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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주차쪽글] 정체성 정치와 상호교차성은 어떻게 만나는가?2018-10-05 09: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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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론학교_쪽글_20181005_임당


정체성 정치와 상호교차성은 어떻게 만나는가?

컴바히 강 공동체,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 1977

 


  해제에서 한우리는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을 “억압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꿰뚫어 본 컴바히 강 공동체의 선언문은 ‘정체성 정치’의 핵심을 담은, 급진적 페미니즘이 이룬 중요한 성취”(170)라고 평한다. 이 글에서는 선언문이 가지고 있는, 상호교차성의 특징과 정체성 정치가 선언문에서 각각 어떻게 드러나 있으며, 이 두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상호교차성’은, “상호교차적인(intersecting) 또는 겹쳐지는(overlapping) 사회적 정체성 및 이와 관련된 억압, 지배구조, 차별을 연구”하는 개념이다.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는 단일하지 않으며 젠더, 인종, 사회 계급 등 다양한 측면이 상호교차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특정한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불평등은 여러 억압이 맞물려서 일어나는 결과인 것이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겹쳐져 있는 억압들의 구조와 억압들 간의 동시작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견해 : “우리는 인종 억압, 성 억압, 이성애 중심주의, 계급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주요한 억압 체계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채 통합적인 분석 및 실천의 계발을 과제로 삼고 있다.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억압이 우리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 흑인 여성으로서 우리는 모든 유색인 여성이 겪는 억압에 맞서 싸우는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을 흑인페미니즘 이라고 생각한다.”(147)

- “우리가 먼저 다룰 것은 반인종차별과 반성차별의 결합이며, 이어 정치적 맥락을 전개해나가면서 이성애 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제적 억압 문제를 다룰 것이다.” (151)

- “우리는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성정치가 계급정치와 인종정치만큼이나 흑인 여성의 삶에 널리 퍼져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성적 억압에서 인종억압과 계급억압을 떼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억압은 우리 삶 속에 동시에 들이닥치기 때문이다.(중략) 인종차별적이면서도 성차별적인 억압이 있다는 것.”(153)


  ‘정체성의 정치’는 “어떤 집단(이를테면 인종, 민족, 문화, 젠더 집단)에 소속 여부에 기반을 두는 정치적 동원의 형식이다. 그리고 집단에 대한 소속 여부는 그 집단을 정의하는 어떤 공통 경험, 조건, 특징으로 그 경계가 정해진다.”


- “우리가 겪는 억압에 초점을 맞춘 것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가장 심오하며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은 바로 우리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다른 누군가가 받는 억압을 없애려 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153)

- “우리는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가 해방되기를 원한다. 이는 단순하고 분명해 보이지만, 그동안 흑인여성이 겪는 특수한 억압을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고 그 억압을 없애기 위해 진지하게 임했던 다른 진보적인 운동은 없었다.”(152)


  흑인여성이라는 정체성은 ‘흑인×여성’ 이라는 억압들의 상호 교차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특정한 정체성이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은 흑인여성을 결집시키고, 억압에 맞서 정치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인종 정체성과 성 정체성의 결합이 그들 전 생애를 결정지었다는 것을 알았다.”(148) 


  흑인여성은 인종의 이름과 성적인 분류의 결합으로 탄생한 억압 하에 구성된 특정한 정체성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교차된 억압이 ‘억압+억압’의 형태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억압을 낳으며, 정체성의 교집합 또한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낳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차는 억압들의 교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의 교차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억압은 정체성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정체성을 개념화하고 운동을 조직함으로써 억압은 폭로되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둘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에 의해 개념화 되는 것일까.

  정체성의 정치와 상호교차성, 이 두 개념은 서로 잘 들어맞는 듯하면서도 어긋나는 지점들이 발견된다. 정체성의 정치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 특정한 불평등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조류가 시작되면서 발생한 워마드를 비롯한 집단들은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이 자신들의 운동에 함께할 수 있다는 식으로 구분선을 지어놓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정치 자체가 문제일까? 아니면 어떤 정체성 정치만이 문제인 것일까?  정체성을 상호교차성의 관점에서 사고하지 않는 정체성의 정치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언문에 명시된 레즈비언 분리주의 거부는 분리주의가 지극히 본질주의적인 방식이기에 반동적인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명시하는 차원에서 제기된다. 분리주의는 상호교차하는 억압들 사이에서 하나의 억압만을 근본화시킴으로써 다른 억압들은 무시해버리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사회적 억압의 작동방식과 얼마나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억압 모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양상이 변화한다는 측면에서 유동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체성 자체가 응결되고, 운동화 되는 순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억압은 그만의 고유한 역사와 방식을 가지고 존재해 왔지만, 정체성 정치와 부딪히는 순간 그 모습을 마치 다른 것인 양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매커니즘 하에서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는 그것의 고유한 근본성을 가정하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정체성의 정치와 상호교차성이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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