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기
제목[6주차 쪽글]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전복한다.2019-05-03 16:29:48
작성자

모든 것의 경제화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정치마저 경제화하며, 이 과정은 호모 폴리티쿠스이어야 할 정치적 주체를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기-지배의 주체로 탈바꿈하게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는 웬디 브라운의 주요한 지적이다. 웬디 브라운은 모든 것을 경제화하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법도 경제화하며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 그리고 경제 영역 안에 있는 민주주의 그 자체의 분야를 재구성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대법관 케네디의 판결문을 인용하여 표현의 자유를 통해 어떻게 법이 경제적인 것으로 비유되는지 분석하며 법이 선거권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을 지지하게 됨을 지적한다. 따라서 법의 경제화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본주의에 의해 그 경계가 무너지게 됨을 보여주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의 표현이 된다. 이러한 합리성은 민주주의가 여러 가지 변형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만 하는)‘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핵심 개념을 기업이나 신자유주의의 중요 이익집단에게 거꾸로 돌려주는 법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법이 경제화되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뒤틀린 평등과 자유를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의 경제화란 비경제적인 영역이었던 법을 시장의 영역으로 바꿔놓아 정치 영역을 시장에 비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단 자유 행사 면에서 엄연히 다른 자연인(사람)과 허구의 인격체(법인) 사이의 구분을 없앤다.(207) 그리고 기업의 표현이 정치적인 인격인 시민의 표현과 맞바뀌는 성립할 수 없는 교환을 통해서 선거에 대한 기업의 개입을 법이 인정하도록 한다. 이른바 슈퍼 팩이라 불리는 기업의 정치자금 지원이 합법화되는 것은 정부가 정치자금 지원에 대한 금지 조치를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개인의 정치자금 지원의 표현이 기업의 표현과 등치되는 것으로 되면 정치와 경제가 마치 같은 영역에 있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합리성은 서로 다른 층위의 주체가 정치적 권리를 동일하게 가진 것처럼 취급하며 민주주의를 해체한다.

   


법이 권리 담론을 활용하는 데 따르는 한 가지 효과는 차별과 국가 권력의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의심할 여지없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가치가 오히려 경제화에 의한 기본권의 자체 전복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226). 케네디의 평결문은 시장의 근본적인 역학관계, 즉 강자가 약자를 전멸시키는 경쟁을 은폐한다. 따라서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적 정치의 굴복은 참여 평등권을 파괴하며, 뒤집어 말하면 정치 참여권이 시장화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이 바로 정치적 평등이다(227) 소수에 의해 다수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막는 일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보존하기 위한 임무로 여겨져왔지만 이제 이 일은 정치의 경제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보장해야 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정치에 의해서 대표되지 않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의 정의는 인민이 지배한다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데모스)는 그 무엇도 아닌 인민이 함께 공동의 삶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이상을 대변한다.(275) 웬디 브라운이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진짜로 데모스가 지배한 적은 없지만 데모스가 지배해야 마땅하다는 관념은 (껍데기일지라도) 남아 있어 권력을 다소나마 통제하고 소수에게만 혜택을 부여하는 입법을 제한하고, 밑으로부터의 단발적인 정치적인 활동을 부추기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281)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치 합리성은 데모르사를 개념 자체를 제거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법적 가치와 통치 담론 및 대중 담론을 신자유주의적 가치과 용어로 대체한다.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의 경제화와 거버넌스에 의한 대중 담론 지배가 데모스와 주권이라는 분류 자체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국민주권의 가치가 지워지게 된다.(282)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의한 법의 침투는 민주주의의 데모스 개념을 해체하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용어집을 가질 수 없게 되며 민주주의가 재현하고 대표해야 하는 주체(인민)는 자리할 곳이 없게 된다.

 

인민이 스스로 다스리겠다는 민주주의의 큰 프레임을 각각 분유하고 있는 xx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등등)는 이제 경제적인 소수에 의한 경제적인 다수(고전적으로 가리켜보면 인민에 해당)에 대한 지배를 인정해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 민주주의를 해체하는 방식이다. 웬디 브라운은 법이 권리와 자유에 대한 표현을 경제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통해 정치의 불가능성이 나타난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남아있는 법적 언어 바깥에 잔존하는 인민의 저항(오큐파이 월스트리트)을 반복적으로 소환한다. 이는 사회적인 것, 공적인 것이 파괴되고 있지만 반대로 저항이란 사유화된 공적인 것, 또는 사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데모스의 저항을 통해 다시 쟁탈할 수 있는 것으로 기억하자는 나름의 제안일 것이다.

 

책의 앞 부분에 웬디 브라운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젠더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의문을 가졌고, 간헐적으로는 이와 연결선상의 질문을 던져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젠더가 왜 신자유주의의 합리성과 만나서 페미니즘적 분석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또는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누락된 듯 하다. 법적 언어가 호모 폴리티쿠스이어야 하는 정치적 주체를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어떻게 해체하고 젠더로 나누는지에 대한 분석은 호모 폴리티쿠스에 대한 젠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함께 출발해야 할 것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