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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주차쪽글]지금 여기에서 다른 곳을 상상하기. -젠더 테크놀로지를 읽고.2018-10-12 16: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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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다른 곳을 상상하기.

-테레사 드 로레티스(1987), 젠더 테크놀로지를 읽고.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1960·70년대의 페미니즘적 글쓰기와 문화 실천에서 성적 차이로서의 젠더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성적차이()의 개념적 한계는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첫째 페미니즘의 비평적 사유를 보편적인 남성여성의 차이라는 개념틀에 가두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경우 여성들 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 한계는 페미니즘적 사유가 지니는 급진적 인식론의 잠재력을 주인의 장벽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번역본 p.2)이다. 여기서 페미니즘 사유가 지니는 급진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주체성과 사회성의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p.2)이다. 페미니즘의 인식론 속에서 주체는 젠더를 통해 구성되지만 성적 차이만으로가 아니라 여러 언어와 문화적 재현에 걸쳐 구성된다. 그러니까 이 대목이 중요한데 젠더라는 개념이 여전히 이라는 생물학적으로 불변의 요소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문제다. 그래서 젠더는 늘 이분법적 성 구분에 환원되고 이성애 담론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저자는 기존의 젠더 개념이 성적 차이()에 묶여있다고 비판하고 그것에 인접하지 않는 젠더 개념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이다. ‘젠더육체의 속성이나 인간의 내재된 요소가 아니라’ ‘젠더 테크놀로지에 의해 생산된 효과들의 집합’(3)이라는 것이다.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을 전개하기 위해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푸코의 이론이다. 그리고 영화 용어인 space-off라는 개념을 통해 페미니즘 주체가 탄생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한다.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다. 이 글은 모든 이데올로기는 개별적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다라는 문장을 젠더는 구체적 개인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다라고 바꾼다. 바뀐 문장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식?과도 같다. 그렇다면 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젠더가 실재한다는 것인데, 어째서 일까. 젠더는 실재담론에서는 받아들여지나 이것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철학과 정치가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라면 실재하는 젠더 역시 분명히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젠더를 빠뜨린 이론은 단순히 게으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가진 권력의 속성을 상기할 때, ‘알튀세르의 이론 자체가 젠더 테크놀로지로 기능할 수 있다’(p.6)

저자의 알튀세르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알튀세르 이론의 이데올로기 외부에 대한 상정에 대한 비판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이데올로기 외부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 신비화된 상태를 볼 수 있는 외부를 말했는데 그것은 과학, 과학적 인식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이러한 틀을 사용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알튀세르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이론적 구성물로, 여성들이 아니라 어던 과정을 개념화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주체가 완전히 이데올로기 안에 존재하면서도 자신은 그 외부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달리 현재 페미니즘 내부의 글쓰기와 토론에서 등장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주체들은 젠더 이데올로기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고,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 나뉘어짐, 두 겹의 시선을 알고 있는 주체다.’(p.9)

 

그런데 이 글이 말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고’ ‘두 겹의 시선을 알고 있는 주체라는 것은 여전히 구체적으로는 어떤 상일지 궁금하기는 하다. 젠더 이데올로기의 억압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 겹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이어지는 설명에서 보는 것처럼 대문자 여성과 소문자 여성들 사이의 불일치와 관련된 것일까? 아니면 이 대목의 설명을 참고 해야 할까. 재현으로서의 대문자 여성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들의 차이를 알면서도 상상적 관계를 고집하는(이때의 고집은 여성 자신이겠지..?) 모순 속에서 페미니즘이 세워져야 한다는 설명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젠더 이데올로기 외부에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모순 속에서 페미니즘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페미니즘은 어떤 각성이 아니다.

이 글은 3절에서부터 젠더 테크놀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알튀세르 이론을 잠시 접는데 그 이유를 젠더 재현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호명이론은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젠더 재현이라는 것이 매우 다층적인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는 것. 단순히 한번 이름 부르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푸코의 성의 테크놀로지라는 이론을 언급하면서 젠더 재현이 어떻게 통용되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푸코 보다는 영화이론가들이 젠더 재현을 구성하는 젠더 테크놀로지에 대해 더 잘 설명하더라는 것이 이 글의 설명. 그러니까 남성과의 대조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다시 말해 아담의 갈비뼈와 같은 것으로 묘사된 여성 재현의 문제를 짚어 냈다는 것이다. 루시 블랜드의 경우 여성 섹슈얼리티가 남성 섹슈얼리티와의 관계 속에서 묘사되는 전통을 비판했다. 이러한 전통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1세대 페미니스트들도 마찬가지(p.14) 이는 모두 이성애 성교 특히 삽입 섹스(14)라는 전통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남성 참조 틀 바깥으로 걸어나가야’(17)필요가 요구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이 글이 지적하는 것처럼 기존의 담론이 놓친 것들에 대해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푸코의 이론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 될 수 있다. 섹슈얼리티와 성적 억압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술들과 싸우(14)는 작업을 하면서 젠더를 부인(14)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의 성적 억압의 수많은 테크닉, 장치 등에 대해 침묵했고 이는 분명 남성 젠더화된 주체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14)승인인 것이다. 웬디 홀웨이 또한 푸코의 담론이 놓친 것을 지적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젠더차별화된 의미와 위치(14)의 문제에 대한 지적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모든 담론젠더에 따라 차별화’(14)되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 같은 행동도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홀웨이의 이론에서 흥미로운 것은 개인의 투여에 대해 말한 대목이다. ‘개인은 어떤 담론의 위치가 약속하는(그렇지만 반드시 제공하지 않는)상대적 권력 때문에 특정한 담론의 위치에 투여’(15)한다는 설명이다. 현재의 이성애구도도 이러한 투여의 결과인가? 저자는 홀웨이의 투여이론?의 한계도 역시 명확하다고 지적하는데 어떤 대목에서 문제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 궁금한 대목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모니크 위티그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담론의 힘(17)을 말하는데 주로 대중매체의 담론에 의해 생산되는 담론’(17)이다. 역시 이성애 담론이 아니면 우리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억압하게 한다는’(17).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젠더 테크놀로지와 제도적 담론을 통해’ ‘젠더구성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저자가 정리하는 세 번째 명제다. 저자가 이제까지 서사이론을 분석한 것도 바로 젠더 테크놀로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많은 이론은 젠더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여성 주체를 상상하지 못했(18)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젠더 테크놀로지가 된 서사이론 바깥으로 나갈 수 없나?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분석하면서 페미니즘 주체가 두 겹의 시선을 아는 주체라고 정의할 때도 느꼈지만, 이 글의 흥미로운 지점은 다른 조건역시 헤게모니를 획득한 담론의 주변부에 존재한다’(18)고 언급하는 대목이다. 구체적으로 이 글이 무엇을 대안으로 모색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가에 대해 보기 전에 저자가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대안을 보자. 저자는 모계가 중심이 되는 과거’ ‘젠더의 모순적 요구와 억압적 보상 때문에 곤란함을 겪지 않아도 되는 세계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같은 이유로 젠더를 본질주의나 신화적인 개념으로 폐기’(20)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대한 비판은 이데올로기이론(알튀세르)에 대한 비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단순히 반대하는 명제에 대해 이항대립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은 오히려 생물학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 하다. 혹은 엄연히 존재하는 젠더 모순의 순간들을 눈감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끝으로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담론의 사각지대, space-off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영화이론에서 가져온 것은 프레임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프레임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저자가 이 공간을 가져온 것은 섹스-젠더 체계 외부에 어떤 사회적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즘 주체가 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공간을 상상하는 것인지 표현하기는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다만 추론이나 암시라는 단어에 주목을 하고 싶다. 그러니까 분명히 추론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뭔가 암시한다. space-off혹은 elsewhere에 대한 상상을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요소인 듯하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요약이다. 서구 남성 이론가들의 이론을 공부하는 인문학도에게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니까 결국 서구의 정전들을 리딩하는 행위로부터 도망가는 것도 안 돼. 혹은 단순히 뒤집는 것은 더더욱 아니요, 내파 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게 어렵다고요! 나의 투정에 그녀는 나처럼 해 봐라고 말하는 듯 하다. ‘푸코와 알튀세르만 읽고 그친 것이 아니라 울프와 매케넌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분석과 비평의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흡수했기 때문’(19)이라는 것.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현재의 다른 담론에 포함된 젠더 재현을 다루기에 앞서, 나는 젠더를 이론을 비평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거나, 페미니스트이자 이론가로서의 내 경험의 배열을 이동시킴으로써 젠더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내 입장을 간단히 이야기해보겠다. 비록 이전 작업에서 정식화를 하진 못했지만 내가 영화와 서사 이론이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27 내가 젠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푸코와 알튀세르만 읽고 그친 것이 아니라, 젠더에 대해 언급하는 울프와 매키넌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의 경험을 (사회적 실재에 대한 나 자신의 참여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페미니스트 공동체라는 젠더화된 역사 속에서) 자기재현의 실천을 페미니즘 분석과 비평의 방법론으로 흡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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