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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주차 쪽글] 새로운 주체들의 만남을 위하여-차이와 보편성은 오직 대립적인가 2018-10-12 17:57:58
작성자

이문환


                                                                                   새로운 주체들의 만남을 위하여-차이와 보편성은 오직 대립적인가


 

포함을 요구하는 미래의 주장을 미리 폐제하지 않기 위해, ‘보편성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열린 채로, 영원히 논쟁적으로, 영원히 우연적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주디스 버틀러, <우연적 토대: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

우연적 토대에서 버틀러는, ‘포스트모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것이 근대에 대한 분석에 불과하고 새로운 것이 아님을 설명하며 동시에 현실은 없고 오직 재현만 있을 뿐이라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총체성을 밝힌다. 또한 그것에 대항하는 전략으로서 일차적 전제를 강화하려는 즉, 안정된 주체를 설정하는 일련의 행위는 전체주의적 계략으로 정치의 영역을 미리 폐제하는 것이며 동시에 강제한다고 말한다. 담론의 외부에서 선험적이고 암묵적이며 보편적 동의를 전제로한 입장에 의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은 그 자체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배제를 통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토대를 유지하면서, 담론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며 주체성과 자기재현의 차원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개인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이미 수많은 배제와 삭제가 작동하는 사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며, 불가능 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이고 어떻게 충족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텍스트를 읽으며 떠오른다. 무엇보다 본질주의를 넘어서는, 관계성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 가능하다는 명제에 대한 설명-이론이 어느 경로를 통해서든지 사회담론혹은 교육의 영역에 진입해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담론의 매트릭스에서 교차되는 수많은 위치에서 나오는 각각의 억압과 배제는 순간의 힘으로 그 효과가 상쇄될 수 있겠지만, 그 다양한 위치만큼 저항의 언어 또한 분리 될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탈취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 정체성, 혹은 억압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다. 그저 (고정된)보편적 언어로서의 제도가 배려해주는 변화를 얻어낼 뿐일 것이다. 관계성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이해는 개인의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라는 물질적 몸으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방법은 개인과 엮이는 지점을 이론적으로, 추상적으로라도 제시하는 것 일텐데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때문에 연대는 중요해진다. 억압되고 배제된 이들이 혹은 단체들이 (본질적)정체성이 아닌 존엄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상호작용의 지평 안에 현상한다면 그리하여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연대한다면 사회담론, 교육의 영역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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