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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 차 쪽글]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2018-10-19 16: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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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루빈, 「1장 여성거래」,『일탈』 을 읽고

이정욱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134p) 이 문장에서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 방을 날린 기분이랄까. 나는 공부를 해나가면서도 여전히 내가 왜 이론을 공부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당위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주 차 텍스트를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왜’ 공부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고, 이번 주 텍스트인 게일 루빈, 「1장 여성거래」,『일탈』 을 읽고, ‘어떤’ 공부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게일 루빈은 그의 책에서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종속의 성격, 기원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젠더 위계가 없는 평등사회에 도달하려면 무엇이 변화해야 하는지 묻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한계를 논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설명하면서 여성 억압에 대해서는 분석해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란 무임금 노동과 잉여가치를 추출하며 증대시키는 재화의 양이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잉여가치란 “노동계급 전체가 생산해낸 것과 노동계급을 유지하는 데 재활용되는 총량의 차이다” (97p) 하지만 노동자의 재생산 과정에서는 가사노동이 필수적인데, 왜 여성이 그것을 도맡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엥겔스는 인간의 생산과 종의 번식 욕구들이 ‘자연적 형태’ 그 자체로 충족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음식, 옷 등 기본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생활양식은 그 욕구를 자연적 형태로 충족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게일 루빈은 그의 논의를 확장시켜 섹스/젠더 체계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섹스라는 이름을 획득한 행위 역시 사회 체계 내에서 획득된 것이다. 


  다음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개념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여성 억압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이 “생물학적 생식이라는 사실 위에 문화적 조직을 부과한 것”이며, 체계의 핵심은 남성들 사이의 여성 교환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선물의 증여를 통해 사회 관계를 형성하는데, 선물은 각 교환파트너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고 공고화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남성에 의해 거래되는 여성은 자신의 교환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입지가 전혀 없으며 교환에서 나온 산물의 수치인은 남성이다. 또한 근친상간 금기는 가족과 집단의 선물 메커니즘을 위한 장치로서, 여자 형제,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도록 강제하는 규칙이다. 이러한 ‘여성 교환’은 “여성 억압을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 체계 속에 위치시킨다.”(111p) 이는 ‘문명화된’ 사회들에서 오히려 더 공공연하게 횡행한다. 이것은 문화적 정의도 아니고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체계도 아니다. 여성 교환 개념은 섹스/젠더라는 사회관계들의 특정한 측면들을 예리하고 압축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성 정체성이 모호한 어린아이가 어떻게 젠더를 획득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학문으로서 연구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적절한 성적 인격을 생산하기 위한 장치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를 거친 아이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규칙에 순응하도록 리비도와 젠더 정체성이 조직된다. 


  결국 친족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성의 분리가 필수적이며, 확고한 섹스/젠더 체계가 지금의 ‘정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친족 체계와 젠더 체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섹스/젠더 체계는 불변하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며, 전통적 기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상실했다. 따라서 게일 루빈은 정치적 행동을 통해 섹스/젠더 체계를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론을 공부하고 사회를 연구하는 일이 내게 주는 의미는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조금 더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인 것 같다.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과 같은 상상과, 그것이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은 나만의 상상을 하기 어렵고, 이론을 흡수하는데 급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기도 어렵지만 언젠가의 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나는 편협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내가 살아갈 나의 세상은 멋있고 광할한 상상으로 채워나가고 싶다. 앞으로의 나의 페미니즘 공부는 그렇게 채워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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