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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 이론의 극단으로 갈 수 있을까.2018-10-19 1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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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루빈과 버틀러의 글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섹슈얼리티가 구성되는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으며 푸코의 통치성의 개념을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다.

푸코는 성의 역사를 통해서 성적 실천이 어떤 주체와 시민성의 자질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근대적 실천 속에서 이성애적인 사회로 구축되어가는 과정은 푸코와 게일루빈 그리고 버틀러를 읽으며 거칠게나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푸코보다 레비스트로스, 엥겔스, 모건 등의 작업이 앞섰던 것이었지만

푸코를 참고하자면 통치성이라는 것이(또는 그에 준하는 정치경제적 요청에 의해)

하필이면 특정 시기에 특정한 주체를 만들어내는 실천의 측면으로 강조되었고,

이성애적 강제와 억압을 동반해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게일루빈은 가부장제라고 표현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지만, 가부장제적 정치경제가 이성애를 강요하고 근친상간을 금지하면서

 여성과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가 정체성이 되게 하는 것을 섹스/젠더 체계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강제된 이성애가 인류학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밝히며 여기에는 단지 문화적으로 축적된 것 이상이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교환, 증여로 표현되는 정치경제학의 측면이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 프로이트 그리고 엥겔스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이들의 논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이를테면 이성애를 자연화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축소되지 않을 수 있었을 이론적 틈과 이성애 편향적으로 왜곡되는 그 지점을 톱아낸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의해서도 여아가 어떤 섹슈얼리티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지를 밝히면서 양성적 기질을 가진 한 아이가 어떻게 여자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약간은 경계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이다.

남근 선망과 거세 개념을 제공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적 인격을 생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며 상징계적 이론일 따름이라고 보려는 긴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정신분석학 안에서 멜랑콜리아, 우울증이라는 감정의 구조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논증한다.

앞질러 설명하자면 결국 버틀러의 논의도 게일루빈의 논의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이성애 중심성을 비판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강제로 이성애적 억압이 작용하는가이다.

우울증이라는 증상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치시키게 되는가에 따라서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가지게 하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이성애 토대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은 그것이 수행하는 거부를 통해 강화된다.

젠더를 표현하는것이라고들 하는 섹슈얼리티의 개념과는 반대로,

여기서 젠더 그 자체는 섹슈얼리티에서 명료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잔유물 바로 그것으로 구성된다.(361)

 

 



나 자신을 잃어버린 기억이 없지만 이미 나는 잃어버린 것에서 출발한 존재로 설명할 수 있다.

다른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통치되고 순치된 실천을 수행하기 위해서 나는 상실을 겪어왔다.

따라서 우울증은 인간 존재의 토대가 되어버렸다고 설명할 수 있다.

동일시라는 수단을 통해 유아는 공격할 수 없는 권위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리게 된다고 말했다시피.

사랑의 대상, 동일시의 대상을 상실하는 나의 정체성을 통해서 인간으로 불리는 문명적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그럼 이것은 나의 개인사, 즉 친족이라는 사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친족 정치경제학에 속하는 동학과 동궤를 갖는다고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동성애를 핍박하면서 얻은 정체성으로서의 이성애적 우울증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만들었다는 위의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이 앎에 대한 실천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이성애적 실천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반정치적이고 반지성적인 것이 되지 않을까?

반정치적이고 반지성적인 실천을 멈추기 위해서 나는 나의 이성애적 인식을 물리고 또한 이성애적 지향까지도 버려야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위험한 질문 위에 놓이게 된다. 이건 분명 위험한 것이다.

우울증적 정체성을 얻어가는 과정이 상실의 내면화였다면 이것은 또다른 상실의 내면화로 다가가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려 이제까지 살았던 연대들을 다 뒤집어내면서)

하지만 반대는 통한다고 했다.

동성애를 억압한 이성애를 억압한다고 해서 나의 실천이 정확하고 적실한 실천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 섹스/젠더 체계의 공모 질서를 빠져나와 또는 균열을 내면서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을 겪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미 답은 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거부라고 나와있다.

가령 낙태죄금지, 반동성애에 대한 반대, 차별금지법 옹호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나에게 어떻게 인식적으로 깊이 적용가능한 일인지는 시간을 두고 착안할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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