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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주차 쪽글 수정]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사라지는 민주주의 그리고 요청되는 호모 폴리티쿠스2019-04-23 00: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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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사라지는 민주주의 그리고 요청되는 호모 폴리티쿠스 : 민주주의 살해하기1장과 2장을 중심으로.

 

브라운은 통치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경쟁이라는 자신의 이성 형식에 따라 인적자본인 주체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주체 생산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이윤 주체가 인적자본으로서 재탄생 하도록 하는 동시에 집합적 정치 능력의 담지자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를 가린다. 이에 따라 포용, 평등, 자유”(50)라는 민주주의 가치가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에 의해 경쟁, 불평등, 시장 방임으로 대체”(같은 쪽)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실천의 지점들을 찾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형식을 검토하고자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강의를 참고한다.

 

브라운은 신자유주의가 경제 체제라기보다 오히려 통치 합리성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영역을 넘어서 비경제적 영역에까지 경제성장의 논리로 존재를 재편하는 것에 대한 브라운의 기술은 직관적이다. 국가 권력에 한계를 부여하는 다양한 양상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한 푸코의 논의가 여기에 힘을 실어 준다. 푸코에 따르면 국가 이성은 17세기에는 법적 이성에 의해, 18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에 의해 제약받으며 규정된다. “시장에 의한 제약 및 시장의 이성 형식이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의 핵심”(71)이며, 신자유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 축적의 한계 때문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통치성에 닥친 위기”(73)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애덤 스미스의 부활이 아니”(76)며 오히려 시장에 의한 사회 규제”(77)이다. “시장(자본주의가 아닌)”(71) 통치성은 한편으로 정부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 주체에 의지한다. 이렇게 재편된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의 형상(eidos)은 교환이 아니라 경쟁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시공간에 경쟁을 확립하는 동시에 경쟁의 형식으로 에워쌀 수 없는 것들을 비워내는 이중의 활동 형식이다.

 

신자유주의 이성 형식이 세계에 확립한 유일한 인간 주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자기 자신을 노동자로서보다는 자본가로서, 하나의 인적자본으로 정체화 하고, 불평등한 지반 위에서 무한 경쟁의 승자 혹은 패자가 될 운명의 인간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네트워킹마저도 투자자 모집의 논리로 전도되어 어떠한 연대의 기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파편화되고 동시에 연결되지 않는 대중으로 공존하며 고립된다. 이들에게는 공동체도 소속도 없다.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 합리성에 의한 주체화의 결과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푸코에 의해 발견된 표지이다. 그러나 브라운에게 이 표지는 충분치 않다. 외부가 없다고 여겨질 만큼의 신자유주의 규범의 양적 확산이 가져온 질적 변화를 놓쳤기 때문이다. 푸코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호모 주리디쿠스와 호모 레갈리스라는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이윤의 주체이자 권리의 주체로서 드러난다. 브라운은 푸코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단초를 발견하고서도 여전히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이윤의 주체로 본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주권과 사법의 (모순되게도 국가-중심) 용어에 대체로 한정된 정식화, 즉 푸코의 정치적인 것의 정식화’”(91) 때문에 푸코가 근대 사상과 현실 속 호모 폴리티쿠스를 간과했다”(98)고 비판한다. 브라운은 보다 인민의 자기 통치 잠재성의 측면에서 이 사태를 보고자 한다. 인적자본의 등장에 따라 침식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기 지배자이면서 자기 초월자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라 강변한다.

 

신자유주의 이성의 활동에 의해 비워지고 잠재적으로 은폐되는 것은 호모 폴리티쿠스로서의 인간이다. “스스로의 주인이자 데모스의 일부로 지배권을 행사하던 존재인 호모 폴리티쿠스가 퇴출된 후 자신을 어떻게 빚어내고 어떤 길을 거닐며 삶을 살까 같은 열린 질문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도덕적 자치, 자유, 평등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목적이나 목적 달성 수단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도 아니다. …… 심지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쫓는 이익 추구의 존재도 아니다. 포용, 평등, 자유라는 용어는 경제 영역에서 재배치되고 경제 용어로 재정립되어 각각 경쟁, 불평등, 시장의 방임으로 대체되어 인민주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압축적으로 묘사한,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유민주주의 이성과 민주적 상상력을 비워내는 공식이다.”(50~51) 이 공식에 따라 인간 자체가 사라지는 이 현실에 대해 푸코는 무관심하다고 브라운은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를 재편하는 과정에 아주 큰 흥미”(69)를 보이며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호모 에코노미쿠스(그리고 경제 전반)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면서통치하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현대적인 하나의 새로운 장으로 규정”(70) 할 수 있었지만 데모스로서 계쟁을 확립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호모 폴리티쿠스가 근대 전반에 걸쳐 존재했고 최근에 신자유주의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인적자본, 즉 더는 이윤을 적절한 동기로 여기지 않는 존재로 규정하고 나서야 사라졌다”(98)고 주장하며, 압도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생산에 대한 대항 능력으로서의 호모 폴리티쿠스를 요청한다.

 

신자유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경쟁이라는 형식으로 생산한다. 이것의 유일한 미덕은 경제성장이다. 환경의 변화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의미도 변화시켰다.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원칙들이 국민을 시장 원칙에 정치적으로 구속시키고 체제로서의 시장 원칙에 전반적으로 복종시키는”(85) 일련 과정 속에서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브라운은 푸코가 자유주의를 권리 및 권리의 명문화, 즉 사회계약 이론의 한 갈래로 이해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시장 진리와 시장 규제를 통해 정부를 변형시키고 조직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통치 대상인 주체로 삼는 정치적-경제적인 정식으로 묘사”(72)하며, “경제 성향, 한계, 정부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나 이윤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보나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간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73)으로 이해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브라운은 권리 주체로서의 호모 주리디쿠스나 호모 레갈리스는 호모 폴리티쿠스와 서로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며 통치성을 인민의 자기 지배의 힘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이 신자유주의가 질적으로 다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을 가능케 한 한편으로 근대의 호모 폴리티쿠스를 넘어서는 인간아닌 인간을 가능케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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