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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 서평] '민주주의 살해하기'와 '민주주의 살아남기’2019-05-03 05: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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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살해하기''민주주의 살아남기

-『민주주의 살해하기에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정의와 확산, 그리고 타개책

 

웬디 브라운의 민주주의 살해하기(2017)는 신자유주의의 민주주의 파괴를 푸코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브라운은 먼저 푸코의 강의록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기반으로, 신자유주의의 핵심 속성인 전방위적 경제화를 짚어낸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분석하기 위해, 브라운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대두된 거버넌스개념을 푸코철학적 개념인 정치 합리성으로 해석한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교육 분야의 예시를 들면서, 신자유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할 방안을 모색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학적인 기반은 프라이부르크 학파와 시카고 학파로 나뉘고, 시대와 지역 그리고 정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명명되고 재현된다. 신자유주의 개념의 이러한 모호성과 다의성은 관찰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느슨하고도 유동적인 기표”(20)역설”(22)로 모호하게 정의하게 했고, 이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을 방해하였다. 이는 푸코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본서의 기반이 되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미셸 푸코가 1970년대 말에 한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당시 신자유주의는 지식인들에 의해 서구 선진국들이 남미 개발도상국에 강제한 그 무언가”(61)로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경제 실험의 의미를 이해한 신제국주의론의 추종자들조차 신자유주의의 서구 사회에서의 움직임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62) 얼마 지나지 않은 80년대가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변되는 제1세계의 신자유주의화 시대였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몰이해를 해소하고자 상기한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논의의 중심으로 불러낸다.

 

핵심은 신자유주의 합리성이 시장 모델을 모든 영역과 활동(돈과 아무 상관이 없는 영역과 활동에조차도)에 퍼뜨리고 있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언제나, 오로지, 어디에서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철저한 시장 행위자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36)

 

푸코의 강의록은 신자유주의를 규범적 이성으로 규정하며, 그 핵심을 경제화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시장 원칙으로 해명하고 한정하려는 것에 있다. 물론 경제라는 단어는 시공간적 포괄성을 띠기에, 경제화의 원리를 신자유주의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푸코가 규명하는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195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개편된 형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푸코는 자유주의 역시 시장 통치성을 염두에 두고 탄생”(72)했다고 주장하지만, “시장 자체를 인간이나 정부의 원칙으로 격상시키지 않는다”(76)는 점을 명확히 한다. , 자유주의도 시장을 통치 원칙으로 고려하고 있지만, 이 원칙은 오직 경제 주체나 정치 주체를 해방하려는 목적에서 수단으로 동원될 뿐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의 점진적인 재편은 시장 원리를 비경제적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경제화를 추진했고, 이는 경제가 개인과 국가를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복속 과정은 위에서 인용한 푸코의 개념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과 브라운이 새로 제시하는 개념인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사이의 대조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호모 폴리티쿠스는 국민주권의 실현에 의해 그리고 그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자 스스로를 통치하는 주권적인 존재,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관계는 시대를 막론하고 후자에 대한 전자의 명백한 종속의 성질을 띤다.(110-111) 전근대를 장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의 논리를 호모 폴리티쿠스의 자급자족 외에는 적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존재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부정당했다. 스미스나 벤담, 밀 등 근대 학자들에 의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 관여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본질 그 자체로는 확립될 수 없었다. 브라운은 그 이유로 자기-주권의 필수 조건인, 결코 쉽지 않은 합리성의 체화”(126)를 꼽는다. 근현대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협상(스미스쾌고 계산(벤담, 충동(프로이트) 등 다양한 욕구에 이끌리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성을 통해 스스로를 제어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이성이 국가와 주체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을 경제화하면서, 호모 폴리티쿠스와 개인 주권의 동치 관계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전방위적 경제화로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시장 원칙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다. “데이트를 할 때도 우리는 그것이 금전적인 부의 생산, 축적, 투자의 영역이 아닌데도 기업가나 투자자의 관점에서 접근하게”(36) 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거버넌스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 거버넌스는 그 속성이 본래 신자유주의적이지도 신자유주의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신자유주의는 거버넌스의 형성과 발전을 동원하는 동시에 점점 더 그것에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거버넌스를 동원하고 그것에 집중하여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명확히 표현해서 신자유주의 합리성을 동시대의 존재 전반에 전파하고 정치의 속성과 의미를 탈바꿈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번 장의 초점이다.”(161)

 

그렇다면 이리도 급진적인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확산되었는가? 4장에서 신자유주의 이성의 나팔수로 꼽히는 것은 거버넌스정치 합리성이다. 정치 합리성은 푸코가 사용한 용어로, “규범적 이성의 헤게모니 질서”(158)로 정의된다. 정치 합리성은 우연적이면서도 완전무결한 것처럼 가장하며, 인간 삶의 모든 것과 관계를 조직하고 양산하는 지식이며 권력이다. 거버넌스는 이러한 정치 합리성의 일종으로, 신자유주의와 동일하지 않되 신자유주의 이성의 전파에 동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폭넓게 쓰이는 거버넌스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통치 중심의 탈중심화”(165)이다. 통치 체제나 명령은 사라지고 여러 조직이 권력을 나눠갖게 되어, 주체는 기존의 통제 대신 관리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거버넌스의 이런 특성이 신자유주의 이성과 결합하면서 낳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영역이 경제화되어 목적이 경쟁 우위의 점유로 고정된다. 그 결과로 내부적인 논의와 투쟁은 권력이나 정치라는 이름으로 묶여 부정적이고 적대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탈정치화현상은 협력과 실행을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갈등은 그 이면에 상주하기에 거버넌스의 정치는 정치에 대한 멸시를 더욱 부추기는 술책과 거래로 움직이게 된다. 둘째, 중앙집권적인 공동 권력은 유명무실할 정도로 쪼개져 개인이나 개별 부서에 이임된다. 하지만 이임된 권력은 뒷받침할 자원도 없이 전달되어 유명무실한 것에 비해, 개인과 개별 부서는 자신의 생존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이성의 절대적 목표인 경제 성장까지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러한 과정을 브라운은 책임화라고 명명한다.

 

탈정치화와 책임화는 각각 민주주의 재정의와 모범사례라는 현상을 낳게 된다. 탈정치화는 민주주의에서 권력심의라는 지표, 한도와 제약 설정에 대한 적당한 지배력과 근본적인 가치관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169)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거버넌스가 남은 지표인 포함참여만을 가지고 새롭게 정의한 민주주의는 순전히 절차적이고 공허한 것으로 변질된다. 이와 동시에 모범사례, 그리고 모범사례를 받아들이는 벤치마킹은 모든 조직의 궁극적 목표가 똑같다고, 즉 시장에서의 경쟁 우위의 확보에 있다고 추정”(182)한다. , 모범사례 개념의 근저에는 국가와 비영리기관과 같은 공공의 영역도 민간기업처럼 시장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뒤따르는 것은 호모 폴리티쿠스를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대체한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여타 가치는 시장 가치로 환원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장 가치로 환원되었기에, 모범사례는 이전까지의 공적 가치를 대변하고 수호하던 법과 규제를 축소시키고 대체해나간다. 이러한 모범사례의 확산이 거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이성을 위해, 미시적으로는 모범사례를 생산하고 주도하는 업계 리더들을 위해 작동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하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두 과정은 정치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수호하는 법 모두가 유린되는 현장이다.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진 글로벌 집단과 글로벌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사려 깊고 민주적인 감각을 지닌 인민을 필요로 한다. (...)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도전에 민주적인 방식으로 맞선다면 정확히 루소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좋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인민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는 역설 말이다. 리버럴아츠 교육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교육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회 전체가 깨달아야 한다.”(271)

 

브라운은 이상의 분석에서 민주주의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의 핵심과 작동, 그리고 확산원리를 밝혔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전방위적 경제화를 실천하는 규범 이성이기에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자기-통치적 주체인 호모 폴리티쿠스를 살해하고, 이는 거버넌스를 통해 민주주의를 순전히 절차의 문제로 축소하면서 실현된다.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브라운은 20세기에 꽃을 피웠던 공공 고등교육을 통한 리버럴아츠 교육의 대중화에 주목한다. 냉전을 비롯한 여러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높은 질의 리버럴아츠 교육은 그 시기에 시민운동, 페미니즘, 불평등과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 꾸준히 등장했고, 그 외에도 정의를 추구하는 문화·예술·시민 활동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는 성과를 자랑했다.(256) 하지만 현재의 공공 고등교육은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기업화되었고, 시장 가치가 떨어지는 리버럴아츠 교육은 유명무실한 형태로만 남아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문화를 살찌우고 민주주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리버럴아츠 교육만이 제공할 수 있는 지식을 필요로 한다고사회 전체가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브라운은 주장한다.(272)

 

물론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바로 회복될 리는 만무하다. 공공 고등교육을 통한 대중적 리버럴아츠 교육은 브라운이 제시한 민주주의의 세 가지 필수 조건 가운데 오직 하나의 회복에 지나지 않는다.[1] 또한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의해 속이 비워진 민주주의가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리버럴아츠 교육을 부활시킬 수 있을 리 없다”(272)라는 문장은 그조차도 비관적이라는 것을 내포하는 것처럼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브라운은 위 인용문처럼 리버럴아츠 교육의 생존을 사회 전체의 깨달음에 내맡기고 있고, “인민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에 저항”(271)하는 것을 리버럴아츠 교육의 일부로 포섭하고 있다. , 브라운은 리버럴아츠 교육의 부활을 낙관하고 있진 않으나,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지상과제이자 최전선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푸코철학의 미완된 신자유주의론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현대적 성격을 포착하고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또한 평에는 포함시키지 못하였으나 신자유주의적 인간상에서 가족주의와 성 종속이 심화된다는 분석은 내재적으로 타당할 뿐 아니라, 다른 예시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사회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도 정확하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젠더적인 시각을 하나의 깊이 있는 연구로 확장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의 판결을 다루고 있는 5장에서 돋보인다. 월마트의 여성 고용 차별에 대한 집단 소송을 각하한 것은 모든 차원의 조직적인 민중 세력과 집단의식을 공격”(205)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적자본의 성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성차별을 묵인하고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젠더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서의 출판(20152) 이후 케네디 대법관은 동성혼(Obergefell v. Hodges, 20156)과 동성혼 커플에 대한 사업자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서비스 거부(Masterpiece Cakeshop v. Colorado Civil Rights Commission, 20186)에 모두 합헌 판결 다수의견을 작성했다. 이러한 케네디 대법관의 판결에서 드러나는 것은 서로 경쟁하고 자기 가치를 제고하는 인적자본만이 존재하는”(141) 신자유주의적 분석 틀을 가지면서도, 여성이 처한 구조적 불평등을 묵살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이중성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상술한 신자유주의 분석 틀과 개인, 이성 간 결혼에 바탕을 둔 핵가족 그리고 성별 차이를 존재론화하는 경향이 있는”(132)로서의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보수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괴리로만 설명될 것이며, 이 괴리는 젠더 중심의 신자유주의 연구가 활성화되어야만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1] 요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빈부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을 것. 공공재에 관심을 갖고 중시하는 시민의식이 존재할 것. 권력, 역사, 대의, 정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시민이 존재할 것.”(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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