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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주차 쪽글2019-03-29 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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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노동시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준다. (혹은 주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리고선 같은 기회를 주었으니 대등하게 경쟁을 하여 승자가 되라는 논리를 펼친다. 패자는 도태된다.
이 논리 덕분에 이전에 무력하게 피기득권층에 머무르던 이들이 기득권을 꽉 잡고 있던 이들과 섞일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은 맞는 말이다. 기존의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위화감을 느끼고, 피기득권들은 제대로 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선물의 포장을 뜯어보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싸움터에서의 승자는 결정되어 있기 마련이다. 싸움판은 응시 단계에서 이미 나누어져 있다. 응시자들은 이미 자신의 학력, 학교, 성별에 따라 차별화된다.

이러한 명목상의 평등은 대등한 경쟁선의 보장과는 다른 위상의 문제인 여성의 실질적인 보호와 교환되었다. 기업은 여성이 노동자에게 당연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양질의 노동환경을 요구하는 것을 그들의 연약함을 어필하는 어리광 정도로 치부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면, 혹은 몸이 힘들어지면 회사를 일찍 관둘 여성. 생리 휴가를 쓰고, 육아 휴직을 하며 회사에 피해를 가져오는 여성. 자신들의 장난을 성희롱으로 확대 해석하면 이를 책임져야 하는 성가신 여성. 외모가 쇠퇴하면 그의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여성. 기업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하므로,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기업은 여성을 위와 같이 연약하고 회사에 소홀한 존재라는 허구의 프레임에 가둬놓고,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하여 차별을 조장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만, 기업은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저 여성은 결혼을 하여 남성의 권력과 부에 기대어 그들을 서포트하기 전에 잠깐 회사에 머무르는 ‘여자 아이'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업은 여성을 가장 나중에 고용하여 가장 먼저 자르는 경기의 조절장치으로 활용하면 된다.
더불어 경쟁이 가열화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촘촘하게 구분된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짐으로 인해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계층과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또한 다양해진다. 그러나 도태되는 이들에 대한 사회보장책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있다고 해도 유명무실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제적으로 쥐어진 이 선물은 피기득권으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희생하게 만든다.
이런 선물이라면 받지 않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이런 선물이라도 받아 놓는 것이 좋을지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으나,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졌으니 결과의 불평등은 오롯이 받아들이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이제 이러한 강제적인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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