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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여성혐오와 재의미화 전략2019-04-05 14: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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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어떻게 살아남는가>에서 언급된 '경쟁에서 패배한 남성들'과 '여성혐오', 그리고 우에노가 책의 종반부에서 제시하는 '생존전략'(보다 광범위하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했습니다.




(마치남성이라는 규범적 정체성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오만함이 나의 발언/행위에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남성에 관해 말하고자 할 때마다 느껴지는 어떤 곤란함이다. 물론 반대로 그 곤란함을 감수하고자 할 때에도, ‘그렇게 살아와서 잘 안다는 식의 확신 역시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에 두고) 남성우월주의나 여성혐오를 버틀러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여성혐오는 (신자유주의적)경쟁의 결과로 받아 든 사회적 지위와 남성성 사이의 불일치를 겪는 남성들(혹은, 남자 마케이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 공격성은 경쟁에서의 패배에 열려 있거나,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둔 남성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 실상 계급과 젠더가 상호 환원될 수 없는 범주로서 그 효과가 중첩되어 개인에게 나타남은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전체에 걸쳐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에 있어, 버틀러의 전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명료성과는 별개로, ‘남성이라는 (규범적)관념은 존재한다. 다만 버틀러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남성이라는 정체성을 비롯한 모든 정체성)을 움켜쥐려 할 때마다 손에서 무언가가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며, 이는 버틀러 이론에서 (배제에 맞서면서 그것을 재생산하지 않기 위한) 저항이 규범(혹은, 규범적 정체성)들에 대한 담론적/계보학적 이해에 대한 부각으로 나타나는 것과 연결된다. , 명료성이 흔들리게끔 하거나,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버틀러 작업의 핵심이며, 그 대상은 주로 섹스-젠더 이분법, 젠더 이분법, 이성애 중심주의 등에 걸쳐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흔듦’이 자연스럽게 여성혐오의 소멸로도 이어질지, 이분법적 젠더에 부여되는 (규범적)특징들 등에 대한 앎으로서의 젠더 담론 내 여성성-남성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재의미화(혹은, 이에 대한 주목)들만으로 여성혐오가 사라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물론 젠더 이분법이 흔들릴 때, ‘남성우월주의/’여성혐오 역시 유지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재의미화 과정은 정체성 범주의 완전한 해체대신 (또는 우리가 그러한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정체성의 새로운 분류/분화와 그들 간 위계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지는 않은가? 여성성-남성성에 대한 통념이 위기를 맞았을 때, 각 관념이 어떤 순수화의 논리로 포섭되면서 규범(규범적 정체성)의 강화와 ()소수자혐오가 발생하지는 않는가?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의 목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버틀러의 전략이 강고한 여성혐오 문화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고 할 때, 특정 범주의 구성성을 보여주는 것이상의 어떤 방향성이 필요해 보인다는 말이다.

이 재의미화(에의 주목)의 방향성을 예컨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혐오의 철폐로 설정했을 때, 그 방향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보다는 어떻게에 주목하고 싶지만, 그와 별개로 반대 측의 끝없는 ’(물론 끝없이 를 묻는 이상적 반대자는 오늘날 현실에서 찾기 힘들어 보이나)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그 끝에는 어떤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의존이나 당위성, 신념이 있을 수 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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