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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회차 쪽글] '금기를 권력으로 재공식화하기' 2018-11-23 15: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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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2장 금기,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 모태의 생산

 

3절 프로이트와 젠더 우울증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대상에 대한 포기의 거부대상에 대한 동일시로 나타난다. 이제 동일시의 대상은 에고의 일부가 된다. 바로 이것이 우울증의 메커니즘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형성되는 성격에 대한 설명을 젠더 정체성의 획득에 적용한다. 만약 이때 포기되는 대상이 동성애적 대상이라면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포기의 거부가 젠더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형성된 젠더는 포기된 사랑을 내면화한 우울증적 젠더가 된다. 프로이트가 젠더 정체성의 획득을 설명하는 이 틀은 애도와 멜랑꼴리자아와 이드두 편의 논문에서 정교화된다. 두 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프로이트의 질문 중 하나는 남자아이가 왜 어머니를 거부하고 아버지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는가’(199)이다. 프로이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도입하며, 근친상간 금기와 거세공포를 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의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우울증이다. (아이는) 금기로 인해 대상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슬픔을 부인하고 자기화한다는 점에서 애도와는 다른 방식을 보이는 우울증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우울증이라는 메커니즘은 프로이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길목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고, 그는 최초의 양성애자 아이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상실한 대상을 내면화하고 이를 통해 이성애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방식이 다른 한편으로는 에고의 형성 과정으로도 요약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 있어 에고가 형성된다는 것은 젠더 이분법에 맞춰 성별화되는 과정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으로 에고를 가진 (정신분석적) 인간 주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금기의 생산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결국 금기의 결과를 금기의 원인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장에서 거듭 설명하였듯이 법의 결과물을 법의 기원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는 형국이다. ‘프로이트가 성생활의 일차적 사실이나 성생활을 구성하는 사실로 가정한 기질은 법의 결과물이다. 분명한 젠더 정체성과 이성애를 생산하고 규정하는, 내면화된 법의 결과물인 것이다.’(208)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면서 모순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해소 단계에서 나오는 개인의 차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서술에서 “-그게 무엇으로 구성되었든 간에-” ‘‘기질이 결정적이다.’ 와 같은 표현이 결정적인데, 이러한 표현에 숨어 있는 (프로이트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의혹들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초월적 법을 가정하고 그것을 절대화하고 있다고 본다.

버틀러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내파하는 대목을 따라가보자. 프로이트의 서술에서 한 사람이 욕망하고 사랑하던 타자의 상실은 바로 자아구조 안에 타자를 은신시키려는 특별한 동일시 행위를 통해 극복된다. “에고로 도피함으로써 사랑은 소멸을 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그저 일시적이거나 이따금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새로운 구조가 된다. 사실상 타자는 자신의 속성을 끊임없이 내면화하며 에고의 일부가 된다.’ ‘“대상과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는 이제 성애적 카섹시스의 대체물이 된다. 그 결과 사랑했던 사람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는 포기될 필요가 없다.”(p.170)후에 프로이트는 상실한 대상의 내면화와 유지과정은 에고의 형성과 대상 선택에 있어 결정적인 요건이라고 분명히 밝힌다.’(197~198)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두 개의 성적 기질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틀에서 소년이 아버지에 의한 거세 공포가 아니라 거세 자체에 대한 공포남성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여성화의 공포 때문에, 보통 이성애자가 되기를 택하는 결과’(200)가 나온다. 나의 남성적 기질(=이성애. 이 경우, 여성을 사랑하는 것)을 내보이기 위해 이성 부모(어머니)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최초의 이성애 욕망(근친상간)이 아니라 이성애에 복종해야 할 동성애적 카섹시스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여성화의 공포 때문에 아버지를 동일시하며 이성애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이 경우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드라마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최초의 양성성에서 동성애를 억압하고 이성애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쓰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대목에서 버틀러는 묻는다. ‘어머니에 대한 카섹시스의 우선성은 의심스러워’(200)지지 않니? 또한 소년의 대상-카섹시스인 최초의 이성애도 의심스러워진다’(200)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소년이 어머니를 선택하는 것, 최초의 이성애는 동성애적 카섹시스를 감추기 위한 것, 억압하기 위한 것이 된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소년의 사랑은 거부된다. 버틀러는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처벌하는 아버지 때문? 아니면 소년 스스로 금지한 욕망의 대상?’(200) 이유는 어찌되었든, ‘거부된다. ‘거부는 프로이트가 젠더 통합이라 부르는 이론 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200) 거부된 사랑의 대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 남자아이는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를 상실하고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통해 상실을 내면화하거나 이성애적 애착을 다른 것(아버지)으로 대체한다.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인데, 남자아이에게서도 그랬듯이 ‘‘긍정적인(동성과의 동일시)’것이거나 부정적인(이성과의 동일시)’것 중 하나가 된다.’(201) 그런데, 거부이후에 나타나는 동일시의 방향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바로 이 대목이 버틀러가 지적하는 프로이트의 모호함이다. 그는 “-그게 무엇으로 구성되었든 간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강약 정도라고 말한다’(201) 하지만, 버틀러의 말대로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기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듯이, 이 최초의 기질이란 허구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그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져와서 이성애적 주체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양성성을 가정했다. 그리고서는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거부 이후에 오는 자기 동일시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 그들의 기질론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최초의 양성성이란 전제는 흔들리고 다시 이성애적 욕망이 초기값으로 설정된다. 프로이트의 설명에서 여성적 기질은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상관물로 갖는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방식에서 양성애라는 말은 두 개의 이성애적 욕망이 공존’(202)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최초의 양성성 논의 안에는 동성애가 없으며, 오로지 이성들끼리만 서로 매혹된다.’(202) 애초에 프로이트에게 이성애 바깥은 없었다. 프로이트는 어떻게 양성애를 가진 아이가 이성애자로 주체화되느냐를 설명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 기원에 대한 질문은 사실상 아이의 이성애적 선택을 합리화 하는 토대일 뿐이다. 그의 설명에서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성애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프로이트의 틀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도덕적 작인으로 작용하는’ ‘에고 이상’(204)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에고의 내면화된 상실’, ‘대상에 대해 본래 느꼈던 비난’(204)이의 배경에는 에고 이상이 있다. 에고 이상의 역할은 허가와 금기의 어떤 내적 작인으로 욕망의 적절한 방향 변화와 승화를 통해 젠더 정체성을 통합한다. 우울증적 젠더를 형성하는 최초의 법이 바로 에고 이상이 아닐까. 버틀러의 표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일련의 허가와 금기로서의 에고 이상은 남성적 동일시와 여성적 동일시를 규정하고 결정한다.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207)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드라마에 진입한 아이들에 대해 양성적 기질을 가졌으나 개개인 마다 여성적/남성적’ ‘기질의 특성 역시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기질의 정도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서 그는 선택 이전과 이후를 자연/문명으로 나누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자연이라고 생각한 기질법의 결과물이다. ‘기질자신의 계보학을 없는 척 위장하려는 어떤 과정의 결과물강제된 성적 금지의 역사적 흔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논의한 바는 없으나 동성애에 대한 금기는 필경 이성애적 근친상간의 금기에 선행하는 것 같다’(208)는 것이 버틀러의 입장이다. ‘오이디푸스적 딜레마에 해답을 주는젠더 동일시의 우울증은 어떤 도덕적 명령의 내면화(에고 이상이라는 메커니즘을 프로이트 스스로도 설명했듯이.)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며, 이 명령은 그 구조와 에너지를 외부에서 강제된 금기로부터 얻게 된다.’(208) 이 경우 도덕적 명령은 동성애 금지일 것이다. 이 도덕적 명령이 내면화된 기질을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4절 젠더 복잡성과 동일시의 한계

 

젠더 동일시(identification)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의 이분법적인 틀을 깨기 위해 어떤 전략을 만들 수 있을까. 단순히 제3의 항을 제공하는 것으로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모성적 동일시의 문제에 주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지만, ‘이분법적 이성애틀을 정교하게 강화하는 경향’(211)이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아버지의 법(상징계의 법)을 보편적 결정주의로 이해하고 이 법이라는 누빔점이 정체성을 미리 고정시키는 것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이 틀이 만든 환영을 이해하는 것과 이 틀을 절대화하는 것은 별개이다. 버틀러는 이 법이 역사적 가변성이나 역사적 가능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212)단정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지적한다. 라캉은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 법이 주체에게 첫발을 내딛게 하는 최초의 순간’(213) 이라는 기원만큼은 예외적으로 쓸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하지만 말하는 주체 앞에 있는 역사란 가능한 것인가?

동일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 중요한 논쟁 중 하나는 이 동일시가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것이다. ‘동일시의 의미나 전복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이런 동일시가 정확히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여전히 불분명한 채 남아 있다. 동일시가 보존된다고 일컬어지는 내적 심리공간은, 다른 심리 작용을 수행하는 환영의 장소로 이해될 때만이 의미가 통한다.’(214)

버틀러는 동일시(합체라는 환영)을 말하면서 이것이 이제 몸 혹은 쾌락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확장하여 설명한다. 정신분석의 설명대로 젠더 동일시를 우울증을 통해 유지되는 동일시가 합체된 것’(214)이고, 이때의 ‘‘합체란 환영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 ‘대상이 취해지는 내적 공간은 상상된 것이고, 그런 공간을 소환해 물화할 수 있는 언어 안에서 상상된 것이라고 한다면’, 합체되는 공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214) 버틀러는 합체란 환영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로이샤퍼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합체되는 공간, 그러니까 동일시의 공간은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이 공간은 문자 그대로 몸 안이 아니라’ ‘몸 위에다시 말해 그 표면적 의미의 몸’(214)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상실한 대상에 대한 대체는 의 형성을 통해 이루어진다.(215) 그런데, 이때 애도와 우울증의 말의 형성의 차이에 유념해야 한다. 내투사가 애도의 과정으로 의미화 가능성을 가진다면, 합체는 근본적인 명명 불가능성에 있다. 이는 각각 애도와 우울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는 이러한 구분을 에이브러햄과 토록이 내투사가 애도 작용을 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던 것을 가져와서 전개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동일시의 합체환영’(218)이라는 것 자구적 의미화의 환영이거나 자구적 의미를 만드는 환영’(218)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 우울증의 구조 덕분에 몸의 자구적 의미는 자신의 계보학을 감추고 스스로를 자연스러운 사실의 범주 안에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219) 그리하여 어떤 젠더가 된다(becoming)는 것은 자연스러워지려는 수고로운 과정’(219)을 수반하고 이러한 젠더화된 의미에 의해 우리 몸 역시 의미화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의 특정 기관에서 쾌락나온다고 말하지만’ ‘몸의 각부는 그것이 젠더 특징적인 몸에 대한 규범적 이상에 상응한다는 이유 때문에 쾌락을 상상할 수 있는 진원지가 된다’(219)

이미 문화적 기호인 몸은 항상 그것이 야기하는 상상적 의미에 한계를 정하지만 결코 상상적 구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환영으로 만들어진 몸은 실재로서의 몸과 관련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 환영은 문화적으로 제도화된 다른 환영과의 관계 속에서만, 문자적 의미의 장소와 실재의 장소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환영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실재가 갖는 한계는 당연시된 몸의 이성애화 안에서 생산되며, 그 몸 안에서 신체적 사실은 그 신체성의 가차 없는 결과를 반영하는 원인이자 욕망으로 작동한다.‘(221)

 

5절 금기를 권력으로 재공식화하기

 

2장에서의 지금까지 서술 내용을 상기하면, 레비-스트로스, 라캉,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한 결과, 이들 이론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금기가 허가된 이성애와 위반적 동성애를 둘 다 생산하는 권력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상의 인류학, 정신분석학의 이론은 모두 금기 이전의 섹슈얼리티를 가정하고 근친상간금기를 젠더 정체성의 형성의 중요한 기제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금기가 금기 이전에 있는 욕망에 대한 금지를 위해 작동한다고 말하지만, 푸코의 이론을 경유하기만 해도 금기의 생산성은 분명하다. 또한 4절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도 드러났듯이 근친상간 금기이전에 동성애 금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사실상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금기의 필요로 내세운 아이들의 기질이란 동성애 금기가 이미 내면화된 기질로 이것은 자연이 아니라 이미 문화화된 기질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법보다 앞서 있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환영 혹은 법 보다 앞서 있는 몸에 대한 환영이 어떤 것인지 확인한 셈이 된다. 여기서 금기의 생산성을 비판하는 작업에서 한 가지 염두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금기가 권력이라고 할 때 이것의 억압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그것이 작동하지 않은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의 문제다. 앞서 가부장제의 자기 물화 과정을 비판하기 위해 기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그 의도는 어떻든간에, ‘그런 가부장제적 기획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물화라는 것이 입증’(154)되었던 경험에 대해 비판했던 버틀러의 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는 루빈의 여성 거래의 작업이 푸코의 이론을 억압가설 비판(푸코)을 페미니즘 방식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젠더로 변해버린 분명하고 선험적인 섹스의 존재론적 실제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이 대목에 대해 루빈을 읽었던 날의 우리 세미나 시간에도 유사한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틀러의 작업은 금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사법적 지위로만 작동하지는 않는 그 금기의 생산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금기의 금기는 특정 형식의 섹슈얼리티를 금지하거나 명령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대체물이 아닌 한 결코 미리 규제될 수 없는 여러 대체 욕망과 대체 정체성을 자기도 모르게 생산한다.’(229)

 

이번 주는 한 달 전에 읽었던 버틀러의 우울증적 젠더, 거부된 동일시가 많이 생각나는 리딩이었다. ‘우울증적 젠더에 대한 서술에서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동성애의 경우 욕망의 양상대상모두의 상실에 부딪힌다는 점이었다. (이성애의 경우 욕망의 대상만 금지되기 때문에 대상을 바꾸면 된다.) 이를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 적용해 보면 어떨까. 아이의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 어머니라면, 이것이 부정되는 과정에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상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여자 아이의 경우 동성애의 사랑의 상실과 거부의 단계를 밟게 되어, 대상과 양상 모두를 부정당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뭔가,,, 이 사랑의 상실과 거부는, 훨씬 더 빡센 느낌이지 않나.)물론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려면 최초의 사랑의 대상이 어머니여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지금 내 관심은 이 이성애 메트릭스 안에서 여성이 겪는 사랑의 상실과 거부와 여성혐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현상을 설명하는 틀로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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