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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주차 쪽글] 권력 효과로서 목적론적 전도와 억압의 물화2018-11-30 18: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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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차 쪽글]  20181130. 쪽글. 전주희. 


범위 : 2. 전복적 몸짓들 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2) 푸코, 에르퀼린, 그리고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제목 : 권력 효과로서 목적론적 전도와 억압의 물화



버틀러가 페미니즘 이론을 이성애적 매트릭스 안에서의 유희로 몰아세우면서 버틀러 ‘이전’과 ‘이후’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새로 쓸 때, 그녀가 쥐고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론이 가지는 인과론의 전도이며, 그리하여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유물론적 기획이다. 이러한 비판의 기획이 남성 철학자 일반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의 급진적인 철학을 향할 때, 버틀러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성애중심주의 아래에 흐르는 형이상학적 전제만이 아니다. 


관념론 대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사유의 전장은 오랫동안 정신 대 물질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정신과 물질의 우위를 다투는 문제였다. 하지만 유물론적인 사유가 ‘비판’의 기획과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현실의 저편이 아니라 현실 속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을 사유하는 길을 열게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프로젝트가 그러했고, 버틀러가 참조하고 있듯이 푸코의 기획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버틀러가 형이상학적 토대에 대해 심문할 때, 버틀러의 이론은 존재론적 지평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정치의 문제를 날카롭게 예각화하는 데까지 단숨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이 목적론적 전도로 기울어지는 지점, 이곳은 바로 억압이 현실의 바깥으로 탈정치화되는 지점이라는 버틀러의 비판을 보자.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을 물화한다.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은 기호계에 여성의 몸(출산)과 시적 생산을 배치하지만, 이러한 이질적 충동들은 결국 아버지 법 안에서, 아버지 법을 통해 재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기호계의 충만한 충동들을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상징계의 가장 취약한 영역”(249)에 불과하게 되며, 더욱이 완전한 상징계의 거부를 불가능하기 때문에 크리스테바에게 해방 이론은 기각된다. 모성이 기호계에서 특권적이라면 여성의 몸은 억압의 정당성을 가져다주는 주요한 조건이며, 이에 따라 동성애는 반박된다. 동시에 모성성 역시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이 차단되고 이성애적 재생산의 질서에 종속되며 생물학적 목적론(255)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모성 본능이 아버지 법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의 존재론적 우위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고 자체가 법이 가지고 있는 작동방식 자체라는 점이다. 법은 억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억압의 원인으로서 법을 은폐하며, 결과를 원인으로 전도시킨다. 따라서 “크리스테바는 욕망을 억압한다고 일컬어지는 법이 바로 욕망의 원인이 되는 방식을 생각하지 못한다.”(257) 법은 욕망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그 ‘욕망’을 생산한다. 


이것은 법을 억압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문제를 포함한다. 즉 법은 상징계를 수립할 뿐만 아니라 기호계를 억압하며, 그렇기 때문에 기호계의 지배 원칙이 된다.(258) 그런데 기호계가 마치 상징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충동들이 흘러넘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가상이야말로 ‘아버지 법’의 핵심적인 기능이다. 이 법은 자신을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면서 작동하기 때문에 인과론의 전도가 일어나며, 따라서 관념론적 가상, 여기서는 이성애 매트릭스라는 가상안에 머물게 한다. 


버틀러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나는 출산 행위인 동시에 시적 개념으로 찬미된 행위(259)를 들춰냄으로써 크리스테바의 숨겨진 참고문헌을 폭로하고, 그녀야말로 ‘아버지 법’(플라톤) 아래에 있음을, 그리하여 관념론에 대한 모종의 후예임을 돌이킬 수 없게 드러냈다. 


이러한 버틀러의 작업은 푸코가 있기에 한층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푸코는 영리하게도 성(sex)의 기원론적 사유를 해체하기 위해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메커니즘을 역사화한다. 권력인 통제하고자 한 것은 성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였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규율과 통제는 ‘섹스’라는 결과를 산출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기원의 자리로 옮겨진다. 


왜냐하면 권력은 섹슈얼리티를 영속적으로 규율하고 통제하기 위해 ‘섹스’를 본질화시키면서 동시에 권력의 작동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권력이 영속화되면서 감춰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권력과 섹스 사이에 외적, 자의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섹스가 이런식으로 본질화됨녀 그것은 권력관계나 자신의 역사성으로부터 존재론적으로 면책을 부여받는다. 그 결과 섹슈얼리티 분석은 섹스 분석으로 격하되고...”)265)

따라서 법 바깥은 없다. 그러므로 억압이 곧 해방의 좌표가 되는 억압의 물화 역시 기각된다.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푸코는 동요한다. 에르퀼린을 바라보는 푸코가 그렇다. 

버틀러는 동요하는 푸코를 유물론적 기획에 따라 더 밀고 나간다. 에르퀼린의 쾌락은 법의 ‘외부’에 있지만 동시에 이 법은 자신 안에 그 ‘외부’를 포함한다. 즉 에르퀼린의 욕망은 법을 체현하는 한에서 법의 ‘외부’이다. 다만, “칭호를 부여받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모반만을 생산하는 법의 기괴한 역량에 행해진 증언으로서의 법을 체현하는 것이다.”(284)


은유는 때로 사태를 모호하게 만든다. 버틀러가 말하는 법의 기괴한 역량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법의 양가적 산물, 즉 법이 구성하려는 것과 억압하려는 것의 양가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는 버틀러를 쫓아 유물론적 기획안에 작동하는 법에 도달했다. 그리고 존재론적 기획에서 도약해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런데 버틀러가 생각하는 법의 양가성 혹은 기괴한 역량은 또 다른 목가적인 해방에 대한 기획을 포함하는 것일까?마치 자본주의가 자신의 매장인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맑스의 기획처럼 말이다.

버틀러의 유물론적 기획은 어디까지 나아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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