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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주차 쪽글] 버틀러의 전복: 크리스테바적 전복의 반동성, 푸코의 에르퀼린 전유 방식 비판을 통해2018-11-30 1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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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몸의 정치학

크리스테바에서 상징계는 모성적 몸과의 기원적 관계를 억압함으로써 성립하는, 일의적으로 의미화된 문화의 영역이며, 기호계는 그 모성적 몸/의미와 욕망의 근원적 다원성을 표현하는 시적 언어’(혹은 출산 행위로 인한 모성성)로 작동하는 언어의 다른 차원이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적 전복 전략의 핵심에는 기호계와 그것을 통한 모성적 몸의 회복이 놓여 있는데, 버틀러는 크리스테바 이론 내 기호계의 정의와 위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크리스테바적 전복 전략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크리스테바에서 전()상징계적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 모성적 몸으로의 회귀는 상징 질서 하에서 성립하는 일관된 정체성의 상실로서 정신병의 양상을 띠는데, 여성(모성적 몸을 우울증적으로 합체한)의 동성애는 모성적 몸에 대한 밀착으로 이해되면서, 여성 동성애와 정신병이 이어진다. 이 여성 동성애/정신병은 시적 언어로 상징 질서 안에서 구현되지만, 정신병으로서 공공연하게 문화적으로 유지될 수 없'(247)으므로, 시적 언어가 갖는 전복적 가능성의 힘은 의심스러워진다. 사실 크리스테바가 상징계를 문화와 등치하고, 기호계를 상징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하며, 억압 이전의 모성적 몸을 가정하는 한 이러한 결론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레즈비언의 경험을 문화 변용에 선행하는 어떤 퇴행적인 리비도 상태로 설명'(252)함으로써, 크리스테바는 부권적-이성애의 특권이라는 궤도 안으로 들어간다'(251). 따라서 크리스테바에서 문화적 전복의 가능성(상징계의 완전 대체나, 기호계의 상징계와 동등한 '지위얻기 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징계 안에서 산발하는 일시적 전복들은 결국 상징 질서에 굴복할 운명에 놓여 있으며, 이는 아버지 법/모성적 몸을 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문화적 (전복) 실천의 한계이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발견되는 이 모성적 몸의 물화는 크리스테바가 충동의 이질성/모성적 몸에의 의존성을 상징계 이전에 자연스럽게 놓는것에서 발견된다. ‘언어가 존재하기 위해서 우선 충동이 억압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의미를 언어로 재현 가능한 것에만 귀속시킨다면, 충동이 언어로 등장하기 전에 의미를 충동에 귀속시키기란 불가능'(253)함이 분명함을 버틀러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충동은 적어도 충동의 재현물 이후에 오는 것이 된다. 결국 크리스테바적 비부권적 인과론(모성적 인과론), 일차 억압을 담지하는 부권적 인과론을 무비판적으로(크리스테바의 경우, 버틀러에 따르면,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발생한 전담론적 리비도의 다양성’(258)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전복 전략보다는 지배 담론의 재생산 양태에 가깝다.

버틀러는 마지막으로 푸코의 담론 분석의 방법론을 적극 언급하면서 모성적 몸이란, 여성의 몸이 모성성을 자신의 본질이나 욕망의 법칙으로 간주하기 위해 필요한 섹슈얼리티 체계의 효과나 결과물로 이해’(260)되어야 함을, 모성적 몸의 전()담론적 위치-짓기는 특정 권력관계의 자기확장 및 자기 은폐의 전술의 일환임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사법적 법의 생산적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버틀러는 대안적 해방 전략을 구성한다; 전복은 항상 내부로부터의 전복으로서, 몸의 해방은 법이 스스로를 거스르는 작용을 하면서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변이태를 양산하며 나타날 가능성’(262)에 집중하여 그 문화적 가능성을 활짝 열 때 가능하다.

 

2. 푸코, 에르퀼린, 그리고 성적 불연속성의 정치학

앞서 푸코는 기존 페미니즘 이론, 구조주의적 성차 이론의 문제점을 계보학적으로 검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나, 그 역시 자신이 제시한 섹슈얼리티 권력체계에 대한 담론적 분석 요구와 모순되는, 일종의 성적 해방의 이상을 (특히,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부친 짧은 서문(이하 '서문')에서) 제시하고 있다. 푸코는 어떻게 자기 이론에 의해 비평의 대상이 되는가?

푸코가 생각하는 양성구유 인간으로서의 에르퀼린의 성적 세계는 몸의 쾌락이 섹스를 즉각적으로 자신의 기원적 원인이나 궁극적 의미로 의미화하지 않는 세계'(267)이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에르퀼린에서 해방을 기다리는 어떤(명확히 규정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문화적/기원적 섹슈얼리티(예를 들어,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를 가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법 앞의 섹슈얼리티의 제시는 섹슈얼리티(장치로서의)를 언제나 담론적/제도적으로 종별적인 역사적 관행 안에서 생산/구성되는 것으로 본 자신의 입장을 논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일기를 푸코적 방식(특정 섹슈얼리티에 대한 유토피아화 대신, 어떤 사회적-역사적 관행이 섹슈얼리티 권력체계를 생산하는 조건인지를 살피기)으로 재분석하여 푸코가 놓친 부분을 자신의 담론적 분석으로 메운다. 에르퀼린의 섹슈얼리티는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양가적 산물이다'(283). 에르퀼린은 해부학적 상징 질서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법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체현할 수 없으나 그/녀가 분명히 법 '안에있다는 점은, 법이 단순히 다르게 자연화된 이질성에 부과하는 문화적 과제'(284), , 사법적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님을 드러낸다. ‘법은 자연이라는 자신의 개념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이분법적, 비대칭적 몸의 자연화를 통해 그 합법성을 획득’(285)하면서 주체’와 동시에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정체성들을 생산한다.

 

결론적 비과학적 후기

푸코가정체성의 탐색을 사법 권력의 형식이라는 맥락에 위치’(284)지으면서 정체성이 법에 의해 규제적으로 생산됨을 폭로하려 한 시도는, 젠더 트러블이 출간된 당시의 세포생물학의 영역에도 적용 가능하다. 성염색체 X, Y와 별개로 남성성을 결정하는 염색체의 존재를 주장한 연구에 대한 비판으로는 우선, 생물학 연구에서 여성성이 남성성의 부재나 그 수동성으로 이해되어 왔음에 대한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는남녀의 상대적 지위와 젠더의 이분법적 관계 자체와 관련된 문화적 가정들이 성을 결정하는 연구의 틀을 정하고 그 중심이 된다는 점’(290)에 주목한다. 이러한 담론적/계보학적 분석은 섹스(문화로서의 젠더에 선행하는 어떤 '')-젠더(문화, 혹은 섹스라는 본질의 반영)의 구분이 불가능함을 보이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범주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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