남성에게서 다른 남성에게로 양도되는 팔루스. 이것이 정신분석과 인류학이 보여주는 섹스/젠더 체계다. 이러한 움직임인 단순히 움직임이 아니다. 팔루스는 거세 됨과 거세 되지 않음이라는 다른 위상을 생산하고 이는 결국 여성과 남성이라는 동등하지 않은 위상을 남긴다. 게일 루빈의 말을 빌려 정리하자면 남근숭배 문화 속에 사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불안의 의미가 담겨 있는 남근 선망을 남긴다.’(124)

 

남자아이

여자아이

친족의 산물

근친상간 금기, 동성애 금기(강제적 이성애)

팔루스 O

 

선물 할 수 있다.

팔루스 X

어린아이로 변형

선물로서만 얻을 수 있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자

 

이러한 원리가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이 맥락을 바꾼다면 어떨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아이를 양육하거나, 혹은 레즈비언 커플이 아이를 양육하거나... 그렇다면 남근숭배 문화가 아니기에 여성들에게 남근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게일 루빈이 프로이트 이론을 참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 여성 생식기의 열등성’’ 혹은 남근선망상황적 맥락의 산물임을 드러내는 지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드러냄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 역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만약 양성의 성인 모두가 평등하게 자녀를 키우는 것으로 노동의 성별 분업이 일어난다면, 양성 모두가 최초로 사랑하는 대상으로 선택될 것이다. 만약 이성애가 강제적이지 않다면, 이러한 초기의 사랑은 억압될 필요가 없을 것이며 페니스는 과대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성적 소유 체계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최우선적 권리를 가지지 않는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 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 전체는 유물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페미니즘은 친족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134)

 

또한 오이디푸스의 마법은 신경증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만약 신경증의 기원에서 거세를 찾아내는 한, 실재계의 문제가 아니라 상징계적인 것이다.(123) 그러니까 신경증 역시 생물학적인 데에서 원인을 찾고 그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이 상징적 체계의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분명 신경증의 이러한 원리, 그러니까 상징계적인 문제라는 점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증은 자꾸 여성이라는 성별의 특수하고 열등한 질병(?)인 것처럼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사회화했으나 재생물화 되었다고나 할까? 뿐만 아니다. 여성성에 대한 낡은 배치를 합리화하고, 고통에 대한 합리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처녀성의 상실과 출산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 고통에 적응하면서 기쁨을 발견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게일 루빈의 글을 읽으면서 섹스/젠더 체계라는 것이 어떤 고립된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종종 이상향으로 호출되는 원시사회의 교환의 원리(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교환되는 조개껍데기... 등등)에서 내가 왜 불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지 원인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혐오의 원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아직 남성과 여성으로 분화되지 않은 아이들이 이성애자가 되는 과정은 어떻게 여성 혐오가 탄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동성애 욕망을 죄의식화하는 방식. 여자아이는 여성을 절대 사랑하면 안돼. 물론 어머니를 사랑하면 안돼. 대신 강요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불편한동일시. 그리고 남자아이는 어떤가. 어머니를 제외한 여성을 사랑할 수 있어. 그러면 남근(상징화된)을 얻을 수 있어. 아버지와의 거래. 물론, 어머니와 동일시 해서는 안돼. ‘거부된동일시의 원리.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라온 방식이라면... 도대체 누가 어머니에 대해 혹은 여성에 대해 긍정적인 동일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은 레즈비언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편한동일시를 한다. 남성은 또 어떤가. 여성과 동일시를 해서는 안된다. 여성으로 오해받으니까. 절대 절대... 아니라고 거부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지금의 여성 혐오 현상의 원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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