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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주차] 섹스-젠더 체계의 내부이자 외부로서의 틈새2018-10-12 16: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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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젠더 체계의 내부이자 외부로서의 틈새

 


테라스 드 로레티스는 페미니즘을 성적 차이가 아닌 젠더의 층위에서 사유하고자 한다. 성적 차이는 성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개인의 차이로만 좁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반해서, 젠더라는 개념은 성을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의 층위에서 성을 사유하기 위해 드 로레티스는 정체성, 가치, 특권, 친족 내 위치, 사회 위계에서의 지위와 같은 의미들을 사회 내 개인에게 지정하는 재현 체계인 섹스-젠더 체계를 개념화한다. 드 로레티스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섹스-젠더 체계를 통해 재현된 구성물이다. 즉 성은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섹스-젠더 체계라는 재현의 체계에 따라 구성되는 특정한 의미효과의 산물이자 과정인 것이다.

 성을 재현의 산물이자 과정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모든 보편적 실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드 로레티스가 독특하게 정의하는 경험의 개념으로부터 기인한다. 드 로레티스는 경험을 신체의 체험에 따른 감각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퍼스적인 의미에서 자기와 외부 세계 사이의 기호학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효과, 습관, 기질, 연상, 지각의 복합체로 정의한다. 경험은 의미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고, 경험에는 언제나 기호가 매개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남성 혹은 여성의 경험은 단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기호적으로 의미효과를 산출하는 과정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 여성이라는 기호의 효과 없이는 여성의 경험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행위의 보편적 주체를 전제하지 않고 실천을 사유하려는 버틀러의 행위 주체성이론과 만난다. 버틀러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주체로 세우는 재현적 정치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내고 새롭게 정의를 해야지 만이 페미니즘의 정치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체로 세워지는 보편적 여성은 드 로레티스의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섹스-젠더 체계에서 재현되는 보편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경험 혹은 실천이 기호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기존의 기호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의 조건에 개입하는 일(다시 말해 실천)이 된다. 따라서 드 로레티스나 버틀러나 기존의 보편적 성을 다시 정의하기 위한 공간을 열어내는 것을 공통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한 가지 드 로레티스가 버틀러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성적 주체를 재현가능하게 하는 섹스-젠더 체계와 이로부터 이탈하는 페미니즘의 주체를 외화면(space off)과의 유비를 통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영화 이론에서 외화면은 스크린의 바깥을 뜻한다. 공식화 된 촬영과 편집이라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완성된 필름이 스크린을 통해 전개되면서 관객들에게 자연스러운영화로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을 (영화적 층위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봉합이라고 한다면, 외화면은 그러한 영화 장치가 미처 포획을 하지 못하는 장소이자, 영화를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포획하고자 애쓰는 장소이다. 이러한 외화면 개념을 드 로레티스는 헤게모닉한 담론의 주변부에 위치한 공간, 제도들의 작은 틈, 권력-앎 장치의 균열에 기입된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한다. 따라서 기존의 섹스-젠더 체계에서 재현된 성과는 다른 성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섹스-젠더 체계 안에 재현된 공간으로부터 암시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공간으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드 로레티스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젠더 체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외화면이 영화의 내외부를 관통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화 장치를 통해 구축되는 이데올로기의 틈새인 것처럼, 페미니즘의 주체는 섹스-젠더 체계의 틈새에서 정의된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체를 틈새라는 공간에 위치 지을 때의 흥미로운 점은, 페미니즘의 주체가 위치하는 공간은 체계 바깥도 안쪽도 아니지만, 체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만 하는 비가시적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외화면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전제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따라서 외화면은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는 점에서 물질적인 동시에, 필름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가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비가 맞다면) 섹스-젠더 체계의 틈새는 물질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사회적 공간이어야 한다.

 다만 드 로레티스는 이러한 섹스-젠더 체계의 틈새로의 이동이 어떤 실천을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술하지 않는다. 버틀러는 보편적 주체를 끊임없이 재정의하는 투쟁의 장소를 실천의 공간으로 개념화했다면, 드 로레티스는 젠더 체계의 안팎을 이루는 틈새를 실천의 공간으로 개념화했다. 투쟁의 장소에서의 실천은 논쟁과 불화, 분파의 형상을 띤다면, 과연 틈새의 공간에서 실천은 어떤 형상을 띠는지 좀더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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