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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 ‘인정’과 ‘대표’의 구별 가능성과 프레이저의 인정정치 이해2019-04-12 15: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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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읽으면서 든 의문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했습니다.

정당한 의문인지는... 프레이저를 더 읽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ㅠㅠ



『지구화 시대의 정의』 6장에서 낸시 프레이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흐름을 세 국면으로 구분해 제시한다. 1) 신사회운동 시기 페미니즘은 정치경제적 평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다른 맥락의 차별/배제를 주변화하는 사민주의적 국가주의를 거부하기도 하고,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토대 내에서 급진적 운동을 사고하기도 했다. 2) 그러나 동구권 붕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신자유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제2물결 페미니즘은 차이의 수용을 강조하는 인정정치로의 전회를 이룬다. 3) 프레이저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두 번째 국면의 한계와, 그 한계를 뛰어넘음과 동시에 이전 국면들의 분배-인정의 문제의식을 포섭하는 세 번째 국면의 탈-영토국가적 측면이다. 그리고 이는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로 이해된다.

-영토국가적 상상력, 그 상상력의 정치적 구현의 기초로 제시되는 초국적 공간, ‘삼차원적 정치에 대한 강조로 마무리되는 6장을 읽고, 프레이저가 본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2(‘지구화하는 세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2장에서 프레이저는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그는 정의의 설정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베스트팔렌적 틀(또는, 영토국가 중심의 잘못 설정된 틀’) 안에서의 정의 이해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프레이저는 인정과 대표의 문제를 구분하면서, ‘대표의 문제의식, 바꿔 말해 (정의의 내용 결정, ‘자체의 설정 등의 의제에 있어서) 의사결정의 참여자의 조건/자격에 관한 보다 민주적인 이 필요하며 이것이 재분배-인정 문제 파악의 급진화에 기여한다고 본다.

 

그런데 과연 인정의 문제와 대표의 문제는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가? 대표의 문제가 제3의 국면의 것으로 강조되고,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혹시 프레이저가 인정정치를 베스트팔렌적 틀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은 아닌가? 차이의 수용으로 대표되는 인정정치의 문제는 과연 영토국가의 틀 안에만 국한되어 왔는가?

물론 프레이저는 자신이 그은 국면 간의 날카로운 경계선의 양식화된 특성, 도식적 서사를 이해하고 있다. 또한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을 기술함에 있어 영토국가의 틀에 입각한 인정정치가 인정정치 전체의 흐름에서의 주도권을 쥐어 왔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국면 구분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어색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과연 대표의 문제는 인정의 문제그 자체와 명확하게 구분되는(혹은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2물결 페미니즘의 국면 전환(역사)을 서술하는 데 필요한 요소(또는 그 변천을 기술하는 도구)의 의미 이상으로 대표인정’, 정체성정치1로부터의 구별은 얼마나 유의미한 것인지. 인정과 대표의 구분은 어느 지점에서 양자가 다른지에 대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제기 받게 될 것인데, 프레이저에 따르게 되면 그러한 갈라짐의 규명은 인정정치의 문제의식을 오히려 영토국가의 틀이라는 사고 방식에 가두는 것은 아닌지.

 

프레이저의 영토국가의 경계에 기초한 잘못 설정된 틀에 대한 문제화는 (그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아온) 영주권/시민권과 이민자의 문제, 초국적 자본의 영향 아래 놓인 프레카리아트의 상황 등을 논의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유용하다. 특히 (거칠게 말하자면) 꽤 깊게 상호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국적문제와 인종문제의 종별성을 분간할 이론적 자원을 프레이저의 베스트팔렌적 틀에 대한 비판은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국적의 차원은 정체성정치/인정정치의 범주에 포섭될 수 있는 것으로, 또한 틀 설정의 문제의식은 정체성 범주의 부상과 함께 이미 인정정치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는 없는가?2프레이저가 양자를 구분하여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내게는, 분배-인정의 도식에서 암시되는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을 탈피하는 것이, 혹은, ‘인정으로 광범위하게 지칭된 이 범주에 속한 여러 갈등선들(, 인종, 연령, 국적 등)을 구체화하는 것이, 분배-인정 차원을 포섭하는 더 높은 차원의 대표라는 방법론의 설정보다 더 시급해 보인다. 또한 대표라는 메타적 국면에 부여되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표현과 분배-인정의 도식화가 외려 정치의 가능성, ‘정치이해의 범위를 축소할 위험은 없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1) 결집과 연대에서의 용이성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기존 배제의 재생산/새로운 배제의 생산이라는 부정적 측면 모두에 대한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차원에서의 정체성정치

2) 예컨대, 프레이저는 대표는 단지 이미 구성된 정치공동체 내에서 여성들에게 동등한 정치적 발언권을 부여하는 문제와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미 확립된 정치공동체 내부에서 적합하게 포함될 수 없는 정의에 관한 논쟁들의 틀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역시 요구한다.”(195)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미 구성된 정치공동체의 단위를 문제화하는 것이 인정정치 차원의 정체성(특정 정치공동체에의 소속 여부를 결정하는 정체성) 논의의 급진화 시도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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